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레벨이 갑이다
192화
“서우야, 설아야!”
“어, 언니, 무슨 일 있어?”
“일단 조용한 데로 가자.”
이서우와 이설아가 지내는 곳은 어디든 조용했지만, 감시 카메라의 눈을 피할 곳이 없었다.
있다면 이서우의 방과 이설아의 방, 단 두 곳뿐이었다.
이서우는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지난번에 서우 네가 그랬지. 네가 식물인간이 됐었던 거 조사 좀 해 달라고.”
“지나가면서 언급하기는 했지.”
이서우가 어나더 월드를 하면서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서우 스스로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지만 조금만 조사를 해 봐도 다 아는 사실이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글로벌사 측의 잘못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테스트에 참여했고, 잘못되어 식물인간이 된 것까지만 말했다.
글로벌사 측의 잘못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김소연에게 가볍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베타 테스터들이 겪은 부작용에 대해서 말이다.
시간이 조금 된 일이었는데, 김소연은 잊지 않고 있었나 보다.
지금에 와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지만 이왕 알아본 것이니 김소연이 어떤 정보를 가져왔는지 궁금했다.
“너처럼 식물인간이 되었던 사람이 또 있어.”
“뭐?”
이서우는 예상치 못한 말에 적잖게 놀랐다.
얼마나 놀랐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까.
“그게 한 명이 아냐. 내가 파악한 건 두 명인데, 더 있을 가능성도 있어.”
“그럴 수가. 분명 살아남은 건 나 혼자였는데.”
이서우는 혼란스러웠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한데, 어떻게 생존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게임에서 죽은 사람들은 분명 현실에서도 죽었고. 설마!’
뉴 월드에 몰입하느라 최근에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부를 축적하고, 모든 것을 가진 상태여서 안 좋았던 기억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 문제에 대한 생각을 하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이런 멍청한.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어?”
“누나 혹시 당시에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하던 사람이 한 그룹밖에 없었어?”
“그것까진 알아보지 못했어. 어나더 월드로 식물인간이 된 널 알아보다가 우연히 찾게 된 거야.”
“그랬구나.”
“왜? 설마 다른 그룹도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뉴월드를 하면서 봤잖아. 다양한 마을에서 시작하는 거. 클로즈 베타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어.”
“하지만 다른 그룹이 있었다면 그들을 모아야 할 텐데, 광고나 그런 건 없었잖아.”
김소연의 지적에 이서우도 자신의 추측이 틀렸나 싶어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쉽게 나왔다.
“굳이 알릴 필요는 없잖아.”
“비밀리에 그룹을 만들어서 테스트를 했다? 왜?”
“그거야 나도 알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김소연도 많은 정보를 얻은 것이 아니기에 그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서우의 말처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일단 더 알아보면 답은 나오겠지. 누난 그에 대해서 좀 알아봐 줘.”
“알았어. 그 부분도 자세히 파 봐야겠네.”
김소연의 새로운 먹거리가 생긴 것이 즐거운지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참, 누나, 나 말고 식물인간이 있다면서. 그 사람은 깨어났어?”
“아니. 아직 못 깨어난 것 같아.”
“누군지는 알아?”
“알긴 알지. 일단 내가 찾은 건 두 사람이야. 얼마나 더 있는지는 시간이 부족해서 못 찾아봤고. 여튼, 그 둘이 완전 극과 극이야.”
“극과 극?”
“응. 한 명은 재계 2위의 손자고, 다른 한 사람은 저소득층 가구에 있어.”
“생명 연장은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저소득층 가정은 글로벌사 측에서 확실히 도와주고 있더라. 모든 비용을 다 부담하고 있어서 크게 무리는 없는 것 같아.”
“그랬구나. 하긴, 내 경우도 치료비가 아니라 소송 때문에 힘들었던 거니까.”
이서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 때문에 힘들었을 부모님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오빠 덕분에 어머님, 아버님이 엄청 좋아하시잖아.”
이서우는 이설아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다른 소식은 없고?”
“응. 일단은 그 소식이 급할 것 같아서. 네가 말한 거 빨리 조사해 볼게.”
“누나 조사하면서 뉴 월드에 대해서도 좀 조사해 줘.”
“뉴 월드?”
“아무래도 대륙에 피바람이 불 것 같아. 블랙드래곤과 언데드와 관련 된 거라면 뭐든 좋아.”
“응. 팀원들에게 오더 내려놓을게.”
“고마워.”
“고맙긴.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더 부탁할 거 없으면 난 그만 가 볼게. 오늘 덕분에 또 새벽까지 달려야겠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아냐. 이런 건 오히려 날 더 즐겁게 만들어.”
“그러다가 종명이한테 차일지도 몰라.”
“종명 씨 그렇게 가벼운 사람 아니다.”
“어쭈구리. 이젠 아주 대놓고 편드네.”
“야, 원래 난 대놓고 편들었어.”
김소연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이설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호호호, 언니, 어디 가서 그러지마. 팔불출 같잖아.”
“사돈 남 말 하네. 넌 방송에서도 서우 편 들잖아. 수천만이 보는 데서도 대놓고 그러는데, 나랑 비교하다니.”
“윽. 역시 팩폭.”
“설아 넌, 아직 날 이기려면 멀었어. 그럼 난 간다.”
김소연은 조사할 정보가 있다는 게 즐거운지 얼른 사라졌다.
두 사람은 그런 김소연의 뒷모습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강호 군은 좀 어떻습니까?”
“그게 여전히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다.”
“가족들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을 계속 틀어주고 있나요?”
