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
레벨이 갑이다
270화
쾅!
“이게 지금 몇 번째야!”
“죄, 죄송합니다.”
“또, 또! 죄송하다는 말밖에 못 해?”
“죄, 죄송…….”
쾅!
40대 초반의 사내가 30대 중반의 사내에게 쩔쩔매며 식은땀을 흘렸다.
“대체 왜 그놈들처럼 못 하는 거야?”
“그, 그게 뇌가 자꾸 과부하가 걸려서…….”
“그래서? 못 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게 아니라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시간? 벌써 3년이 지났어. 그런데도 제대로 된 성과를 못 내고 있잖아.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글로벌사를 따라잡겠냐고!”
30대 중반의 사내는 화가 잔뜩 났는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며 짜증을 냈다.
30대 중반의 사내는 중국인으로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는 대표였고, 40대 초반의 사내는 고용된 개발자였다.
여기서 잘리면 오갈 데도 없고, 딸린 식구들이 많아 더럽고 치사해도 버티고 있었다.
속마음이야 글로벌사는 5년 이상이 걸린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과거 3D게임 개발을 할 당시도 대작 게임을 만들려면 400억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그러고도 완성 작품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가상현실 게임은 오죽할까.
3년 동안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개발을 했고, 투자한 액수만 해도 2조에 육박했다. 이제는 성과를 내야 하는 시기였다.
처음에는 투자자들도 기대감에 많이 유치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성과는 없고, 돈만 잡아먹으니 빨리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최근 성공을 할 것 같아서 미리 곧 출시가 임박했다면서 큰소리를 쳤었는데, 그것마저 실패로 돌아가 원성이 자자했다.
대표도 죽을 맛이었다. 20대 후반에 운이 좋아 주식 대박을 터트렸고, 지금은 3조 원이 넘는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상현실 게임 개발에 줄줄 새고 있어 재산이 반 토막이 나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게…….”
“설마 방법이 없는 건 아니겠지?”
“방법은 있지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은 없어?”
“아시다시피 글로벌사도 처음에는 어나더 월드를 만들면서 테스터들을 속여서 실험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망했고요. 정상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면 저희도 그렇게 될 소지가 다분해서…….”
“그럼 뉴 월드는 대체 어떻게 탄생한 건데?”
“그건 어나더 월드의 실패를 거울 삼아 글로벌사가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기에 가능한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나더 월드 시절의 실패한 데이터를 잘 정리해서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거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럼 어나더 월드 시절의 개발자를 찾으면 되잖아.”
“저도 하도 답답해서 수소문해 봤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젠장. 그럼 뉴 월드 개발자를 데려오든가!”
“그게, 핵심 기술은 이미 어나더 월드 개발자만 알고 있어서 소용이 없다고…….”
쾅!
이러나 저러나 방법이 없자, 젊은 대표는 화가 나서 다시 테이블을 힘껏 쳤다.
그도 답답했다. 어떤 방법을 쓰든 1년 내로 성과를 내야 하는데,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정녕 없는 거야?”
“네. 윤리적인 논란을 감수하고 실험을 하든지, 아니면 어나더 월드를 개발하던 개발자를 찾든지, 해야 합니다.”
“실험은 몇 명이나 필요해?”
“1,000명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어나더 월드 때처럼 식물인간이 된다면?”
“당시보다는 기술이 좋아져서 정신적 충격이 있게 되면 재빨리 멈출 수는 있습니다.”
“이 새끼야, 그때보다 기술이 좋아졌으면 벌써 완성을 했었어야지! 하여튼 큰소리는. 그래서 다른 부작용은 없다는 거야?”
“네? 그, 그게 아니고.”
“부작용이 있다는 거야, 뭐야?”
“있기는 하지만 그리 심각한 건 아닙니다.”
“뭔데?”
대표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개발자는 순간 몸이 움찔했지만 얼른 말을 이었다. 괜히 또 늑장을 부리다가 잔소리를 듣는 게 싫었다.
“단기 기억상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건망증으로 생각할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단기 기억상실이라……. 그러니까 식물인간은 안 된다는 거지?”
“네.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어 식물인간은 되지 않을 겁니다.”
“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안전장치가 뉴 월드 측 기계라서…….”
“이런 멍청한! 그런 것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들고 그놈들 제품을 쓴다고? 나가 죽어라, 나가 죽어!”
