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레벨이 갑이다
250화
“문태식은 일단 서우 씨보다 먼저 정신을 차렸습니다. 한데, 실성한 사람처럼 이상한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실성한 사람 같다뇨?”
“자꾸만 신의 주먹을 보았다면서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혹시 문태식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단지 제가 마지막 순간에 문태식으로 하여금 방심을 유도한 뒤 모든 힘을 쏟아부어 그의 심장을 쳤을 뿐이에요.”
“단지 주먹으로 치기만 했다는 건가요?”
“네.”
“그의 심장이 멈췄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죠?”
“네.”
“주먹으로 심장이 멈췄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못했어요. 전설적인 복서가 그런 일을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일반인이 그랬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에요.”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김명국으로서도 그에 대해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건장한 성인의 심장을 주먹 하나로 멈추게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게 궁금해서 오신 건가요?”
“아, 그건 아니고요. 문태식의 기억을 읽어 고장수의 위치를 알아냈고, 그 자까지 잡아들였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 온 거예요.”
“제가 의식을 못 차린 게 겨우 3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빨리 체포한 거예요?”
“인터폴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순수하게 우리 힘으로 잡은 거죠.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 잡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이게 다 서우 씨 덕분입니다.”
“잡혔다니 다행이네요. 한데, 그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식물인간들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자이니 아들을 그곳으로 보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랬군요.”
과학수사가 워낙 많은 진보를 이뤄서 요즘은 뇌를 바로 스캔해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대화를 하거나 텍스트 문서처럼 읽어 들이는 것은 아니다.
사과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람마다 떠올리는 게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홍사과나 풋사과, 혹은 초록 사과를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과수원을 떠올릴 수도 있다.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과가 싫을 수 있고,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뇌를 스캔하는 기기는 이런 생각들을 그림으로 보여 준다.
뇌의 여러 부분에서 벌어지는 일을 종합해 그림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문태식에게 고장수를 말하니 그림이 떴고, 그게 바로 고장수가 있는 장소였다.
전 세계 모든 지역이 사진과 영상으로 저장이 되어 있어 대조해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이서우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고장수는 갑자기 들이닥친 특수수사대 요원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런 성과로 김명국은 별장 난동 사건(?)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처음 별장에 스왓 팀을 투입했을 때, 조찬휘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이번 일을 지휘한 사람을 잘라 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김명국이 고장수를 잡아들이자 고위층의 불만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 서우 씨와 설아 씨를 위협하는 건 모두 사라졌습니다. 문태식이 손을 써서 서우 씨에게 미끼를 던진 자를 알아보니 홍영철이더군요. 그리고…….”
“홍영철이 동문 중 누군가를 끌어들였군요.”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홍영철이 개입했다면 동문회를 열라고 협박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게, 단순히 협박을 당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돈을 받고 적극적으로 나섰더군요.”
“누구죠?”
“추광훈과 황재규입니다. 그리고 배진성이라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개입을 한 것 같습니다.”
“배진성도 개입을 했다고요?”
“아, 주도적으로 움직인 건 황재규입니다. 황재규가 배진성과 접촉을 해서 도움을 얻었고요.”
“그렇군요.”
이서우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누군가 자신을 동문회로 끌어들일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게 바로 배진성일 줄이야.
“가만, 배진성은 그렇다 치고, 추광훈과 황재규라면 저한테 접근했던 인물이네요.”
“서우 씨에게요?”
“네. 별장을 지을 생각이 없냐면서 접근했는데, 절 관찰하기 위해서였나 보군요.”
“그런 것 같네요. 한데, 그자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는지 해외로 도피했습니다.”
“앞으로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네요.”
“네. 빚에 허덕이고 있어 빚쟁이들을 피하기도 바쁜 자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재규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빚쟁이에게 쫓기는 사람이 경호를 뚫고 들어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진성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저기, 서우 씨?”
“네?”
배진성에 대해 고민하던 이서우는 살짝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김명국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을 조사하던 중 서우 씨가 얼마 전 습격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 네. 한데, 왜 그러시죠?”
“서우 씨가 깨어나지 않아 제가 조금 조사를 해 봤습니다.”
“그런데요?”
“청부살인이더군요.”
“네. 저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어요. 한데, 왜 그러시죠?”
박기준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정확한 내막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했다.
김명국의 힘을 빌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공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빠, 아무래도 김 과장님의 힘을 빌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내가 말씀드린 거야.”
“잘하신 겁니다. 저희 데이터베이스에는 정말 막대한 정보가 있거든요.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최고죠.”
“그렇긴 한데, 국민의 세금으로 일을 하시는 건데, 함부로 혈세를 막 써도 되나요?”
“서우 씨도 국민의 한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오랜 시간 잡아들이지 못한 고장수를 잡을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기도 하고요. 고장수가 잡히면서 장수파의 조직원들을 속속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뭐, 듣고 보니 김 과장님의 말씀도 맞는 것 같네요.”
이서우도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말이 설득력 있었다.
그냥 혜택만 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고장수를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며칠 시간을 할애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번 일로 이서우는 특수수사대의 힘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청부살인을 전문으로 하는 자라면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 김명국의 도움을 받는 게 여러 모로 나았다.
“참, 전해 듣기로는 뉴월드의 배상철과 장길수라는 자가 이번 일을 의뢰했다고요?”
“네. 배상철은 그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장길수가 모든 일을 진행했다고 하더군요.”
