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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갑이다-190화 (190/341)

# 190

레벨이 갑이다

190화

고통의 지역으로 간다고 하더니 갑자기 엄청난 크기의 블랙 드래곤이 보였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지만 실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설아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 블랙 드래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질문을 하려는데, 블랙드래곤이 먼저 선수를 쳤다.

“너구나. 펠린의 후예가.”

“넌 누구지? 그리고 여긴 어디지?”

“나? 난 펠렌의 맞수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넌 내가 만든 공간에 잠시 와 있는 거다. 물론 네 육체가 아니라 정신만 와 있는 것이지만.”

“결국 허상이라는 거군.”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펠렌의 힘을 가진 인간과 만나고 싶었으니까.”

“그래? 한데, 드래곤이 펠렌 님의 맞수라는 말이 믿기지 않는데?”

이서우는 그가 펠렌의 맞수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드래곤들을 쌈 싸먹을 정도의 강함을 가진 펠렌이다.

아무리 100미터에 육박하는 엄청난 크기의 드래곤이라도 펠렌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이서우의 목소리에 상대를 얕잡아 보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이서우의 태도에 블랙드래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더러운 수법을 쓰려 했던 자다. 그의 실체를 모르고 받들고 있는 널 보니 불쌍하군.”

“그래? 근데 왜 난 네가 더 불쌍하게 느껴지지.”

“크흐흐흐, 멍청한 인간 같으니.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지만 우리 드래곤의 수명은 무한하다 할 정도로 길다. 펠렌은 이런 날이 올지 몰랐겠지만 다시 내가 세상을 지배할 날이 머지않았지. 모든 인간이 내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온전한 펠렌의 힘을 찾지 못한 너도 마찬가지겠지. 자, 이제 누가 더 불쌍하지?”

“너.”

이서우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왜냐! 내가 네놈을 짓밟을 게 두렵지도 않다는 것이냐?”

“어. 그럴 수 있었을 것 같았으면 벌써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건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일 테지. 본드래곤이 친절히 말해 주더군.”

“본드래곤? 그게 무슨 말이지?”

“본드래곤이 네가 나타날 거라고 친절히 알려 줬지.”

“난 본드래곤 따위를 부하로 두지 않는다. 내가 남겨 둔 부하 녀석 중 하나가 쓰레기 같은 본드래곤을 부렸나 보군. 멍청한 놈들, 그렇게 자존심을 지키라고 했거늘.”

블랙 드래곤은 이서우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서우는 그의 말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뭐지. 본드래곤도 드래곤 석상도 분명 ‘그분’이라고 했는데. 설마 다른 대상을 지칭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블랙 드래곤의 태도가 충분히 납득이 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블랙 드래곤급의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뜻인데…….’

이서우는 적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생각하자 이번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블랙 드래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태연함을 유지했다.

“하긴. 본드래곤이 조금 많이 약하긴 했어. 너 정도급에서 부릴 놈은 아니긴 하지.”

“인간 주제에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은 아는군.”

“그나저나 날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뭐지?”

“고통의 지역으로 가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해서다. 내가 직접 복수를 해야겠지만, 모든 대륙을 지배하려면 꽤 시간이 걸려서 말이야.”

“그래서 날 고통의 지역으로 보내 버리겠다?”

“빠져나올 수 있다고 자신하는구나. 하지만 넌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운이 좋아 나온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내가 이미 모든 대륙을 삼킨 이후겠지. 그땐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널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하하하하하!”

이서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힘에 취해 내가 발견한 걸 놈은 몰라. 내가 처음 만난 놈이 소환된 본드래곤이 아니라 본드래곤 그 자체라는 걸 알았다면 달리 생각했을 텐데,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군.’

이서우는 처음 만난 본드래곤과 드래곤 석상은 전혀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블랙드래곤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난 본드래곤은 언데드였다. 블랙드래곤이 언데드를 사용하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가 직접 본드래곤을 언데드로 만들어 그런 역할을 하도록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본드래곤의 주인과 드래곤 석상의 주인이 다르다는 뜻이다.

이서우는 끝까지 블랙 드래곤이 이상한 점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화가 난 것처럼 행동했다.

“자존심도 없군. 나라면 그딴 곳을 만들지 않고 직접 복수를 했을 것이다!”

