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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갑이다-217화 (217/341)

# 217

레벨이 갑이다

217화

연회장 문이 열리자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문밖으로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파티를 얼마나 많이 하면 이런 장치까지 되어 있지?’

문에서 느껴지는 마나에 이서우는 코웃음을 쳤다.

쿠아노 후작이 돌아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지웠다.

“약소하게 준비해서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먼.”

“그럭저럭 괜찮군.”

이서우에게는 화려함의 극치였지만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쿠아노 후작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음에는 더 신경을 써야겠군. 들어가지.”

쿠아노 후작의 뒤를 따라 정면에 보이는 화려한 황금 의자로 갔다.

‘게임은 판타지 풍인데, 연회장은 동양의 것과 유사하네.’

중앙에 황금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양옆으로 긴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고, 양 벽 쪽에는 노래를 하는 사람과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황금 카펫 위를 걸으면서도 이서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황제가 따로 없네. 황제께서는 이놈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아시려나.’

귀족의 파티 규모를 딱히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화려하게 한다고 해서 황제가 눈치를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쿠아노 후작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바는 이미 자신이 황제가 된 듯한 것이어서 이서우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황제에게 자신의 거만한 태도가 전달될까 봐 조심했지만 아무리 쿠아노 후작이라도 이서우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중앙에 있는 황금 의자에 앉은 쿠아노 후작이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지.”

이서우는 대답하지 않고 차분히 의자에 앉았다.

지금 두 사람은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손님에게 자리를 권하고 앉는다.

더군다나 이서우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 수호기사의 신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예의상 이서우에게 먼저 자리를 권해야 하는 것이 맞다.

공작이라고 해도 황제가 선택한 수호기사에게 예를 갖춰야 한다.

한데, 쿠아노 후작은 자신이 먼저 앉고 이서우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것은 조금 과장해서 해석하면 ‘난 너의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알기에 이서우도 고개를 살짝 숙이는 등의 예를 표하지 않고 마치 내 집처럼 무덤덤하게 앉아 버린 것이다.

‘어쭈, 그렇게 나오겠다?’

쿠아노 후작은 이서우의 행동에 자극을 받았다.

기회주의자처럼 황제의 눈에 들어 지금의 지위에 오른 것이 못마땅했다.

‘수호기사의 위치에서 반드시 내려오도록 만들어 주마.’

쿠아노 후작은 분노로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지금 당장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기회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일 때다.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별 탈 없이 눈에 거슬리는 이서우를 찍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쿠아노 후작은 이서우가 하이 레벨 경지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주 열 받아 죽겠나 보네. 아주 화병이 생기도록 흔들어 줘야겠는데?’

이서우는 내색하지 않은 채 마치 악기와 노래 소리에 감동한 사람처럼 주변을 스윽 훑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쿠아노 후작이 손짓을 하자 쿠아노 후작과 이서우의 앞에 금빛의 테이블이 놓였다.

그리고 각종 음식들도 금쟁반, 은쟁반에 담겨 테이블을 채웠다.

“자주 볼 수 없는 특별한 음식들을 준비했으니 많이 들게.”

“드래곤 와인은 안 보이는군.”

쿠아노 후작은 이서우에게 대놓고 이런 음식도 먹어 본 적 없는 촌놈이라는 뜻을 담아 말했지만, 이서우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크리스털 잔에 담긴 와인 향을 맡더니 실망감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이서우의 말에 쿠아노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명 드래곤 와인이라 불리는 술은 엘프주보다 오히려 더 좋다고 평가되었는데, 드래곤 뼈의 가루와 피를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드래곤 와인은 황제만 마실 수 있는 것으로 특별한 공을 세운 사람이 아닌 이상은 맛볼 수 없었다.

쿠아노 후작도 수십 년을 대귀족으로 지내 오면서 구경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진귀한 술이었다.

이서우의 자존심을 긁으려다가 오히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쿠아노 후작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네. 드래곤 와인은 숙성기간이 필요해서 아직은 공개할 수가 없다네. 다음에 내가 직접 대접하겠네.”

“그런가?”

“그렇다네.”