“네. 대표님이 말씀하신 그때부터 24시간 계속 틀어 주고 있습니다.”
“흠.”
안재훈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배강호를 바라보며 턱을 어루만졌다.
“윤슬아 양은 좀 어떤가요? 그녀도 역시 마찬가진가요?”
“네. 윤슬아뿐만 아니라 박찬아 또한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셋 중에 하나도 반응이 없다라……. 그럼 대체 서우 군은 어떻게 깨어난 거죠?”
“그게, 그를 직접 데려와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보장은 역시나 없고 말이죠.”
“……네.”
박사는 부끄러운지 살며시 고개를 떨구었다.
6년 가까이를 지켜보면서도 왜 깨어나지 않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한데, 우연히 한 명이 깨어났다.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본인이 테스트를 거절해서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체와 관련된 각종 영상이나 데이터들은 가지고 있었다.
한데, 그런 데이터를 볼 때마다 박사는 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박사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를 보면 정말 저들이 왜 안 깨어나는지 모를 정도니까요.”
“맞습니다. 오직 서우 군만 깨어난 것도 이상하고, 거기다 지금은 운동선수 못지않게 건강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직접 만나서 제안을 해 보고 싶은데, 이미 그는 너무 높은 곳으로 올라갔더군요.”
“저 같은 먹물도 서우 군의 영상을 꼬박꼬박 챙겨 보니 말 다했지요.”
박사도 뉴 월드를 플레이한다. 남들처럼 풀접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루에 몇 시간씩이라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방송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마침 이서우가 나오는 방송이 있어 유료 결제까지 해 가면서 찾아보았다.
“저처럼 바쁜 사람도 보고 있으니 박사님이 보는 게 이상할 일은 없겠지요.”
“허허, 대표님도 찾아보셨습니까?”
“그리됐네요.”
“중국과 인도 문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대단하십니다.”
“그의 미스터리를 풀어야 회장님께서도 마음이 편하실 테니까요.”
“그렇군요. 참, 회장님께서는 별다른 말씀 없으셨습니까?”
“아무래도 인내가 한계에 달하시는지 자꾸 서우 군을 직접 만나겠다고 하시더군요.”
“서우 군의 성격이라면 윽박지른다고 될 문제가 아닐 텐데 말이죠. 걱정이네요.”
“저도 걱정됩니다. 서우 군처럼 고집이 강한 스타일은 절대로 힘으로 누르려 해서는 안 되거든요.”
안 대표는 이서우에 대해 꽤 자세히 조사를 했다.
정오균 회장이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이니 자세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 정 회장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글로벌사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가 필요했으니까.
‘그때 정 회장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니었는데. 뭐, 지금에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은 없겠지만, 아쉽단 말이야.’
이미 벌어진 일이니 후회를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만 최근 들어 정회장에게서 계속 이서우와 만나게 해 달라는 압박이 들어오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손자 일이라면 뭐든 하시는 분이시니 그게 걱정이야. 괜히 적대시 하면 우리에게까지 불똥이 튈 거란 말이지.’
안재훈은 언젠가는 이서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뉴 월드에서 누구보다 강한 존재이기에 이제는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벤트를 하더라도 이서우의 존재가 중요했고, 각종 에피소드에서도 그의 존재는 필수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과 인도에서도 뉴 월드가 오픈했다는 것이다.
두 나라에서도 이서우의 팬들이 워낙 많아서 그가 뉴 월드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막대한 손해가 생길지도 몰랐다.
‘내가 먼저 한 번 만나 봐야 하나.’
안재훈은 어떤 식으로든 이서우를 만나야 할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박사님, 그럼 계속 잘 보살펴 주세요. 변화가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네, 대표님, 맡겨 주십시오.”
“항상 이렇게 고생시켜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박사에게는 안재훈의 인정認定이 그 어떤 칭찬보다 고마웠다.
안재훈은 박사와 악수를 나누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 * *
“민후야…….”
침대에 누워 있는 손자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정오균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아버지, 부르셨습니까.”
“그래, 왔느냐. 거기 앉거라.”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다.”
“경청하겠습니다.”
“넌 이번 일을 어찌해야 한다고 보느냐?”
“제 의견을 솔직히 말하길 바라시겠지요.”
“그래. 편하게 말해 보거라.”
“솔직히 말하면 전 안 대표의 의견이 맞다고 봅니다.”
“너도 그런 것이냐.”
“안 대표에게 듣기로는 그 서우라는 아이의 성격이 아주 강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스타일은 협박에 굴하지 않습니다. 그건 누구보다 아버지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나부터가 그러니까.”
“저나 민후도 마찬가지죠.”
강한 고집이 집안 내력인 듯 조부부터 다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그 아이의 고집이 강하다고 하지만 감히 내 이름 앞에서도 목을 뻣뻣이 들고 있을 수 있겠느냐.”
“도움을 받아야 할 아이를 찍어 누르기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민후를 깨울 수만 있다면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인내심이 바닥까지 내려갔어. 그 아이를 만나 봐야겠다.”
“아버지…….”
“아니다. 말 나온 김에 그 아이를 만나러 가자. K사에서 먹고 자고 한다고?”
“네.”
“내일 아침에 찾아갈 테니 준비해라.”
“……네.”
정오균이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피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아니라면 아닌 것이니까.
‘안 대표, 미안하네. 설득해 보려 했는데, 역부족이야.’
정준우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조금 더 들여서 천천히 일을 진행했으면 아들을 깨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내일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정준우는 한참이나 아들과 함께 있다가 그곳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