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레벨이 갑이다
229화
“어서 오게. 이렇게 급히 불러서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열일을 제쳐 두고 와야지요.”
“자네의 그 말이 오늘따라 더욱 든든하구먼.”
수심이 가득하던 조세프 백작의 얼굴이 약간이지만 밝아졌다.
“한데,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혹시 최근 3주 동안 언데드 동향을 파악한 게 있는가?”
“휴식기에 들어간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네. 난 그게 지난번 자네가 언데드 사령관을 처치한 효과라고 생각했네. 한데, 그게 아니었다네!”
“숨은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있네. 아주 지독한 이유가.”
이서우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령관의 죽음으로 리치 킹이 재정비에 들어갔다고 판단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니.
전쟁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게 바로 정보다.
잘못된 정보를 옳다고 믿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요?”
“놀라지 말게. 놈들이 엘사둔을 휘젓고 있다네.”
“네? 엘사둔을요?”
이서우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에 적잖게 놀랐다.
황궁을 또다시 직접 공략했든지 아니면 다른 대귀족들을 언데드화시킨 게 아닐까 했는데, 엘사둔이라니.
“우리도 많이 당황했다네. 엘사둔과 전쟁이 있던 터라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는데도 뒤늦게야 알게 되었네. 황제폐하를 다시 노린다거나 대귀족들을 언데드화시키면 낭패여서 거기에 더 집중한다고 몰랐던 거지.”
“그랬군요. 한데, 놈들이 엘사둔을 어떻게 한 건가요?”
“황제가 장악당했네.”
“네? 황제가요?”
“그렇다네. 리치 킹의 만행을 알리고 손을 잡기 위해 특사를 보냈다가 알게 되었네.”
“그러면 대귀족들은 대부분 놈에게 넘어갔다고 봐야겠군요.”
“아마 그럴 것이네.”
“반다이젠 후작은 어떻습니까? 그자야 말로 요주의 인물이잖습니까.”
“그건 아직 확인되지 않았네. 하지만 타이탄이 사라졌다는 정보는 입수했네.”
“그러면 그자는 아직 언데드화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으니 위기를 피했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
이서우는 부하를 미끼로 던지고 도주하던 반다이젠 후작을 떠올렸다. 그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몸을 피했을 거라 여겼는데, 그의 예상이 맞았다.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아니네. 타이탄마저 리치 킹에게 넘어 갔다면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워졌을 거야.’
리치 킹의 수법이 갈수록 교묘해지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이서우는 혼자고, 리치 킹은 수많은 언데드를 거느리고 있었다.
“블랙드래곤의 동향은 파악이 되었나요?”
“아닐세.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블랙드래곤은 조용해. 그래서 사실 더 불안하다네.”
“리치 킹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당했을 때 블랙드래곤이 나타나면 큰 낭패겠네요.”
“그게 가장 걱정이지. 하지만 그걸 리치 킹도 잘 알 테니 아마 놈이 직접 나서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엘사둔을 점령하고 그들을 이용하려 한 것일지도 모르지.”
“설마, 리치 킹은 뒤에 있고, 그들을 이용해 전면전을 펼칠 거라고 예상하시는 겁니까?”
“황제폐하를 따르는 귀족들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다네. 엘사둔의 전력만으로도 카이젠을 약화시킬 수 있으니까 말일세.”
“약해진 카이젠을 리치 킹은 손쉽게 집어삼키려 하겠군요.”
“그렇지. 죽기 살기로 총공격을 감행한다면 카이젠의 전력도 많이 약해지겠지. 그때 리치 킹은 적은 병력으로 우릴 삼키려 할 거야.”
“그래야 블랙드래곤이 나타나도 상대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네.”
조세프 백작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리치 킹에게 정신을 지배당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 것이다.
그런 엘사둔을 상대로 아무리 전력이 강한 카이젠이라도 버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물론 이서우가 나서면 방어는 가능하겠지만 블랙드래곤이 문제였다.
어찌 되었든 카이젠으로서는 상당히 안 좋은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해골바가지를 뒤집어쓴 놈이 머리 하나는 기똥차게 쓰네. 과거에 대륙을 주름잡았다고 하더니 확실히 대가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뉴 월드에서 육체의 변화가 진행되고, 그것이 현실에도 그대로 지속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테스트를 한 며칠 사이에 이서우는 영약을 180개나 만들었다.
그중 150개를 복용해 근력, 민첩력, 체력이 각각 50씩 상승했다.
오직 제조에만 집중해서 가능한 것이지만 전투를 병행해도 치열하지만 않으면 하루 15~30개씩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면 이서우는 빠르게 순수 스텟이 늘어 4차 전직을 하지 않고도 강력한 힘을 뽑아낼 수 있다.