뭐 하나 만족스러운 게 없자 답답해진 대표가 결국은 책상 위에 있는 걸 잡히는 대로 던져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과한 업무에 시달려 피곤한데, 대표가 던지는 물건들까지 맞아줄 수는 없어 삭삭 피해 버렸다.
“이 새끼가, 그걸 또 피해? 아주 죽으려고 환장했네.”
참다못한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개발자 사내의 정강이뼈를 차 버렸다.
“악!”
딱딱한 구두 앞발에 차이자 비명이 절로 나왔다.
“실험은 어떤 식으로 할 거야?”
“클로즈베타 테스터를 모집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통증이 가시지 않아 인상을 잔뜩 쓴 상태로 힘겹게 대답했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사실 억울했다. 뇌를 속여 현실 시간과의 비율을 1 대 6으로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작업은 게임 개발자가 아니라 뇌 전문가들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뇌 과학자와 뇌 전문 박사들로 이뤄진 팀이 있었는데 왜 개발자를 부른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뇌 관련 지식인들은 자존심이 강해 지금처럼 대했다가는 게임 개발이고 뭐고 불참 의사를 밝히고 그만둘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개발자는 죽기 살기로 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개발자인 이상 개발 관련된 전반적인 사안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해서 그를 호출한 것이었다.
“테스터는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되지?”
“일단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이 좋습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돈을 밝히잖아. 그래, 애국심을 자극하는 쪽으로 광고를 만들어 봐. 젊은 녀석들이라도 애국심이 깊은 놈들이 있을 테니까.”
“애국심을 활용하라고요?”
“그래. 클로즈베타 테스터가 되면 글로벌사에 빼앗기는 우리의 이익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식으로 틀을 짜란 말이야. 알겠어?”
“네. 대표님.”
“또 필요한 건?”
“뉴 월드 유저들 중에서 접속 시간이 긴 사람이 필요합니다.”
“걔들은 왜?”
“비교 데이터가 있어야 더 확실히 테스트를 할 수가 있거든요.”
“뉴 월드 한다고 다들 바쁜데, 그런 놈을 어디서 찾으라고?”
대표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개발자로서는 꼭 필요한 말이기에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뒤늦게 알려지면 잔소리로 끝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게, 적당한 인물이 한 명은 확실히 있습니다.”
“한 명 가지고 돼?”
“일단 도움은 되죠. 테스트를 진행하면서 다른 대상을 찾으면 시간 절약도 되고요.”
“그래? 그게 누군데?”
“그게 대표님 동생분이십니다.”
“뭐? 야, 이 새끼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아악!”
대표의 발길질이 다시 개발자 사내의 정강이뼈를 강타했다.
“대, 대표님, 실험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비교하는 것뿐입니다. 인체에는 아무런 해도 없다고요!”
“뭐? 인체에 해가 없어?”
“네!”
“새끼, 그럼 진즉 이야기를 할 것이지.”
언제 이야기를 할 틈을 줬단 말인가.
개발자 사내는 욱하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지만 꾹 눌렀다. 지금까지 참아 왔는데, 한 번 더 참는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가족의 생계와 직접 연관이 있으니 사내는 참아낼 수 있었다.
“가능할까요?”
“글쎄. 이놈이 요즘 신화급 무기를 얻고 나서 그거 쓰는 재미로 바쁘거든.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나, 뭐라나.”
“아, 기존 유저 연합과 중국, 인도 연합의 전쟁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한데, 신화급 무기를 얻었다고요?”
“그래.”
“신화급 무기가 나왔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뭐? 야, 너 게임 개발은 안 하고 뉴 월드 쳐 하고 있었어?”
“헉! 아, 아닙니다! 개발을 위해 그저 참고 삼아 정보만 모아서 확인한 겁니다!”
“게임 개발하는 데 신화 장비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중요하다고? 이 새끼가 누굴 호구로 아나.”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오, 내가 이런 걸 믿고 개발을 맡겼으니. 확 잘라 버릴까?”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잘라 버리고 싶었지만 3년 동안 프로젝트를 맡아서 했기에 다른 사람을 대체하기도 애매했다.
개발에 참여한 사람 중 유능한 인재들도 있지만 그동안 개발을 진행하면서 노하우도 쌓였을 테니 쉽게 교체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바꿀 수는 있지만, 개발이 늦어질 거라는 게 문제였다.
“똑바로 해. 기회가 자주 오는 거 아니다.”
