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레벨이 갑이다
273화
“그게 네가 깨어났을 때의 상황인가?”
“그래. 난 그렇게 깨어났다.”
이서우는 자신이 어떻게 갇히게 되었고, 어떻게 깨어났는지 설명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정민후는 씁쓸한 얼굴로 질문했고, 이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면 나도 그런 모험을 해야 한다는 건가?”
“나도 그건 장담할 수 없어. 네 생명이 걸린 문제니 내가 왈가왈부할 수도 없고.”
“고민만 안겨 주는군.”
“고민이라도 할 수 있는 걸 행운으로 여겨.”
“그렇군. 이것도 내게는 행운인 거군.”
정민후는 자조적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서우도 20년 동안 게임 속에서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지내면 자연히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발견하는 것은 행운이었다.
이서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정민후는 반박하지 않았다.
평소 괴짜같던 정민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진중한 태도로 고민하고 있었다.
가만 놔두면 계속 고민만 하고 있을 것 같아 이서우가 슬쩍 끼어들었다.
“혼자 사색하는 건 나도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이제는 그만 해. 그러다가 우울증 걸려.”
“습관이 돼서 나도 모르게 또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나 보군.”
“시도를 하든 하지 않든 결정은 네 몫이야. 하지만 네 할아버지와 상의는 해 봐야 하지 않겠어?”
“할아……버지와?”
“그래.”
정민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을 유독 아끼던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의 가슴을 흔들어놓는 것은 바로 그리움이었다.
정민후도 유저들이 게임을 하게 됐을 때,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누가 과연 자신의 말을 믿어 주겠나.
현실에서도 꽤 시간이 흘렀을 테고, 게임 속의 모습과 너무 달라져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정민후는 포기했었다. 헛된 희망을 가지게 될까 봐.
희망은 긍정적인 것이지만, 헛된 희망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는데, 다시는 정신이 파괴된 그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게다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다가 깨어난 경험자였다.
방법이 아예 없지도 않았다. 아주 희박한 가능성일지도 모르지만 제로 퍼센트가 아니었기에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할아버지를 봐야 했다. 만약 보지 않고 죽어 버린다면 크게 후회할 것 같았다.
“좋다. 날 믿어 준다면 할아버지와 만나겠다.”
“네 할아버지를 이미 만났으니 당연히 믿지. 그럼 이곳에서 기다릴 테냐?”
“그래. 여기가 낫겠지. 내 영역이기도 하니까.”
“좋다. 그러면 종료한 뒤 일행에게 이곳까지 안내를 해 달라고 부탁하마.”
“알았다.”
“그럼…….”
“고맙다. 진심으로.”
이서우가 접속을 종료하려는데 정민후가 마음을 다해 고마움을 전했다.
이서우는 미소를 지으며 접속을 종료했다.
* * *
“회장님, 동공 반응에, 감각 반응까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시도를 하면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 문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나.”
“하지만…….”
정 회장은 이서우의 혈액을 이용해 DNA를 복제하는 방법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성공 확률도 낮은 데다가 괜히 알려지면 이서우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니 결국 중단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윤리적인 문제로 어떤 비난을 받아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실패 확률이 있다면 최대한 신중히 결정해야 했다.
정 회장은 조금 더 확신이 설 때, 그때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민후가 반응을 했으니 일단 그 방법은 조금만 더 미루세. 시간이 지나면 분명 민후는 스스로 이겨 내고 깨어날 것이네. 난 우리 민후를 믿는다네.”
“……네.”
최 박사는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침묵했다.
조금 더 간절한 마음이 생긴다면, 그때가 된다면 정 회장도 자신의 뜻에 따르리라.
하지만 최 박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응? 이 아이가 어쩐 일이지?”
“회장님?”
“아, 서우 군이군. 잠시만 기다리게.”
“네, 회장님.”
최 박사가 몇 발짝 떨어져서 대기했고, 정 회장은 차분히 전화를 받았다.
홀로그램 모드로 하지 않고 음성 모드로 통화를 했다.
“그래, 오랜만이구만.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건가? 뭐? 그게, 정말인가! 알았네. 지금 당장 그리로 가겠네. 아닐세. 거기서 접속하겠네.”