“멍청한 놈, 내가 과거 펠렌에게 당한 것이 바로 그런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철저히 세상을 지배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래? 하지만 네 뜻대로 쉽게 되지는 않을 거야.”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럼 고통의 지역에서 열심히 구르라고. 하하하하하하!”

블랙드래곤의 웃음소리와 함께 이서우는 현실로 돌아왔다.

고통의 지역인지 조금 전에 있던 던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빠!”

“걱정 마. 여기도 그저 던전일 뿐이야.”

“응. 오빠가 있으니 난 괜찮아.”

이설아가 그의 곁에 바짝 붙었다.

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 여긴 블랙 드래곤이 만든 공간이군요.”

“알고 있었어?”

“네. 예전 주인님과 한 번 와 본 곳이에요.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아요. 물론 예전 주인님이라는 전제가 붙지만요.”

“그런 거였냐?”

“네. 하지만 주인님도 이곳을 벗어나는 게 그리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때와 같다고 볼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하죠. 근데 느껴지는 기운이 그때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한 번 와 본 곳이니 공략법은 알겠네?”

“아뇨.”

“…….”

예상치 못한 백호의 대답에 이서우는 그게 가능하냐 하는 눈빛으로 백호를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사실, 그땐 제가 할 일이 딱히 없었거든요. 전 그냥 주기적으로 나와서 새로운 경치만 구경하다 들어가는 수준이었어요. 예전 주인님이 열심히 싸우는 모습도 보기는 했지만요.”

“그러니까 공략법을 모른다는 거네?”

“아쉽게도요.”

“대충 아는 건 없고?”

이서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깔린 사막의 모습이 이럴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딱 그랬다.

“네. 전 싸우는 장면밖에 보지 못해서……. 죄송해요, 주인님.”

“아냐. 일단 가면서 천천히 확인해 보면 되지 뭐. 출발할까?”

“응, 오빠.”

어차피 공략법을 알고 도전한 곳보다 모르고 간 곳이 훨씬 많았다.

블랙드래곤이 조만간 나타난다는 말에 걱정이 되어 마음이 조급했었는데, 지금까지 서둘러서 좋은 결과는 낸 적은 거의 없었다.

이서우는 마음을 차분히 하고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린 뒤 속도를 높였다.

모래로 덮인 곳이어서 생각보다 달리는 것이 어려웠지만 고수답게 금세 적응했다.

1시간쯤 갔을까. 온 세상이 사막 같은 곳이었는데, 멀리 마을이 보였다.

“이런 곳에 마을이 있네? 설마 몬스터 마을인가.”

“과거 주인님은 싸움만 하셨으니 그렇지 않을까요?”

“일단 가 보자.”

이서우는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하면서 천천히 마을로 다가갔다. 한데, 마을과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몬스터가 사는 곳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네요. 거친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어떻게 된 걸까요?”

“일단 살펴보면 알겠지.”

마을은 100가구 정도가 머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서우는 오감이 월등히 발달했다. 이곳에 생명체가 살아간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밤이라서 그런 건지, 이방인을 꺼리는 건지 다들 집에서 안 나오네.”

“얼굴도 안 내미는걸?”

“커튼 사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는 해. 인간인 건 확실한데, 다들 우릴 두려워하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한 집에서 튀어 나왔다.

“악마! 우리를 내버려 둬! 돌아가!”

“코코야, 안 돼! 어서 들어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얼른 나와서 코코라는 여자아이를 붙잡았다.

억지로라도 끌고 안으로 들어가려했는데 코코가 버티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아빠 내놔, 이 악마야! 우리 아빠 내놓으라고, 으아아앙!”

아이를 끌고 들어가려 했던 엄마는 힘을 풀고 아이를 부둥켜안고 같이 울었다.

갑자기 당한 일에 이서우와 이설아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저희는 오늘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흥! 또 우리를 속이려고? 이제는 절대로 안 속아!”

“코코 어머님, 우리는 정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네요. 왜 우릴 보고 악마라고 하시는 거죠?”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이설아까지 나섰다.

같은 여자여서일까. 이서우에게보다는 덜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여전히 경계의 눈빛은 거두지 않았다.

