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이 갑이다-304화 (304/341)

# 304

레벨이 갑이다

304화

“민후를 너무 믿지 마.”

“네?”

“민후를 살려준 대가로 네게 글로벌사 주식을 1퍼센트 줬지?”

“네. 선의로 한 일이지만 주시더군요.”

“그런 사람들은 깔끔한 걸 좋아해. 괜히 나중에 그게 빌미가 될 수 있거든.”

“어차피 선의로 한 건데, 그걸로 제가 무슨 이득을 보겠어요.”

“선의로 뭔가를 해 봤어야 선의를 분별할 수 있는 거야. 정 회장은 지금껏 모든 행동을 이익과 결부시켜왔어. 그러니 네가 선의로 그 일을 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뭐, 살아온 배경이 다르니 그럴 수도 있겠죠.”

이서우도 왜 정 회장이 굳이 주식을 1퍼센트를 줬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상대가 고마워하는 마음과 함께 준 것이니 더 이상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 손규석은 그렇지 않았다.

“정회장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건, 아마 정민후 때문일 거야.”

“민후가 왜요?”

“나중에 민후가 기업을 물려받게 되면 너에게 도움받은 것 때문에 끌려 다닐 수도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래서 아예 빚을 만들지 않으려고 주식은 준 거고.”

“대기업 회장들은 참 별걸 다 걱정하네요.”

“그들의 삶이 그랬으니까. 어쩌면 상황에 따라 정 회장이 너와 다른 길을 가게 될지도 몰라. 그러면 정민후에게도 영향이 가겠지. 그런 걸 염두에 두는 건 나쁘지 않아. 그리고 나조차도 절대로 다 믿으면 안 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네요. 전 누구도 완전히 믿지는 않으니까요.”

“에이, 설아는 아니던데?”

“설아와 전 목숨을 나눈 사이어서 조금 다르고요.”

“여튼, 솔직해서 좋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손규석은 이서우에게 지나칠 정도로 솔직했다.

보통은 ‘나만 믿고 다 믿지마’와 같은 말을 잘 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어쨌든 정 회장을 비롯해 10대 그룹을 조심해.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니까.”

“꽤 확신하는 듯한데,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

“그냥 경험에서 나오는 거야. 대기업의 횡포에 당하는 사람들을 워낙 많이 봤거든.”

“경험이라…….”

이서우는 분노와 후회, 슬픔이 담겨 있는 손규석의 눈빛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혹 손규석은 지금처럼 후회와 슬픔이 담긴 눈빛을 하곤 했다.

허름한 건물 지하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언뜻 보여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서우는 그가 무슨 경험을 했는지 알고 싶었지만 아픈 과거를 꺼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에 일부러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규석은 결심을 한 듯 숨겨 뒀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정민후는 몰라도, 너와는 어차피 완벽하게 한배를 탔다고 여기니 말을 하는 편이 낫겠지.”

“저와 정민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것 같은데요?”

“그건 맞아. 하지만 정민후를 아직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거든.”

“확실히 신뢰하지도 않는데 그런 비밀을 말했다는 건가요?”

“테스트지.”

“테스트라. 위험을 즐기시는 타입이군요.”

“그에게 말한 건 전부가 아니니까. 그러니 널 이렇게 따로 부른 거고.”

“뭐, 그렇다고 치고. 무슨 말씀을 하려던 거였어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나에게 동생이 하나 있었어. 늦둥이 여동생이었는데, 참 예뻤지. 열다섯 살 차이가 났으니 너와는 동갑이네.”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손규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빛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세상에 동생과 나만 남겨져서 난 가장의 역할까지 해야 했어. 미친 듯이 공부를 하면서 동생까지 돌보는 건 결코 쉽지 않았지. 가장 힘든 건 경제적인 거였는데, 다행히 기회가 왔어.”

“그 기회가 어나더 월드였나요?”

