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
레벨이 갑이다
261화
“하, 이것 참.”
이서우를 비롯해 방 안에 있던 일행들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초대박과 노가다 때문이었다.
이서우는 일찍 와서 박 대표와 대화를 하면서 이들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의견을 나누었다.
한데, 이런 그림은 그들의 예상에 없었다.
김소연도, 이설아도, 가장 연륜이 많은 박 대표도 설마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서우는 다시 한숨을 크게 쉬더니 말했다.
“일단 일어나세요. 이야기나 해 봅시다.”
그래도 꿈쩍하지 않자 이서우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강력한 어조로 통보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대화는 없을 겁니다!”
벌떡!
이서우의 최후 통첩과도 같은 말에 두 사람은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재빨리 반응했다.
“일단 여기 앉으세요.”
“네. 고맙습니다.”
초대박과 노가다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이미 모든 걸 버릴 각오로 이곳에 왔다.
어차피 이서우와 대화가 잘 되지 않으면 그들은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헤라클레스와 적대적인 관계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전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전장의 지배자인 이서우입니다. 설아는 잘 아시겠죠? 그리고 이쪽은 김소연, 이분은 K사 대표님이십니다.”
“대박 길드의 마스터 초대박입니다.”
“저는 부마스터 노가다입니다.”
“그렇군요.”
진중한 분위기에 이서우와 그의 일행은 두 사람의 이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았다. 하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닙니다. 저희도 저희의 이름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길드원들도 다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요.”
“그러셨군요.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네. 말씀드려야지요. 가감 없이 솔직히 털어놓겠습니다.”
“그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겠지요.”
“그러니까 그게…….”
초대박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스텟 증가 영약 경매에 참여해서 물건을 산 것부터 헤라클레스 길드의 배상철 마스터가 찾아온 이후의 일까지 모두 말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을 듣는 사람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서우의 표정은 갈수록 어둡게 변했다.
그의 표정을 유심히 보던 초대박과 노가다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했기에 이야기를 이어 갔다.
초대박은 변명을 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스의 압박이 거셌지만 어쨌든 결정은 그가 내린 것이다. 사과를 할 거라면 어떤 변명 없이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그의 생각이었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이서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초대박과 노가다는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앞으로 이서우가 어떤 말을 할지에 따라 대박 길드의 향방이 판가름 난다.
이서우가 직접 관련이 된 일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초대박과 노가다로서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시간이었지만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이서우가 입을 열었다.
“헤라클레스 길드가 어떻게 당신의 존재를 알고 찾아왔는지는 모르겠다는 거군요.”
“네. 어느 정도 양이 쌓여 있을 때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영약을 반값에 가져갔고, 계속 만들 것을 강요했으며, 지금은 골드를 복사하라고 했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미친 새끼.”
“네?”
“아, 죄송합니다. 배상철을 생각하니 절로 욕이 나와서요. 어떻게 하면 인간이 그렇게 지저분해지는지.”
“그러셨군요.”
자신을 죽이라고 한 인간이 이번에는 게임에서 매장시키려 하는데 욕이 안 나올 수가 있을까.
물론 암살자를 동원한 것은 장길수였지만, 어쨌든 배상철이 지시를 내린 것이었으니 그의 책임이 더 크다 할 수 있었다.
“그 골드로 뭘 할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나요?”
“그게…….”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전장의 지배자 님을 완벽하게 매장시키는 데 쓴다고 했었습니다.”
쾅!
화가 난 이서우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자 크게 흔들렸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무게가 엄청났는데도 주변에 앉은 사람들에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박 대표도 참을 수가 없는지 양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길드의 힘만 믿고 아주 안하무인격으로 설치네. 이번 기회에 아주 박살을 내 놔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아도 저도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싹 지워 버릴까 싶어요. 하지만 증거 없이 시비를 걸면 똘똘 뭉칠 명분만 만들어 줄 거예요.”
“이들을 증인으로 내세우면 되지 않겠어?”