“한데, 이상하군. 황제폐하께서는 나에게 처음으로 드래곤 와인을 주는 거라 했는데 말이야.”

“…….”

이서우의 강펀치에 쿠아노 후작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험, 험. 황제폐하께서 워낙 오래전에 선물로 주신 것이라 기억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네.”

“지금 황제폐하가 치매라도 걸렸다는 말인가!”

“그, 그게 아니라 워낙 제국의 안위가 벼랑 끝에 있으니 그런 자잘한 것까지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는 것이네.”

쿠아노 후작은 얼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칫 잘못하면 황제가 그런 것도 기억 못 하는 치매 환자로 전락할 수 있었다.

만약 쿠아노 후작이 황제를 그런 식으로 평가했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반역죄로 다스려질 수 있기에 이번만큼은 쿠아노 후작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황제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군. 그러게 사람을 보고 덤벼야지. 쯧쯧쯧.’

이서우는 승리의 미소를, 쿠아노 후작은 분노를 얼굴에 담았다.

하지만 이내 쿠아노 후작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됐군. 드래곤 주가 숙성되지 못해 아쉬웠는데, 자네가 가지고 있다니 말일세. 이렇게 연회까지 베풀었는데, 좋은 술이 빠질 수야 있나. 내가 준비한 것은 자네 말처럼 드래곤 와인보다 급이 떨어지니 자네가 대신 이 자리를 빛내 주게.”

“쿠아노 후작, 요즘 많이 힘든 것 같은데, 치료사에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인가!”

쿠아노 후작은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대귀족인 자신에게 치매가 걸렸다니!

하지만 이서우는 태연했다.

“방금 본인이 오래전에 받은 드래곤주를 숙성시키고 있다고 했는데, 최근에 구한 나에게 내놓으라고 하니 하는 말이지.”

“…….”

또 한 번 쿠아노 후작의 입이 닫혔다.

표정은 그야말로 못 먹을 음식을 먹은 사람처럼 심하게 일그러졌다.

쿠아노 후작은 드래곤 와인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다가는 계속 코너에 몰릴 것이라는 생각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거, 어쩔 수 없구먼. 그럼 술은 그렇다 치고, 음식이나 많이 먹게나.”

“내 입맛에 맞는 게 없어서 그다지 손이 안 가.”

“그렇군. 그럼 노래나 즐기게.”

“노래도 내 취향이 아냐.”

틱틱거리는 이서우를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화가 더 날 것 같아 시선을 돌려 버렸다.

‘특별히 진귀한 것들로 준비했거늘 손도 안 대는군. 설마 알아차린 건가? 아냐, 그럴 리는 없어. 하나면 돼. 제발 하나만 먹어라, 하나만.’

쿠아노 후작의 간절한 바람은 시간이 지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무덤덤하게 있던 이서우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보다 모험가 길드와 교류를 하고 있다고?”

“그게 어쨌다는 거지?”

“어떤 곳이기에 당신이 그렇게 나서서 운영권을 유지해 주려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나마 부드럽던 쿠아노 후작의 말투가 변했다.

이서우는 어차피 쿠아노 후작과 대화가 통할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철저히 그를 화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귀족은 나이가 아니라 작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10살이 적든, 20살이 적든 작위가 낮은 귀족이 높은 귀족에게 굽실거릴 수밖에 없다.

물론 공작이라고 해도 후작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카이젠 제국의 경우는 작위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 작위가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서우의 행동은 사실 무례한 것이 아니었다.

대귀족 사이에서도 작위에 따라 지금처럼 서열이 정해져 대화가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서우가 아니라 쿠아노 후작이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황제 외에는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서우에게 막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위가 없어 하극상까지는 아니지만 황제가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만큼 심각한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쿠아노 후작이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그만큼 이서우의 행동이 그를 자극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항상 과한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지금 황제폐하께서 임명한 수호기사에게 살기를 드러내는 거 맞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살기를 전혀 드러낸 적이 없음에도 이서우의 표정은 무섭게 변했다.

이런 억지식의 우기기는 쿠아노 후작이 평소 자주 쓰는 방법이었는데, 막상 당하고 보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여기서 대처를 잘못한다면 쿠아노 후작은 졸지에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이 되고 만다.