“맞아. IT쪽이 유망해서 그쪽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고, 다행히 글로벌사에서 기회를 펼칠 수 있었지. 핵심개발자에 올라 미친 듯이 연구를 했어. 하지만 동생에게 자랑하고 싶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떠벌린 게 문제가 되고 말았지.”

“설마…….”

“그래. 동생도 가상현실에 관심이 많아 꼭 테스트에 참여하고 싶다고 매달렸지. 내가 연결시켜 줬고. 내가 동생을 죽인 거야. 내가…….”

이서우는 깊은 슬픔에 잠긴 손규석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 책임이 아니라 부작용이 드러났는데 테스트를 중단하지 않은 윗대가리들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서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이 사람의 집착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네. 만약 나였다고 해도 그랬겠지. 설아에게 이 사람의 동생에 대해서도 알아보라고 해야겠네.’

이서우는 감정이 북받쳐 이야기를 하는 손규석의 말에 깊이 공감했지만 그를 완벽하게 믿지는 않았다.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않고 그의 동생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의 적이 될지, 아니면 든든한 아군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민후가 함께 한다면 분명 큰 힘이 되겠지. 하지만 난 억지로 민후의 마음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뭐,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너도 나에 대해 아직은 많이 알아봐야 할 거야. 그 전까지는 날 완전히 믿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봐. 믿을 수 있겠다 싶을 때 더 많은 걸 같이 공유하자고.”

“쿨 해서 좋네요.”

“이래 봬도 꼰대 소리는 안 들어.”

“꼰대들이 꼭 그런 말을 하던데요?”

“그, 그런가?”

“아마 그럴걸요?”

이서우는 마음 한쪽에 깊은 고민을 두고 있으면서도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에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 이야기는 다 끝났나요?”

“그럴 리가! 이제부턴 뉴 월드 이야기를 해야지.”

“뉴 월드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막 시작하는 초보자가 된 기분이네요.”

“하하하하, 한스 노인을 당황하게 하던 때가 떠오르는구먼.”

“설마 그 장면도 봤단 말이에요? 대체 모르는 게 뭐예요?”

“말했잖아. 너에 대해 모든 걸 안 다고.”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그렇다고 설아와의 은밀한, 뭐 그런 거까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개인 프라이버시는 지켜 주시는 게 좋습니다!”

“다, 당연하지. 난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한다고.”

손규석은 이서우의 살기어린 눈빛에 얼른 두 손을 들어 세게 흔들었다.

괜히 죽자 사자 덤벼들면 골치 아팠다.

“뉴 월드에 대해 하실 말씀은 뭔가요?”

“카이젠 제국에서 네 입지가 가히 황제에 버금간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한데, 문제는 네가 그로 인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야.”

“그게 문제가 되나요?”

“NPC라면 전혀 문제가 안 되지만 네가 유저라는 게 문제지. 앞으로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20억 이용자를 상대로 장사를 할 테니 그 수익이 얼마나 클까.”

“설마, 내 밥줄을 끊을 수도 있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아. 부가 한쪽으로 쏠리는 걸 미연에 막으려고 하겠지. 지금 네게 가는 수익만 해도 엄청나잖아.”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안재훈이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거죠?”

“벌써 시작되었잖아, 이번 패치.”

“이번 패치? 세력을 나누는…… 아! 그렇겠네요.”

“그래. 이제 네 고객은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5억이 채 안 되는 이용자뿐이야. 10억이 조금 넘는 중국과 인도 유저들은 앞으로 네 물건을 사지 않을 거야. 물론 아이템은 바로 구입하겠지. 하지만 그건 오히려 그들을 도와주는 게 될 거야.”

“언어도 안통하게 해두니 상대방의 물건을 구입할 수는 없을 텐데요. 오프라인 경매가 아니라면.”

“맞아. 오프라인 경매. 그게 바로 문제지. 만들어 둔 영약을 온라인으로만 팔 거 아니잖아. 오프라인 경매로도 팔 거지?”

“……네. 아무래도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건 그러니까요. 그럼 중국과 인도는 제외시켜야겠네요.”

