# 187
레벨이 갑이다
187화
자이언트를 만날 거라 여기고 잔뜩 힘을 주고 이동했는데, 그 이후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 흔한 자이언트 오우거나 드레이크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자이언트와의 전투로 인해 다들 도망간 건가.’
그게 이서우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신빙성이 높은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니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럼 자이언트들이라도 나와야 하잖아. 설마 우연히 마주친 건가?’
근처에 자이언트들의 본거지가 있다면 그 난리통에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
분명 동료들의 기운을 느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자이언트의 영역이 이 일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숲 중앙을 향해 달렸다.
“오빠, 꽤 많이 들어온 것 같은데?”
“폐허처럼 곳곳에 흔적이 있다고 했으니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응.”
그렇게 30분쯤 갔을까, 무너진 터가 발견되었다.
-고대 전설의 흔적을 발견하셨습니다.
-24시간 동안 생명력 자연 회복력과 마나 자연 회복력이 상승합니다.
“드디어 찾았나 보네.”
“응. 회복 능력까지 주는 걸 보니 확실히 이 근처가 맞나 봐.”
“하루 종일 효과가 지속되니 싸움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겠어.”
“힐러에게는 최고의 효과야.”
“그나저나 고대 전설의 흔적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몰라 나눠서 찾아봐야겠는데?”
“그러게. 그럼 나랑 백호는 우측을 살펴볼게.”
“그게 좋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채팅하고.”
“응.”
고대 전설의 흔적이 있는 곳은 언뜻 보기에도 수백만 평에 달해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시간을 절약하려면 흩어지는 게 나았다.
중앙으로 오면서 특별한 위험도 없었고, 만약 위험이 생기더라도 가속화를 이전보다 5배 이상 유지할 수 있어 대처할 수 있었다.
-오빠, 뭐 찾은 거 있어?
-아니. 넌?
-나도 아직. 남은 곳이 있으니 조금 더 살펴볼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찾아.
-응, 오빠.
넓은 범위지만, 차분히 주변을 살피자 확인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점점 범위가 좁혀졌다.
한데, 1시간을 넘게 조사해 봐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도무지 특이한 점이 없어 초조해졌다. 확신을 가지고 있던 만큼 불안감은 커졌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석상이었는데, 한쪽 날개와 꼬리가 언 뜻 보기에는 드래곤의 형상처럼 보여 자세히 살폈다.
형상을 만져 보고, 주변 바닥도 쿵쿵, 굴러보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확인을 하는데, 어느 한 지점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아래에서 마나가 나오고 있어. 확실해.’
모든 스텟이 500이 되기 전이었다면 너무 미미해서 느끼지 못했을 텐데, 지금은 온몸으로 마나가 느껴졌다. 비록 약해서 정신을 집중해야 했지만 확실했다.
-설아야, 찾은 것 같아.
-정말? 잠시만, 바로 갈게.
이설아와 백호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상한 점이 있는지 조금 더 살펴보았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마나가 느껴지네. 그리 넓지 않아 자칫 놓칠 뻔했네.’
“오빠!”
“아, 미안. 뭐 좀 생각하느라.”
“여기야?”
“마나 안 느껴져?”
“응. 난 아무 느낌도 없는데?”
이설아는 마나에 집중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님, 저도 느껴지지 않아요.”
“정말 미세한 기운이어서 그런가 보네.”
“아마 주인님이 펠렌의 후예셔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일단 이 밑으로 갈 방법부터 찾아봐야겠다.”
“제 생각에는 주인님이 펠렌 님의 힘을 끌어올리면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
“네. 오직 펠렌 님의 후예만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을 테니 입구 같은 건 따로 없을 거예요.”
“오케이.”
“오케이? 전 백혼데요?”
“어? 어.”
이서우는 벙 찐 표정을 하더니 백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마나에 집중했다.
‘이 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아, 그러면 되겠구나.’
이서우는 백호와 합체를 했다.
보다 확실하게 펠렌의 후예라는 걸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합체를 한 뒤 마나를 잔뜩 끌어올리자 밝은 빛이 바닥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오빠!”
“뭔가 벌어질 건가 봐. 준비해.”
“응.”
이설아가 이서우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후, 셋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나타난 곳은 지하 깊숙한 곳이었다.
합체가 풀려 밝은 빛이 사라져 마나를 끌어올리려는데, 갑자기 주변이 밝아졌다.
“주인님, 마법 장치예요. 역시 펠렌 님이셔.”
“왜?”