편하게 통화하도록 자리를 살짝 피한 것인데,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내용을 다 들을 수 있었다.
“회장님?”
“아, 자네도 가세.”
“네?”
“서우 군이 우리 손자를 게임 안에서 만났다고 하네. 지금 날 보고 싶다는구먼.”
“네에?”
최 박사는 깜짝 놀라 소프라노톤의 목소리를 냈다.
“자네도 같이 접속하세. 어서 가세나!”
“네, 회장님.”
최 박사는 복잡한 심정으로 정 회장의 뒤를 따랐다.
급했는지 평소에는 잘 타지 않는 드론자동차를 타고 K사로 향했다.
정 회장이 도착하자 김소연이 그를 안내했다.
노구의 몸임에도 정 회장은 젊은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김소연의 뒤를 쫓았다.
그들은 이서우와 이설아의 사무실로 갔다.
“서우 군! 정말, 정말 우리 민후를 봤는가?”
“네. 만났습니다. 이걸 먼저 보시죠.”
인사부터 하는 게 순서지만 정 회장의 마음을 알기에 이서우는 미소를 지으며 정민후와의 만남을 찍은 영상을 보여 주었다.
정회장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정민후를 바라보았다.
“우리 민후가 맞구먼. 우리 민후가 맞아!”
이서우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역시 핏줄은 달랐다. 보자마자 그가 정민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 지금 접속하면 되는가?”
“네. 접속 베드는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럼 당장 접속하세. 참, 최 박사도 같이 접속할 것이네.”
“그건 상관없는데, 베드가 좀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네. 지금 그게 대수인가. 꽉 끼어서 좁아 터져도 상관없으니 가세.”
“네. 계정을 만드시면 곧장 김소연, 이설아와 친구추가를 하시고 같이 파티를 맺으시면 됩니다. 민후가 있는 곳은 꽤 위험하거든요.”
“허허허. 벌써 우리 민후와 친해졌구먼. 잘된 일이네.”
“아, 네.”
이서우는 차마 원수처럼 서로 물어뜯을 것처럼 싸우기 직전까지 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서우는 접속 베드가 있는 방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이 베드를 쓰시면 됩니다.”
“이, 이걸 최 박사랑 같이 쓴다는 말인가?”
“네.”
정 회장은 최 박사를 힐끗 쳐다보며 헛기침을 했다.
“험, 험. 우리 민후를 보는 게 우선이니 이거라도 써야지. 최 박사, 자네 몸부림이 심하거나 그러지 않지?”
“네? 네. 전 잘 때도 시체처럼 잡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먼. 그럼 얼른 접속하세.”
“……네.”
정회장과 최박사가 당황한 얼굴을 하는 이유는 바로 접속 베드가 커플용이기 때문이었다.
덩치도 있어서 나란히 누으면 꽉 차 버리니 피부가 맞닿아야 한다.
“최 박사, 조금 옆으로 가게나.”
“이게 최대한 움직인 겁니다.”
“험, 험. 그것 참 너무 꽉 끼는구먼.”
“어서 접속하시죠.”
“그러세나.”
캡슐이 닫히고 이서우는 이설아와 김소연을 바라보았다.
“우리 거랑 사이즈는 비슷한데, 많이 작으신가 보네.”
“그러네. 뭐, 어차피 잠시 접속하는 거니까. 그럼 우리도 접속할게.”
“그래. 난 하급 관리자 영역까지 가 있을 게. 내가 있는 곳은 상급 관리자 영역이거든.”
“응. 알았어. 그럼 거기서 봐.”
세 사람도 각자의 접속 베드에 올랐다.
김소연도 과거 함께 플레이를 했었기에 그녀의 접속 베드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서우가 접속하자 정민후가 먼저 말을 걸었다.
“벌써 오시는 건가?”
“요즘은 드론자동차도 쓸 수 있거든.”
“드론자동차? 비상시에만 쓸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요즘은 돈만 있으면 쓸 수 있어. 물론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도 붙지만.”
“중요한 위치? 뭐, 하긴 할아버지가 중요한 위치시긴 하지.”
“그것도 그렇고, 드론자동차 허가를 통해 거둬들이는 세금이 엄청나거든. 국가 살림에 보탬이 되니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거지.”