물론 다른 유저들과는 달리 펠렌의 후예여서 4차 전직의 변화는 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지만, 스텟의 변화로도 큰 폭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이서우는 리치 킹을 상대로 큰 피해 없이 이길 수 있다.
문제는 역시 블랙드래곤이다.
‘뭔 짓을 하는지 알 수만 있어도 대비를 하는데, 이놈은 한 번 나타나고 아예 보이지를 않네.’
보이지 않는 적이 보이는 적보다 항상 위험한 법이다.
“대비책은 있나요?”
“그게 쉽지 않네.”
“쿠아노 후작 때문이겠군요.”
“맞네. 자네가 그에게 다녀간 뒤로는 조용히 지내는 것 같은데, 엘사둔이 저모양이 되었으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다네.”
“엘사둔과 전쟁이 터지면 그자와 그자를 따르는 무리는 숨어 있다가 카이젠이 약해지는 틈을 타 장악하려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리치 킹과 거래를 하려 하겠지. 리치 킹도 블랙드래곤을 상대해야 하니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자를 이곳에 두는 게 나을 테고.”
쿠아노 후작의 성격을 잘 아는 조세프 백작이기에 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도 대충 예상이 되었다.
“카이젠 제국을 통치하고 싶은 욕망이 그렇게나 크다는 뜻입니까?”
“쿠아노 후작은 한 번 욕심을 낸 것은 어떻게든 가지고 마는 성격이네. 카이젠 제국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마음을 먹었다면 리치 킹의 노예가 된다고 해도 실행에 옮길 것이네.”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자군요.”
“권력을 향한 욕망은 그런 것일세.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지.”
이서우는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유를 잃은 채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면 결국 다시 모험가들을 참여시켜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래 봐야 결과는 똑같을 것이네. 엘사둔도 모험가를 참여시킬 테니까.”
“…….”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리치 킹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황제폐하께서 하이 레벨 지역으로 피하는 것일세.”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일세. 물론 황제폐하께서는 절대로 황궁을 비우지 않으려 할 것이네. 하지만 나와 자크 후작 등 폐하를 따르는 귀족들이 매달리면 어쩔 수 없겠지.”
“생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네요.”
“나야말로 정말 꿈에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림이라네. 하지만 엘사둔이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전부 몰려오면 어쩔 수가 없다네.”
모든 전력을 끌어오는 엘사둔을 막기 위해 카이젠도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만큼 두 세력의 힘은 막상막하였다.
하지만 쿠아노 후작을 비롯해 꽤 많은 귀족들이 이미 황제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에 엘사둔을 막을 병력이 없었다.
모험가를 투입하자니 엘사둔도 같은 대응을 할 테니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카이젠에 이서우와 같은 강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이서우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백작님,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뭔가 좋은 방법이 있는 건가?”
“한 가지 방법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뭔가?”
“그게…….”
이서우의 말이 이어졌고, 조세프 백작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서우의 이야기가 끝나자 퀘스트 알람이 울렸다.
A급 퀘스트로 5레벨이나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조세프 백작과 대화를 마친 이서우와 이설아는 백작성을 빠져나왔다.
“오빠, 정말 가능할까?”
“안 될 것 같아?”
“오빠에게 그렇게 적대감이 큰데, 칼부림부터 나지 않을까 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녀석도 엘사둔을 되찾고 싶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지 않았겠지. 그 점을 이용하면 그자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어. 문제는 그자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야.”
“엘사둔에 있지 않을까?”
“대귀족들이 대부분 언데드화가 되었다면 다른 곳으로 피했을지도 몰라.”
“하긴, 타이탄까지 가지고 있으니 어디든 갈 수 있겠네.”
“그렇지. 부하까지 미끼로 쓰면서 도망칠 정도니 무슨 짓이든 할 거야.”
이서우가 떠올린 방법은 바로 반다이젠 후작을 찾아 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이서우가 타이탄 제작자를 처치할 때 반다이젠 후작이 추가로 타이탄을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보유한 타이탄도 있으니 그 정도 전력이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서우의 말처럼 문제는 그가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근데 오빠, 언제 엘사둔이 전력을 다해 쳐들어올지 모르잖아. 그 안에 찾을 수 있을까.”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언데드 사령관이 나에 대한 정보를 넘긴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엘사둔을 얻었으니 무시하고 쳐들어올지도 모르잖아.”
“조세프 백작님에게는 모험가들이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아.”
“그렇지 않다고? 아!”
“맞아. 카이젠은 하이 레벨 지역이 있거든. 리치 킹도 분명 그걸 알 거야. 그러니 모험가들의 수준 차이가 난다는 것도 알겠지. 엘사둔에 모험가들이 많이 빠져나가 하이 레벨 지역으로 온 것도 알 테고.”
이서우가 이런 점을 백작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모험가들을 믿고 안일한 대처를 하게 될 것을 염려해서다.
모험가들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이기에 대가가 없으면 나서지를 않는다.
