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
레벨이 갑이다
299화
이서우는 결국 10층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신의 은총을 받은 종족이라니. 진짜 별별 종족이 다 있네.”
“나도 그런 놈들은 처음 본다. 어떻게 그 공격을 맞고도 버티냐?”
“무려 100만의 마나를 쏟아부은 건데, 고작 반 피라니.”
“걔들은 양반이잖아. 10층 보스는 진짜…….”
신의 은총을 받은 종족을 처치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0층을 지키는 보스는 이서우의 마나를 있는 대로 때려 부었는데도 반 피 이상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이서우는 마법 계열 유저를 한 명 영입하자고 합의를 보고 나오게 된 것이었다.
면역이 생기면서 유저들은 더욱 파티 위주의 사냥을 하게 되었다.
‘마법을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했는데, 이참에 그냥 배워 버릴까?’
물리 내성은 간단한 마법에도 대미지를 입는 다는 것을 알았지만, 물리 계열 직업이 마법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지금까지는 그게 공식처럼 되어 왔다.
하지만 이서우는 그럴수록 더욱 악착같이 해내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못할 것도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아냐. 괜히 마법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한 게 아닐 거야. 우선 마법사부터 영입해 보자.’
결국 이서우는 마법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어 두었다.
“난 대전용에 한 번 다녀올 테니 너도 네 할 일 해.”
“알았다. 고생 많았다. 참, 나오면 한 번 들러.”
“이제 죽는다 소리 안 하는 거야?”
“그, 그래. 내가 무슨 애냐? 그런 투정 부리게.”
“나 동영상으로 다 찍어 놨다.”
“헐. 야, 너 그거 불법이야!”
“나랑 연관이 있는 일이면 불법 아니거든.”
이서우는 정민후가 오기로라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기에 한동안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삶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니 어떤 선택을 하든 이서우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다행히 정민후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재활 훈련을 잘 버티며 많이 밝아진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서로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눠도 될 것 같았다.
“아무튼 수고하고. 10층은 다음에 깨자. 나도 법사하나 알아보마.”
“그래.”
“참, 근데 법사 구해서 3인으로 가면 또 최초 타이틀 받는 건가?”
“하여튼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요. 나중에 한 번 테스트해 보면 되지.”
“그래. 그럼 수고!”
정민후는 손을 번쩍 들어 인사를 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멀리 사라진 정민후를 힐끗 보고는 대전용 무한의 탑으로 갔다.
“헉!”
“어머, 주인님 오셨어요?”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주인님이 안 계신 사이 제가 꾸며 봤어요. 어때요? 예쁘죠?”
“이, 이건…….”
이서우는 방 전체가 핑크빛으로 감도는 것을 보며 기겁을 했다.
포인트가 아까워 다 치워 버릴 수도 없어 인상만 잔뜩 찌푸렸다.
한데, 도우미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이서우에게 웃으면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꾸몄는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이서우의 귀에는 그런 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조금 부족하군요. 주인님께서 방어전에 성공하시기만 하면 꾸미기 포인트로 열심히 더 아름답게 꾸며 놓도록 하겠어요!”
“여기서 더 꾸민다고?”
“그럼요! 아직 꾸밀 게 얼마나 많다고요. 복층도 만들 수 있는 걸요.”
“보, 복층?”
“네. 아주 널찍한 복층도 가능해요. 포인트가 많이많이 쌓이면 2층, 3층도 만들 수 있고요.”
“…….”
이서우는 뭐 이런 도우미가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냥 반품해 버려 하고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기시간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도우미라도 있는 게 훨씬 덜 심심했다.
‘그래. 어차피 싸울 때는 사라지니까. 그걸 위안으로 삼자.’
이서우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는 훌훌 털어 버렸다. 어차피 무한 포인트나 골드를 쓰는 게 아니니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대전 상대 찾아봐 줘.”
“네, 주인님. 대전 상대를 찾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서우는 핑크빛 방을 조금이라도 덜 보는 방법을 빨리 대전 상대를 찾아서 천천히 싸우는 것밖에 없다고 여기거 얼른 명령을 내렸다.
대전 상대가 선택 되고 이서우는 부지런히 포인트를 모았다.
재미있는 것은 연승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연승 보너스는 계속 고정이었지만 보너스 포인트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이서우는 최대 횟수까지 사용하고 접속을 종료했다.
아직 이른 저녁시간이어서 친구들을 찾아갔는데 다들 뉴 월드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설아도 마찬가지여서 휴게소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며 뭘 할까 고민했다.