“펠렌 님이 엄청 게으르시거든요. 뭐든 다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셨죠. 들어오는 것도 편하게 되어 있고, 오자마자 불빛까지 밝게 들어오는 걸 보니 확실히 펠렌 님이 만들어 두신 곳이 맞는 것 같아요.”
“펠렌 님이 엄청 게으르시다고?”
“네. 아마 세상에서 제일 게으르실걸요?”
“그래? 근데 왜 본인의 흔적은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놨지?”
“그, 그건 저도 잘…….”
백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서우는 의기소침해 있는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서우의 목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애교를 부렸다.
“오빠, 몬스터는 없는 것 같아. 그치?”
“그러게. 별다른 기운이 안 느껴지네.”
외길의 긴 복도를 따라 천천히 들어가면서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지만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이동하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불빛도 밝아졌다.
한참 들어갔는데 막다른 길이 나왔다.
“여기가 끝이네. 문이 있나 찾아보자.”
“응.”
복도의 폭이 족히 20미터는 되었기에 나누어서 벽을 살펴보았다.
끝에서 중앙으로 오면서 살펴보았는데, 중앙 부분에 다다랐을 때 장난기 가득한 펠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후예임을 증명해 봐.
이서우는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합체 후 마나를 끌어올려 필살기인 가속화를 사용했다. 그러자 견고한 돌문이 스르르 열렸다.
합체 시간을 아끼기 위해 문이 열리자마자 다시 합체를 풀었다.
“생각보다 쉽네. 찾는 건 어려운데, 진행 과정은 쉽네. 백호 말이 맞나 봐.”
“그쵸?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니까요.”
이서우가 인정을 해주자 신이 났는지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한데, 문 안으로 들어가고 돌문이 닫히자마자 백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리석은 놈들, 감히 그분의 흔적이 있는 이곳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지금이라도 나가면 살려 주겠다.”
“아니, 증명할 거 다 증명하고 들어왔는데, 뚱딴지 같이 무슨 소리지?”
“그러게. 인정을 받고 들어왔는데 이상하네.”
“그것보다, 모습이나 드러내. 뒤에 숨어서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주인님, 저놈 본 드래곤이에요.”
“뭐? 본 드래곤?”
“네. 확실해요. 옛날에 한 번 싸운 적이 있어요. 그땐 저도 꽤 강해서 쉽게 이겼는데, 지금은 힘들어요.”
백호가 걱정을 담아 말하자 이서우는 주의 깊게 목소리가 흘러나온 방향을 살폈다.
복도와 달리 안쪽은 시커먼 공간이었다.
그때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서우가 가장 먼저 느끼고, 백호가 이어서 그 힘을 알아차렸다.
“주인님, 설마…….”
“그래. 아무래도 저 녀석 언데드인 것 같은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무래도 펠렌 님이 짓궂은 장난을 치신 것 같아요.”
“장난? 무슨 장난?”
“펠렌 님의 힘은 원래부터 강하지만 언데드에게는 더 강하거든요. 강력한 존재지만 자신의 힘을 사용하면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것 같아요.”
“언데드에 더 강하다고?”
“뭐, 사실 어떤 속성에 더 강하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시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럼 별거 아니라는 소리잖아.”
“그, 그게 그렇게 되나요?”
백호는 나름 주의를 주려고 한 것인데, 이서우의 태연한 반응에 머쓱해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본 드래곤은 자신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여기자 화가 났는지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이놈들, 감히 날 앞에 두고 뭣들 하는 짓이냐!”
-본드래곤이 분노합니다.
-어둠의 힘이 본드래곤의 능력을 최고조로 끌어냅니다.
-본드래곤의 공격력이 100퍼센트 상승합니다.
드디어 본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서우가 익히 알고 있는 그 형상 그대로였다.
“덩치도 꽤 크네.”
“네. 2천~3천살 사이의 성룡으로 만든 것 같아요.”
30미터가 넘는 커다란 덩치에 본 드래곤을 바라보면서도 이서우는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그게 본드래곤을 더욱 자극했다.
“죽어라, 이놈들!”
본 드래곤의 입에서 시커먼 물체가 나왔다.
백호는 공격을 피하면서 변신으로 덩치를 불렸다.
하지만 이서우는 향상된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정면으로 맞섰다.
휙! 휙!
단 두 번의 베기였다.
예전만큼 강해 보이는 동작도 아니었고, 연습을 하는 것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것이었다.