“네, 대표님!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키겠습니다.”
“좋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 동생도 내가 설득해서 장치 연결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잠도 자지 말고 일해. 알았어?”
“네, 대표님!”
개발자는 힘주어 대답했다. 여기서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끝이었다.
“근데, 그거면 돼?”
“일단은 그 정도면 됩니다. 추가로 필요한 사람은 어차피 당장 구하기 힘드니까요.”
“내 동생처럼 회사 간부 중에 찾아보면 되겠지. 아니면 개발진에서 알아보든지.”
“아, 그러면 되겠군요.”
대표는 저렇게 무식한 놈을 인재라고 데려온 내가 미쳤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서 가서 일 안 하고 뭐 해?”
“네? 하지만 동생분을…….”
“당장 조치를 취할 테니 넌 네 할 일이나 하고 있어!”
“네!”
3년 동안 2조 원을 쓰고도 성과를 만들지 못했으니 죄인처럼 대표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돈이 권력이고 힘인 세상이다. 앞으로 살날이 많은데, 여기서 대표에게 찍혀 그만두면 어디에서도 그를 받아 주지 않는다.
그걸 잘 알기에 사내는 입술을 깨물며 대표 집무실에서 얼른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대표는 어딘가로 전화를 넣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좋으니 어나더 월드 개발자를 찾아라. 그에 대한 정보다 가져오고.”
대표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저놈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지. 이 지구상에 있다면 넌 곧 내 앞에 오게 될 것이다.”
* * *
“오랜만이야.”
“네놈이군.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다.”
“그래? 지난번 받은 접속 제한 페널티로는 부족했나 봐?”
“크크크. 여전히 기고만장하군. 뭐, 그 정도 실력이면 목에 힘을 줄만은 하지.”
“좋은 무기를 얻어서 자신감이 상승한 것 같네. 신화급이지?”
“역시 알고 있었군.”
“영상을 미리 봤거든. 하지만 그걸로 날 이길 수 있을까?”
“신화급 무기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나 해?”
이서우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잔뜩 머금고 있는 사람은 바로 테라칸이었다.
그는 신화급 무기를 얻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서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접속 제한 페널티를 받아 관리자를 만나는 일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다시 접속하니 천유종은 그를 상대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관리자에게 뭘 얻을 수 있는지 알아차렸으리라.
하는 수 없이 테라칸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는데, 그게 바로 레이드 몬스터였다.
그는 누구도 잡지 못한 500레벨 레이드 몬스터를 홀로 잡기 위해 뛰어들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20인의 파티로도 잡지 못하는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듀얼 직업을 가진 유저다. 대검을 사용하면서 마나나 생명력이 빠지면 멀리 벗어나 활을 이용했다.
처음에는 몇 날 며칠을 씨름한다고 풀접속 시간을 넘겨 강제 종료가 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를 구한 것은 바로 접속 제한이 해제된다는 소식이었다.
이틀 내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접속을 유지하면 겨우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얻은 아이템은 놀랍게도 신화 등급의 활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미친 듯이 레벨을 올렸고, 누구보다 먼저 550레벨에 도달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은 전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초월 강화를 한 최상급 옵션의 전설 등급 아이템보다 무려 2배나 강했다. 그것도 하나도 강화를 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말이다.
그는 그동안 모은 골드를 모두 쏟아부어 초월 강화를 했다.
강화석도 고급 이상만 사용해야 해서 돈이 엄청나게 깨졌다.
초월 작업에, 초월 풀 강화까지 한다고 무려 1천억 원이나 쓴 것이다.
한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월 강화를 풀로 하자 아이템이 진화를 했다.
진화한 아이템은 30까지 다시 강화가 가능했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진화한 아이템은 강화 확률이 더 낮아졌다.
하지만 테라칸은 다시 1천억을 들여 +30 강화를 만들었다.
아이템 하나에 무려 2천억 원을 들인 걸 알면 사람들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만, 그는 전혀 돈이 아깝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만 들어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그는 이서우를 끌어내기 위해 미친 듯이 기존 유저들을 죽였고, 그래도 나오지 않자 마을 근처까지 침입해 유저들을 학살했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드디어 이서우와 재회하게 된 것이었다.
한데, 그는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 신화급 무기를 얻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자신감 때문일까. 그는 거리를 멀리 벌리지도 않고 활을 꺼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두 번째 대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