“오랜만에 주 변호사님과 통화나 좀 해 볼까나.”
이서우는 홀로그램 통화를 시도했고, 한참이나 주선용 변호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서우는 주선용에게 자신을 위한 법인 팀을 꾸려 달라고 했고, 주선용은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주선용은 자신이 하던 일을 후배에게 넘기고 오직 이서우만을 위해 일하는 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부자 순위 1위, 전세계 부자 순위 20위 안에 당당히 들어섰다.
최단 기간 이룬 일이고, 앞으로 발전이 무궁무진해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1시간 넘게 주선용과 통화를 했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결국 이서우는 정민후에게 연락을 했고, 그와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정 회장이 이서우를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허허허, 어서 오게. 그렇지 않아도 민후가 자네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네.”
“하, 할아버지! 제가 언제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고 그러세요!”
“어허, 그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우 군이 안 온다고 투덜거리더니.”
“전 그런 적 없습니다요!”
“남자가 돼서 저리 부끄럼을 타서야. 쯧쯧쯧. 아무튼 잘 왔네. 민후와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게.”
“제가 좀 많이 먹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허허허. 자네 배를 채울 정도는 대접할 수 있네.”
“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부르겠네.”
“네, 회장님.”
정 회장이 나가자 정민후는 구시렁거리며 이서우에게 다가왔다.
“그냥 앉아 있어도 돼.”
“열심히 움직여야지. 아직은 도구의 힘을 빌려야 하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
“요즘은 보조기구들이 워낙 잘 나와서 근육을 회복하는 데 좋을 거야.”
“그러지 말고 우리 잠시 밖에 나갈까?”
“밖에? 정 회장님이 허락 안 하실 텐데?”
“너랑 같이 있어서 허락하실 거야.”
“괜히 사고 나서 나한테 덮어씌우지 말고 그냥 얌전히 있어.”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으면 얼마나 답답한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서우는 식물인간에서 깨어나서 병원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오직 걷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재활에 매진한다고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고, 그럴 틈도 없었지만 때로 외롭고 쓸쓸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곤 했다.
그때가 떠오르니 이서우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 회장은 처음 정민후가 나간다고 할 때 반대했다가 이서우에게 경호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허락해 주었다.
정민후는 신이 나서 외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냥 대충 가면 될걸, 하여튼 까다로운 녀석이라니까.”
“너무 오랜만에 나가서 그렇지. 너도 처음엔 그랬을 걸?”
“하긴, 엄청 떨렸지. 병원 안에서만 세상을 보다가 직접 나갔을 때의 그 기분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맞아. 너도 오늘 제대로 경험해보겠네.”
“어서 가자.”
이서우가 앞장서려는 걸 정민후가 굳이 자기가 안내하겠다며 우겨댔다.
걸음걸이는 너무 느렸지만 이서우는 차분히 보조를 맞춰주었다.
정민후는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밖으로 나갔다.
많이 서툴렀지만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냈다는 것이 기뻐 힘든 줄도 모르고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보다 몇 배나 더딘 걸음으로 나간 정민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정민후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탄성이었다.
별 게 없는 곳인데도 뭐가 그리 신기한지 눈을 크게 뜬 채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행동하면 촌놈 소리 듣는다.”
“나 원래 서울 촌놈이야.”
“요즘은 서울에 살아도 촌사람이냐?”
“몰랐어?”
“말을 말자. 근데,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있지.”
“어딘데?”
“이촌 시민 공원에서 볼 수 있는 노을.”
“그럼 가야지.”
이서우는 누구보다 정민후의 마음을 알기에 꼭 데려가고 싶었다.
경호원들이 바빠지겠지만 그건 그들의 일이다. 그래도 신경이 쓰였는지 이서우는 차를 타고 천천히 움직였다.
“차 안에서 보는 경치도 괜찮네. 예전에는 미세먼지도 많고 공기도 좋지 않았다는데, 지금은 너무 좋네.”
“많이 변했지. 연기를 뿜어 대던 것들이 다 사라졌으니까.”
한참을 바깥 풍경을 말없이 구경했다.
“참, 너 설아 씨 어떻게 만났어? 두 사람 하는 행동 보니 만난 지 좀 된 것 같은데, 그땐 네가 비실비실 거릴 때잖아.”
“삐쩍 말라서 볼품없을 때긴 하지.”
이서우는 과거를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오랜 과거도 아닌데 몇 년은 지난 기분이었다. 뉴월드에서 워낙 오랜 시간을 보내서 그런 것이리라.
이서우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민후는 진지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즐거워했다.