한데, 거대한 어둠의 구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 어떻게. 설마 그 자의 힘을 정말로 얻었단 말인가.”
본드래곤은 너무 허무하게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멈칫거렸다.
“꽤 자신 있어 하던 공격이 그 정도밖에 안 돼? 그러면 더 이상 널 테스트해 볼 필요는 없겠지.”
이서우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가 나타난 곳은 본드래곤의 옆. 거대한 체구를 지탱하는 다리를 잘라 버리기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서걱!
모든 동작이 이전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빨랐다. 모든 순수 스텟이 500이하일 때는 억지로 힘을 짜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한데, 지금은 물 흐르듯 너무 부드러웠다. 마치 아마추어 선수와 프로 선수의 차이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본드래곤이 무조건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격을 당하는 동시에 날개를 활짝 펴면서 이서우의 가슴을 노렸다.
“이크! 아슬아슬했네.”
가속화 상태여서 이서우는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자이언트를 만났을 때의 실력이었다면 심장이 관통 당했을 것이다.
이서우는 이후로도 본드래곤을 압박하며 생명력을 줄여 나갔다.
‘확실히 안정적이면서도 장기적으로 가속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어. 4차 전직을 이루면 얼마나 강해질까.’
500레벨이 되면 2천 살이 넘는 드래곤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은 2천 살만 되어도 9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10서클의 마법도 사용할 수 있지만 워낙 막강한 힘이어서 드래곤 자신조차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10서클 마법을 부담 없이 사용하려면 최소 6천 살은 되어야 하는데, 파괴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어쨌든 2천 살만 되어도 10서클 마법을 쓸 수는 있어 상당히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인간은 10서클의 경지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인간이 드래곤을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 경지를 뛰어넘어야만 10서클 마법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물론 펠렌은 그 이상의 경지를 이뤄 드래곤 로드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존재는 오직 펠렌 뿐이었다.
이서우는 늘어난 힘에 취해 본드래곤을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
공격이 갈수록 강해지니 본 드래곤으로서도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본 드래곤이 힘이 빠졌을 때, 이서우는 마나를 잔뜩 밀어 넣어 본 드래곤의 목을 잘라버렸다.
-본드래곤을 처치했습니다.
-320억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본드래곤의 반지를 획득하셨습니다.
-본드래곤의 뼈 1천 개를 획득하셨습니다.
드디어 본드래곤이 쓰러졌다.
이서우는 얼른 마나 비약을 복용했다. 본 드래곤이 언데드여서 언제 살아날지 알 수 없었다.
한데, 예상과는 달리 본드래곤은 조용했다.
“뭐지. 시체가 안 사라지네.”
“오빠, 혹시 되살아나는 거 아냐?”
이서우는 혹시나 싶어 대검으로 시체를 찔렀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체에서 검은 안개가 나오더니 본드래곤의 형상이 되었다.
이서우는 다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한데, 본드래곤은 싸울 의지가 없는지 공격 대신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하하하, 멍청한 인간,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무슨 말이지?”
“세상은 항상 균형을 맞춰 존속된다. 펠렌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와 대적하는 존재도 있는 법. 비록 그분께서는 잠이 들었지만 내가 죽음으로 인해 그분이 곧 잠에서 깨어나시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깨어나시면 난 영생을 얻을 터. 그때는 네놈의 목을 반드시 씹어 먹어 주겠다. 그리고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일 것이다!”
물어 볼 것이 있었지만 자신의 말만 남기고 본 드래곤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 * *
이서우가 본드래곤을 처치한 바로 그 시각.
뉴 월드를 모니터하던 직원은 헐레벌떡 팀장에게 보고를 올렸고, 팀장은 다시 부서장에게, 부서장은 부사장에게, 부사장은 대표에게 신속히 보고했다.
안재훈의 표정이 심각했다.
“평균 레벨이 500대가 되었을 때나 나와야 할 에피소드가 벌써 시작되었단 말인가.”
혼자 독백처럼 중얼거린 안재훈은 턱을 느릿느릿 어루만졌다.
“대표님,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야. 어차피 인공지능이 알아서 밸런스를 맞추니 상관은 없어. 하지만 이 에피소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잘 주시해.”
“네. 대표님.”
사용자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뉴 월드는 애초에 인간이 에피소드에 개입할 수 없게 락을 걸어 놓았다.
이벤트 등 에피소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들이야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중요 에피소드가 발생하면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물론 우회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어 변화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가 있을 때만 진행한다.
안재훈은 보고를 올린 사내가 나갔음에도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