“증인으로는 부족해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과연 저들의 말을 헤라클레스 길드원들이 들으려 할까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증거가 없이는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괜히 섣불리 나섰다가는 수십만이나 되는 헤라클레스 길드원들이 똘똘 뭉쳐서 이서우에게 대항하려 할 것이다.
이서우 혼자서도 수십만, 아니 수백만이라도 처리할 수 있지만 명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서우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의 비판과 비난이야 감수를 하겠지만 과열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이서우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한데, 골드를 복사하는 게 가능할까.”
“누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응. 글로벌사가 바보도 아니고 카피 기술을 뒀으면 이미 조치를 취했겠지. 골드 복사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아는데 그냥 뒀겠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기존의 아이템조차도 완벽하게 복사하지 못하도록 해 놓은 것만 봐도 추측할 수 있지.”
생각해 보면 간단한 것이었는데, 피나는 노력으로 만든 영약을 복사한 것 때문에 무엇이든 다 복사가 될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배상철의 압박에만 너무 신경 쓰고, 혹시라도 기록에 남으면 제재를 받을까 봐 차마 시도를 못 해 봤거든요.”
“아마 되도 문제고, 되지 않아도 대박 길드에는 문제가 될 겁니다.”
“시스템적으로 되지 않는데도 문제가 될까요?”
“그놈이 그런 거 신경 쓸까요?”
“…….”
배상철을 떠올리자 차마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며 반문하지 못했다.
“일단 이번 사건의 죄를 당신들에게 묻지는 않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단! 공식적으로 방송에서 사과를 하셔야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전장의 지배자 님의 누명을 벗겨야 저도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약을 복사하는 건 초대박 길드마스터님의 고유 기술이니 막지는 않겠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 두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해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해야 할 거……라뇨?”
“놈들을 응징해야죠.”
“아!”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면 대박 길드에는 전혀 피해 없이 헤라클레스 길드를 파멸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뭔가요?
초대박은 헤라클레스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눈빛으로 이서우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보며 이서우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 * *
“아직 소식이 없어?”
“네. 아무래도 골드를 복사하는 문제여서 결단이 힘든 것 같습니다.”
“영약은?”
“그건 이미 1만 개를 더 회수했습니다.”
“가격은 갈수록 후려치고 있겠지?”
“네. 반값에서 10퍼센트씩 깎아 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벌어들였어?”
“벌써 3천만 골드 정도 벌어들였습니다.”
“크크크, 아주 돈을 쓸어 담고 있네. 역시 짝퉁 장사가 잘된단 말이야.”
“놈이 매물을 내놓지 않는 덕분에 더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스 부길드마스터 안낙원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 상대하기 쉬운 인간이란 말이야. 한두 푼도 아니고 수천억이 오가는데 어떻게 내 말만 듣고 그걸 믿는 거지? 뭐, 그 덕분에 나도 꽤 두둑하게 챙겼지만 말이야. 전임 부길마 녀석 이런 대박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으면 이 자리를 지키지 못한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안낙원은 온갖 아부를 하면서 배상철의 비위를 잘 맞춰 줬다. 그리고 뒤로는 골드를 빼돌리면서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었다.
이번 짝퉁 영약 사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형 길드다 보니 워낙 들어갈 돈이 많아 뒷주머니 찰 수 있는 곳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너무 티가 나면 안 되니 조금씩 빼돌린다고 그 동안 답답했는데, 짝퉁 영약 수익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워낙 많은 이익이 발생하고, 그들이 직접 제조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니 빼먹기가 너무 쉬웠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게 평소 안낙원의 지론이다. 그런 그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까.
처음부터 배상철이 이렇게 어수룩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머리가 잘 돌아갔고, 길드를 발전시키기 위해 저돌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랭킹 1위가 된 이후로 나태해졌다. 자신을 위협할 존재가 없으니 부길마나 간부들을 부리며 하고 싶은 걸 하면 끝이었다.