‘제길. 이놈이 아주 작정을 하고 이곳에 왔구나. 날 화나게 해서 찍어 누를 생각인가? 이유가 뭐지? 설마 돈?’

쿠아노 후작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이서우가 대체 왜 이런 억지를 부리는지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이서우의 화부터 가라앉히고 대화를 풀어 가야 뒤탈이 없었다.

“미안하게 됐네.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말이 심하게 나갔네. 자네나 나나 모두 황제폐하를 섬기는 사람들이잖나.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과해서 나온 실수니 너그럽게 넘어가 주게.”

“뭐, 그러지.”

쿠아노의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온 이서우다.

그를 자극해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지만 막다른 길까지는 몰아붙이지 않았다.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니 일단은 이 정도 수준을 유지하자.’

쿠아노 후작은 자신이 실수하지 않았다고 여기지만 흥분하고, 분노할 때마다 빈틈이 보였다.

하이 레벨에 오를 수 있는 육체의 한계까지 발전시켰고, 통찰력까지 갖추고 있어 그 틈을 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연회가 1시간 이상 진행되자 지루했다. 이서우의 상태를 수시로 파악하던 쿠아노 후작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황제폐하께서 진귀한 것들을 많이 베푸셨나보군. 아니면 입맛이 없던가.”

“뭐, 둘 다라고 해두지.”

“그렇군. 그럼 지루한 사람을 붙들어 둔 거군.”

“그렇지 않아도 전투를 좋아하는 내가 이렇게 실내에만 있으니 답답해서 기사들이나 소개시켜 달라고 하려던 참인데 말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기사들은 자신들의 훈련을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네.”

“다들 수준이 낮은가 봐?”

“험, 험. 자네를 기준으로 하면야 만족스럽지 못하겠지만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기사들도 꽤 있네.”

“그렇다면 봐도 아무 상관없잖아. 안 그래?”

이서우의 말에는 모두 내 아래인데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이놈이 오늘 날 아주 골탕 먹이러 온 건가. 사사건건 시비네.’

시비의 정도가 과하지 않아 쿠아노도 심하게 따질 수가 없었다.

모험가들의 기준으로 보면 사실 지금 이서우가 하는 말들이 반복되면 기분이 나쁠 수가 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은근히 자신보다 작위가 낮은 귀족들에게 과시하는 경향이 있다.

워낙 만연하다 보니 지금은 그러려니 하게 되었고, 하급 귀족들도 잘 보이기 위해 웃음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쿠아노 후작은 지금까지 자신보다 힘이 약한 귀족들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한데,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무시를 당하면 참지 못한다.

민주주의사회에서라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싸울 수 있는 일이지만, 계급사회에서는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자칫 화를 표출했다가 목이 달아날 수 있었다.

특히나 상대의 위치가 더 높을 경우에는 후폭풍이 너무 커서 섣불리 행동하다가는 대대로 이룬 공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물론 수호기사라는 작위는 없기 때문에 황제에게 따져 볼 수는 있다.

자꾸 이서우가 제국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행동을 한다며 앓는 소리를 하면 통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분명 황제가 보냈겠지. 설마 내가 카이젠을 삼키려 한다는 걸 알아차린 건가. 아냐, 만약 물증이 확실다면 괜히 이놈을 보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는 것은 의심을 하고 있다는 건데…….’

쿠아노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서우가 이곳에 왜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수십 년 동안 전장을 누비며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멍청한 놈, 네가 이곳에 찾아온 덕분에 난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어. 덕분에 거사는 성공할 수 있겠어. 고맙다고 해야 하나.’

쿠아노 후작의 표정은 약간 어두웠지만 속마음은 그 어느 때 보다 밝았다.

“일단 기사단장에게 진행 중인 훈련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해야 되니 잠시만 기다려 주게.”

“뭐, 그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고맙네. 그럼 잠시 실례하겠네.”

“편하실 대로.”

쿠아노 후작은 차분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또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모르지만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이서우는 쿠아노 후작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쿠아노 후작의 1보 후퇴로 미묘한 신경전은 끝난 것 같았지만 아직 두 사람의 치밀한 두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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