아무리 퀘스트가 좋아도 정작 강자들은 밀대를 받으며 열심히 레벨 업을 할 테니 전쟁이 터져도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하이 레벨 도시 운영권을 잃으면서 이서우에게 적대감을 가진 유저들은 오히려 박수를 치며 전쟁을 구경만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복잡한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아예 유저들에 대한 것은 배제시켜 버렸다.
“설마 하이 레벨 지역에까지 전쟁의 여파가 미치는 건 아니겠지?”
“황제가 하이레벨 지역으로 온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져.”
“상황이 복잡해질까? 아니면 당분간 평화가 찾아올까?”
“그게 애매해. 현재로서는 하이 레벨 지역에서 종속자들 정도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하이 레벨 지역으로 황궁을 옮기게 되면 결국 관리자나 통치자의 영역까지 확장을 할 수밖에 없어. 그때는 또 전쟁이 벌어지는 거지.”
“자칫 일이 꼬이면 끊임없이 전쟁이 터지겠네.”
“그래서 반다이젠 후작을 찾는 게 중요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할 줄 알았는데, 현실이 되다니.”
“영화 같으면서도 현실 같은 상황이 자주 등장하니까 뉴월드가 정말 재밌는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 어차피 이곳에서 우리는 죽을 일이 없으니까.”
이서우의 말처럼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을 직접 경험할 수 있으니 사람들은 더욱 뉴 월드에 열광했다.
수십, 수백만의 군대가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현장은 영화 말고는 볼 수가 없다.
가상현실이 보편화되면서 구경만 하는 시대는 갔다. 이제는 직접 체험을 할 수 있는 시대였고, 뉴 월드는 그것을 만족시켜 주는 게임이었다.
‘반다이젠 후작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나저나 란셀 님도 얼른 찾아야 하는데, 리치 킹 녀석이 엘사둔에 있으니 당장 찾기도 어렵고. 조금만 버티세요. 제가 꼭 찾으러 갈 테니.’
란셀과 이서우의 관계를 리치 킹도 분명히 알 테니 그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인물인 만큼 그의 곁에 두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서우는 란셀에 대한 것은 잠시 접어 두고, 당장 직면한 위험에 집중했다.
이서우와 이설아는 은밀히 엘사둔으로 숨어들었다.
엘사둔을 벗어났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어디로 갔을지 추측하려면 반다이젠 후작이 머물던 곳으로 가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이서우는 전력을 다해 달렸고, 이설아는 백호의 등을 의지했다.
* * *
쾅!
“뭣이! 그게 정말이더냐!”
“네, 후작님, 엘사둔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어찌 그런. 반다이젠 후작은 대체 뭘 했기에 타이탄을 가지고서도 그를 막지 못했다는 말이냐.”
“그건 저도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흔적도 전혀 찾지 못했고?”
“네. 아무리 찾아봐도 반다이젠 후작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엘사둔을 다시 수복할 마음이 있었다면 분명 외곽 지역부터 하나씩 점령을 하든지, 황궁으로 바로 쳐들어갔을 텐데 말입니다.”
“흐음, 반다이젠 후작의 성격이라면 분명 그리했겠지. 그렇다는 것은 공격을 못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다는 뜻이겠지?”
“저도 그런 결론을 내리고 서둘러 돌아온 것입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거들먹거리더니 이제는 별게 다 말썽이네. 그래서 리치 킹은 지금 뭐 하고 있느냐?”
“그게, 황궁에 있다는 소문만 들어서 정확히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멍청한 놈, 고작 알아온 게 엘사둔이 리치 킹에게 먹혔고, 반다이젠 후작이 자취를 감췄다는 것밖에 없더냐!”
쿠아노 후작은 괜히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괴롭히며 화를 냈다.
사실 토첸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 정보도 꽤 큰 위험을 감수하고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고는 인정해 주지 않고 호통만 치니 토첸으로서도 서운했다.
이럴 때는 그저 조용히 있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아는 토첸은 조용히 고개만 숙인 채 기다렸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혹시 모를 전쟁에 대비해 언제든 후퇴할 준비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후일을 도모하자?”
“네. 엉망이 되어 버린 카이젠을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럼 일단 일부만 남겨 두고 병사들을 모두 아고나 산맥 남쪽에 있는 은신처로 데려가라.”
“네, 후작 각하.”
“다른 귀족에게 알리는 것도 잊지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다. 철저히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가 봐라.”
“네, 후작 각하.”
토첸에게 멍청하다고 야단을 쳤지만 화가 나서 그런 것뿐이지 실제로 그는 상당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까다로운 쿠아노 후작이 그의 조언을 들었을까.
토첸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는 후작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일보 전진을 위한 이 보 후퇴일 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카이젠 제국은 내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쿠아노 후작은 결의의 찬 표정으로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