이제는 서울 어디에도 차가 막히지 않아 그리 오래 걸리는 곳은 아니었는데, 일부러 천천히 가다 보니 1시간 가까이나 소요되었다.
그야말로 기어서 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타이밍 잘 맞췄네. 이제 곧 노을이 지겠어.”
“이곳을 좋아하나 봐?”
“가끔 가슴이 답답할 때 찾아오곤 하던 곳이야.”
이서우도 몇 번 와 본 곳인데, 오랜만에 찾으니 기분이 좋았다.
“너, 설아 씨랑 같이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게임을 한 게 아니라 신내림 받고 왔냐?”
“얼굴에 딱 써 있어. 많이 좋아하나 보네.”
“그러게. 나도 몰랐는데 많이 좋아하고 있더라고.”
“결혼할 거지?”
“난 그러고 싶은데, 설아가 어떨지 모르지.”
“쯧쯧쯧. 불쌍한 설아 씨. 남자가 이렇게 물러서야. 설아 씨는 분명 원하고 있어. 네가 확 끌고 가야지.”
“무드 없이 그냥 막 결혼하자고 하냐? 넌 연애하긴 글렀다.”
“모르는 말씀. 이래봬도 내가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 날 보기 위해 집 앞을 서성이던 여성들이 수두룩했다.”
“퍽이나.”
이서우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들의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뉴 월드에 갇혀 있을 때는 정말 게임을 원망 많이 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판이야.”
“죽었다 살아나면 원래 철드는 법이야.”
“그건 그래. 몇 번이나 죽었다 살아나다 보니 확실히 깨닫는 바가 있더라.”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서쪽 하늘에 은은하게 감도는 것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하네.”
“다음에 꼭 설아 씨랑 같이 보러 와. 와서 프러포즈해 버려.”
“프러포즈는 내가 생각해서 하는 거지. 남이 하라는 건 안 해.”
“내가 볼 땐 딱히 생각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시끄러!”
“하하하, 부끄러워하기는.”
정민후는 마치 복수라도 하듯 웃음을 지으며 ‘부끄러워’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의 의도를 알았는지 이서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직 젊지만 항상 시간을 소중히 여겨. 물론 너도 잘 알겠지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설아 씨 말야. 행복하게 해 주라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 줄 테니 남 일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 이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지. 나중에 같이 애 낳아서 크는 거 같이 봐도 되고. 제일 친한 친구가 둘 있는데, 걔들이랑은 그러기로 했거든. 뭐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친구들인가 보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들이지.”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거야.”
“너도 만들 수 있어.”
“그럴 거야. 친구도 만들고, 연인도 만들고. 이제 나도 행복해져야지.”
노을을 바라보는 정민후의 눈빛이 밝아졌다.
깨어나자마자 움직이지 않는 몸을 보며 절망도 했었다. 하지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희망을 가졌다.
특히 이서우의 도움이 컸다. 아마 그가 아니었으면 정민후는 힘을 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서우 씨, 누군가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에이, 별거 아니니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제가 책임 질 테니 걱정 마시고요. 어차피 이거 다 저장되고 있잖아요.
-네. 하지만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러세요.
생각 대화가 끝나자 정말로 그들의 곁에 한 사내가 다가왔다.
“젊은이들이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군.”
이서우와 정민후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40대 초반에서 많아 봐야 중반으로 보였는데, 자신들을 보며 젊은이라고 하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데, 정민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당신은…….”
“역시 날 알아보는구먼.”
“하이 레벨 퀘스트를 줬던 바로 그 사람…….”
“세 가지 부탁, 잊지 않았지?”
“……잊지 않았다. 하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겠지?”
“그럴 일은 전혀 없어. 너희들에게 절대 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민후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 사람 뉴 월드에서 만났었어. 내게 하이 레벨이 될 수 있는 퀘스트를 줬고.”
“그런…….”
“목소리를 낮춰.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지. 혹들은 좀 떼 놓고.”
“당신을 어떻게 믿고 경호원들을 물리란 거지?”
“믿을 수밖에 없어. 육체의 변화가 왜 일어나는지 알고 싶다면 말이지.”
“…….”
이서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체 어떻게 이자가 그 일을 안단 말인가.
설마 정민후가 말한 건가?
아니다. 그도 현실에 나와서야 이서우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대화를 들어 보니 이서우를 알기 전에 이자를 알게 된 것 같았다.
“모든 궁금증은 나와 함께 가면 알 수 있다. 왜 너희가 이런 일을 겪게 되는지 말이야.”
사내는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이서우와 정민후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