이서우는 이설아가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한 발짝 물러났다.

이서우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차린 이설아는 코코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했다.

“저흰 거대한 블랙드래곤에게 납치를 당해 이곳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없답니다. 그러지 마시고 왜 우리에게 악마라고 했는지 알려 주시겠어요?”

부드럽고 포근한 이설아의 음성에 코코 어머니는 불신을 어느 정도 씻어내고 이설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마음에 창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라도 눈빛은 속일 수 없었다.

“정말 블랙드래곤에게 납치를 당했나요?”

“블랙드래곤을 아세요?”

“네. 저희도 그 악마 같은 놈에게 납치를 당해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살고 있답니다. 저주받은 인생이죠.”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도마뱀이 허락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없어요. 평생을 이 나이 그대로 살아야 하죠. 제 남편과 마을의 남자들은 평생을 노예처럼 일만 해야 하고요.”

“노예로 일하셔야 한다고요?”

“네. 그래서 지금 이 마을에는 남자가 하나도 없는 거랍니다. 한 달에 한 번, 단 이틀만 머물다 가도록 허락받았죠.”

“그분들은 어디에 있나요?”

“매일 매일 죽음을 경험하고 있을 겁니다.”

이설아를 믿고 이야기하든, 그렇지 않든 어차피 똑같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녀는 진실을 말해 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설아도, 이서우도 더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설아야, 남자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 줘. 괜찮으면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고.

-응.

이서우는 퀘스트 냄새가 솔솔 나는 것을 느꼈다.

“저희가 블랙드래곤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데, 남자분들은 어디에 있나요? 저희가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싶어서요.”

“당신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소용이 없을 거예요. 남자들은 아주 악독한 악마 같은 놈들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괜찮아요. 제가 사랑하는 이 사람은 코코 어머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요.”

“정말? 정말 저 아저씨가 그렇게 강해?”

“그럼.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란다.”

울음을 그친 코코가 기대감을 잔뜩 담은 눈빛으로 이서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악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거대한 불덩어리도 쏘고, 사람의 마음도 조종하는 걸? 게다가 막 사라지기도 하고, 지진도 일으켜.”

“그건 이 아저씨도 할 수 있단다.”

“저, 정말이야?”

“그럼. 이 아저씨는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스스로를 아저씨라고 하는 게 좀 어색했지만 코코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이서우의 노력이 보람이 있었는지 코코가 호기심을 가지고 대화를 받아 주었다.

“그럼, 부탁이야. 우리 아빠를, 마을 아저씨들을 구해 줘.”

“저도 부탁드려요. 많은 걸 드릴 수는 없지만 도와만 주신다면 우리 마을의 보물을 드리겠어요.”

-그리움 마을의 남자들을 구하라.

그리움 마을은 아내들이 평생 남편을 기다리는 곳이다. 그들은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다.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집안을 깔끔하게 해 놓는 게 전부였다.

전투 능력은 있지만 블랙드래곤의 부하들의 한 수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블랙드래곤의 부하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남자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한다.

블랙드래곤의 부하들이 죽였다가 다시 살리기를 반복하며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을 여자들은 자신의 남편이 그런 인생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퀘스트 난이도 : B+++

완료 조건 : 그리움 마을 남편들을 구하라. 절반의 남편들을 구하면 성공. 마을 남자들을 많이 구할수록 좋다.

성공 시 보상 : 3레벨 경험치, 그리움 마을의 보물.

실패 시 : 5레벨 다운.

‘많이 구할수록 좋다라……. 경험치를 더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보물의 등급이 달라지는 건가. 하여튼 불친절할 때가 많다니까.’

이서우는 난이도에 비해 경험치 보상이 낮아 보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많은 남자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에 담아두고는 모녀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꼭 남편분들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위치를 가르쳐 주십시오.”

“저, 정말이신가요?”

“물론입니다. 반드시 남편분들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이서우는 일부러 좌우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창문 틈으로 바라보던 여자들은 의심과 경계의 눈빛을 지우고 희망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이서우는 남편들이 어디에 있는지 듣고 곧장 그곳을 벗어났다.

떠나기 전에 코코가 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서우는 돌아오면 그 대접을 받겠다고 했다.

코코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우와 이설아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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