“그때나 지금이나 세금 걷어 가려고 환장한 건 똑같네.”
“그게 다 서민들한테 돌아가는 거니 많이 걷어도 돼.”
“네가 기업가가 되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보자.”
“못할 것도 없지. 많이 버는데 그게 뭐 그리 부담된다고.”
“원래 부자가 되기 전에는 다 그렇게 말을 해. 돈을 많이 벌면 기부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로또라도 당첨돼 봐. 기부는커녕 숨기기 바쁠걸?”
“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어.”
“끽해야 100에 한 명?”
“뭐, 그건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지금은 네가 깨어날지가 더 중요해.”
“그래,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이서우는 더 이상 논쟁을 하기 싫어 화제를 돌렸다.
정민후는 자신의 생사가 걸린 일이어서 그런지 이서우의 말에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나보다 조금 더 지냈으니 거의 6년 정도 됐겠네. 네가 깨어나면 꽤 많이 달려져 있을 거야.”
“많이 달라진 세상이라도 좋으니 깨어만 났으면 좋겠다.”
“희망을 가지라고.”
“노력하는 중이야.”
“참, 이곳까지 오려면 쉽지 않을 테니 내가 마중을 가야할 것 같아.”
“그러지 말고 같이 가지.”
“같이? 괜찮아?”
“어차피 다 하급 관리자 녀석들인데 안 될 건 또 뭐야. 괜찮아.”
“그러면 다행이고. 아, 접속했네. 가자고.”
이서우는 어디서 만날지 길드 채팅 창으로 의견을 나누고 이동했다.
“속도를 더 내도 돼.”
“그래? 알았어.”
이서우는 가속화를 썼다. 처음에는 2배로 이동하다가 잘 따라오는 것 같아 점점 높였다.
가속화 10배가 됐는데도 정민후는 무리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최고 속도로 가도 돼.”
“그래? 후회할 텐데.”
“그게 가능하다면 내가 얻은 영토를 다 주마.”
“오, 그래? 남아일언?”
“중천금이지.”
이서우는 가속화에서 초월 가속으로 바로 전환했다. 차근차근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곧장 최고 속도로 달렸다.
“헉!”
이서우가 사라지자 정민후는 놀라서 헛바람을 삼키고는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이내 백기를 들었다.
“야!”
한참이나 앞서가던 이서우가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정민후가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네 땅 내거다.”
“…….”
이서우는 하얀 이빨이 드러날 정도로 웃었고, 정민후는 식은땀을 흘렸다.
정민후는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너, 혹시 하이 레벨이야?”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역시, 그랬군. 나도 하이 레벨이야.”
“뭐? 너도?”
“그래. 나도 하이 레벨의 존재를 안 지 얼마 안 됐어. 지루한 일상을 지내고 있는데 이상한 놈이 와서 전직시켜 주고 갔거든. 레벨이 1로 떨어졌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다고. 미친 듯이 레벨을 올려서 겨우 500을 넘기고 통치자의 영역을 삼키려고 정찰을 하고 있었지. 그때 널 만난 거고.”
“그랬구나. 그럼 통치자들은 다 하이 레벨이라는 뜻이네?”
“그렇지. 하이 레벨이 안 되면 통치자는 불가능할 거야. 어쩐지 조금 전 네 움직임이 비정상적이다 했는데,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다행인 줄 알아. 아까 싸웠으면 넌 진짜 엿 될 뻔 했으니까.”
“그러게. 덕분에 살았네. 내 땅 네가 가져.”
“그건 조금 전 내기로 내가 가지기로 한 거고. 설마 치사하게 내기 해 놓고 안 주려고 했던 거냐?”
“내기는 공평해야지. 넌 아무것도 안 걸고 나만 걸었으니 무효 아냐?”
“무효 같은 소리하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면서!”
“알았다, 알았어. 주면 될 거 아냐. 어차피 땅덩어리도 넓은데 성질은. 빨리 가기나 해.”
정민후의 핀잔에 이서우는 피식 웃고는 속도를 높였다. 어디 한 번 똥줄 좀 타 보라는 듯 초월 가속을 극한까지 펼친 것이다.
“야! 야아아아아!”
정민후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온 사방에 울려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서우는 열심히 달렸고,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