“네. 저도 그 말을 듣고 장길수에 대해 알아봤는데, 참 묘한 인물이더군요.”
“묘한 인물이라뇨?”
“아주 평범한 사람입니다. 현실에서는 말이죠.”
“뉴 월드에서 랭킹 1위 길드의 부길마까지 할 정도인데, 현실에서 평범하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네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범죄자들이 뉴 월드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특수수사대도 뉴 월드에 관심이 많습니다. 한데, 상위 랭커들은 전부 현실에서 한자리씩 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모습을 가장한 거군요.”
“네. 어쩌면 그자가 청부살인자일지도 모릅니다.”
“그자가요?”
“네.”
이서우는 김명국의 새로운 시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주변을 철저히 속일 수 있는 사람이면 의문의 청부살인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직은 정확하게 파악된 것이 없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그자에 대한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을 테니 며칠 푹 쉬세요.”
“네.”
몸은 벌써 멀쩡했지만 이서우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김명국이 나가자 이번에는 김소연과 박 대표, 이설아가 대화에 참여했다.
“오빠, 아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우린 뉴 월드에서 그자의 행동을 주시하면 될 것 같아.”
“그래야지. 이번 일 처리를 보니 김 과장님에게 맡겨도 될 것 같아.”
“우리 오빠가 좀 차갑게 보여도 일처리는 잘해. 믿어도 될 거야.”
“근데, 민수랑 종명이는 정말 괜찮아?”
“응. 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몰라. 거기서 쫓겨나서인지 오히려 너에게 빨리 별장을 지으라고 닦달할 거라던데?”
“민수가 그랬지?”
“응.”
“그놈답네.”
이서우는 두 친구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 벌어진 일을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두 친구와 있으면 항상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가 별장 지어 주기로 했다고 그러던데?”
“그러기는 했지. 아주 큰 수영장이 딸린 곳으로 짓겠다고 했어.”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남자니 조만간 착수하겠네.”
“그렇지 않아도 주 변호사님에게 연락 한번 해 보려고. 골치 아픈 일들도 해결됐으니 며칠 좀 쉬어야지.”
“생각 잘했어, 오빠. 방송 분량은 이미 다 뽑아 놨으니까 2주 정도는 쉬어도 돼.”
“역시 우리 설아밖에 없네.”
2주 동안 쉴 생각은 없었지만 2~3일 정도는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단 며칠 쉬는 걸로 하는데, 그 전에 뉴 월드에 잠시 접속을 좀 해야 돼.”
“바로 접속하게?”
“확인할 게 있거든.”
이설아를 비롯해 김소연과 박 대표도 그를 만류할 수 없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다는 말에 강한 의지가 느껴져서 말릴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이서우는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지체하지 않고 뉴 월드에 접속했다.
8시간을 채울 생각으로 제조를 걸어 두고 하이 레벨 지역의 빌딩들을 쭉 돌아보았다.
각 도시의 빌딩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카이젠 제국도 안정권에 들었고, 반다이젠 후작이 엘사둔 제국을 손에 쥐었다.
반다이젠 후작은 즉각적으로 엄청난 보상금을 카이젠 제국에 보냈다.
수년, 아니 10년 이상을 회복에 쏟아부어야 해서 반다이젠 후작의 머릿속에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무슨 짓을 해도 카이젠 제국을 넘볼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덕분에 카이젠 제국은 편안하게 하이 레벨 지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서우가 언데드들을 상대하는 사이 하이 레벨 지역은 4개의 도시가 더 생겼다.
도시가 생길 때마다 빌딩을 지으라고 명령을 해 뒀기에 도시 중심부터 거대한 빌딩이 착착 들어섰다.
이서우는 뿌듯한 마음을 안고 빌딩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독려했다.
8시간이 지나고, 제조가 완성되는 것을 확인한 이서우는 칼같이 접속을 종료했다.
‘과연 될까?’
이서우과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 그것은 바로 문태식의 심장을 멈췄던 그 일격과 관련이 있었다.
이서우는 차분히 몸을 풀었다.
* * *
“마스터, 그놈이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현실에서 암살을 당할 뻔했으니 총력을 기울여 날 찾으려 했겠지.”
“그놈이 뭔 짓을 하건 큰 문제는 안 되는데, 특수수사대까지 나선 마당입니다.”
“알아. 내 정보를 캐는 걸 잡아 냈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뭐 어쩔 수 없잖아. 모든 걸 삭제하고 사라져.”
“하지만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은…….”
“멍청한 놈. 김명국 과장을 얕보지 마라. 그자는 집요하고, 끈질겨. 더군다나 그놈 때문에 눈엣가시 같던 고장수를 잡았어. 은혜를 외면하지 않는 성격의 김명국이라면 미친 듯이 날 잡기 위해 덤벼들 거야. 당분간은 잠수를 타는 게 좋아.”
“배상철이 마스터를 찾을 텐데요?”
“뭐, 상관없겠지. 그놈은 어차피 내가 바보천치인 줄 알 테니까. 이용하기 좋아서 앉혀 놓은 자리니 사라져도 찾지도 않을 거야.”
“마스터를 그리 취급했는데, 그냥 사라지는 겁니까?”
“괜히 꼬리 잡힐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네, 마스터. 모든 것은 마스터의 뜻대로.”
사내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장길수였다.
그의 입가에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