나태함은 결국 무능을 낳았고, 지금은 밑에 사람들이 그의 허점을 이용해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
“참, 마스터님. 최근 영상 하나가 올라왔는데, 보셨습니까?”
“내가 그거 볼 시간이 어디 있어? 뭔지 말해 봐.”
“전장의 지배자와 중국 유저의 일대일 전투 영상이었습니다.”
“멍청하게 그놈이랑 일대일로 붙는다고?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말씀하신 대로 놈이 죽은 것은 맞는데, 꽤 특이한 능력을 가진 자더군요.”
“그래봐야 내 공격도 못 막을 놈인데 뭘.”
“당연히 마스터님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죠. 한데, 놈이 4차 전직 유저더군요.”
“뭐? 4차 전직?”
“네.”
“중국 유저가 4차 전직인 게 말이 돼?”
“확실히 4차 전직이 맞았습니다. 두 개의 무기를 그렇게 완벽하게 쓰는 3차 전직 유저는 없으니까요.”
“두 개의 무기라니?”
배상철의 중국 유저가 4차 전직을 했다는 것도 믿기 힘든데, 두 개의 무기를 동시에 쓴다고 하니 더 의구심이 들었다.
안낙원이 완벽하게 쓴다고 할 정도면 상당히 잘 다룬다는 뜻인데, 두 개의 무기를 만족할 수준으로 다루는 사람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대검과 활을 썼는데, 둘 다 마나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허! 그게 정말이야?”
“네, 마스터 님.”
“중국 놈들이 아주 독이 바짝 올랐네. 하긴, 하이 레벨 지역은 퀘스트도 짱짱할 테니 4차 전직을 못 할 이유는 없겠지. 그러면 이제 하나 둘씩 4차 전직 유저가 늘어나겠군.”
“그럴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빠르게 4차 전직 유저가 늘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놈이 조금 특출나거든요.”
“그래도 하이 레벨 지역에서는 변수가 많으니 항상 신경 써.”
“네.”
안낙원은 몇몇 유저가 앞서갈 뿐이지 그렇게 긴장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지만, 배상철은 보다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당부했다.
“그나저나 우리 쪽 4차 전직 유저는 좀 늘었어?”
“네.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고, 벌써 천 단위에 접어들었습니다. 평균 레벨도 350을 넘어섰고요.”
“하이레벨 지역 때문에 성장이 빨라지네. 이럴 때 이권을 확실히 챙겨야 하는데, 그놈 때문에 막혀 버렸으니.”
“중국과의 전쟁에서 아마 힘을 잃게 될 겁니다. 그때 빌딩을 아예 먹어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놈이 가만히 있을까?”
“중국 유저들이 활동하는 곳과 가까운 곳을 먹고 그들과 협상을 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호,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네. 역시 부길마야.”
“마스터님이 계시니 가능한 겁니다.”
“하하하, 보는 눈도 뛰어나고.”
배상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마스터님, 초대박에게서 귓말이 왔습니다.”
“그래? 드디어 결정을 내린 건가.”
“일단 만나서 직접 말씀을 드린다고 하는군요.”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걸 보니 확실히 결정을 내렸나 보네. 이제 그 돈으로 놈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만 남은 건가?”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말이죠.”
“크하하하. 조만간 앓던 이가 빠지겠군.”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래, 그래. 우리 부길마는 날 실망시키지 않으니 잘 하겠지. 팍팍 지원해 줄 테니 잘 실행해 봐.”
“맡겨만 주십시오!”
안낙원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기회에 왕창 챙기고 현금화시킨 뒤 빠지자.’
자신 있게 말하는 안낙원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상철 밑에 있으면서 야금야금 돈을 빼돌리다가 발각되면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한탕 크게 하고 빠지는 게 이익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일에 투입될 돈은 수천억 원에 달할 것이다.
거기서 천억, 아니 수백억만 빼와도 평생 먹고 놀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지만 각자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