“그게 좋을 거야. 그들이 성장할수록 네가 더 불리해지니까.”

안재훈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뉴 월드를 운영하는지 알게 되자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단지 뉴 월드의 생명력을 더 연장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알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뉴 월드가 더 오랜 사랑을 받아야 안재훈에게도 유리하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뉴 월드를 통해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동안은 중국과 인도가 뉴 월드 경매장이나 거래중개소를 통해 많은 수익을 만들어 줬는데, 그게 반 토막이 나겠군요. 아니,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려나요?”

“그렇게 되겠지. 다행인 건 유럽이나 아시아, 아메리카 지역에서도 많은 관심이 쏠리면서 중국과 인도에 대항하는 유저들도 많아지고 있다는 거야.”

“한데, 이런 식으로 국가 간의 경쟁을 붙이면 좋지 않을 텐데요?”

“이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야. 돈이 되는 거라면 자국의 이익에 신경 쓸 수밖에 없어. 아무리 게임이라도 말야. 안재훈도 이미 그걸 알고 중국과 인도만 따로 뒤에 오픈을 한 거고. 중국과 인도의 사이가 좋아지면서 강력한 연합을 형성할 거라는 걸 알았던 거지. 기존의 유저들은 잘 합쳐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고.”

“6개월 이상의 시간을 좁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군요.”

“그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중국과 인도가 연합이 되어야만 했던 거야.”

“그런 것까지 미리 다 생각하고 뉴 월드를 시작했다고 하니 재수는 없지만 대단한 인간이네요.”

안재훈이 아무리 싫어도 인정할 건 인정했다. 상대를 인정할 줄 알아야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었다.

“자기 살 길은 유명하게 찾아내는 놈이지.”

“그 외에 또 어떤 행동을 할까요?”

“글쎄…….”

“제 독주를 막으려면 아무래도 부를 유저들과 나누는 환경을 만들려고 하겠죠?”

“그렇겠지.”

“그러면 토지를 누구나 소유할 수 있게 하거나 유저들도 귀족이 될 수 있게 하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야.”

“패치를 하되, 완전히 게임을 뒤엎는 수준은 안 된다는 거군요.”

“맞아. 어나더 월드를 만들 때부터 개발자나, 관리자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으니까. 아무리 안재훈이라도 판을 완전히 뒤집는 건 불가능해. 그래서 그가 유리하다고만 할 수 없는 거지.”

“앞으로 상당히 머리가 복잡해지겠는데요?”

“그렇겠지. 놈은 계속해서 머리를 굴릴 테니까. 하지만 초월 레벨까지 깨달았기 때문에 그다지 힘든 일은 없을 거야.”

“패치를 진행하면서 하이 레벨을 깨달을 수 있게 하면 낭패잖아요.”

“하이 레벨을 깨닫는다고 해도 쉽지 않아. 하이 레벨로 전환하면 다시 1부터 시작해야 하거든.”

“그래요?”

“그래. 초월 레벨과는 달라. 초월 레벨은 그 자체로도 이미 엄청난 능력을 가진 거기 때문에 레벨이 500부터 시작하지만, 하이 레벨은 달라. 기본 적인 능력치가 좋아지지만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밟아 가야 해. 물론 스텟의 이점이 있으니 시간이 지나날수록 이득이긴 한데, 500레벨이 되려면 엄청 오래 걸릴걸?”

“그건 그래요. 진짜 욕 나올 정도로 레벨 업이 힘들었으니까요.”

초월 레벨 상태에서 레벨 업이 더 힘들기는 해도 500부터 시작하니 위안이라도 되지만, 하이 레벨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상실감까지 가진 상태로 레벨 1부터 다시 해야 해서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하이 레벨을 적용하는 순간, 뉴 월드 수명이 급격히 단축돼. 안재훈이 선택하기에는 시기상조인 패치지.”

“흠.”

이서우는 안재훈과 함께 식사를 나누던 때를 떠올렸다.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안재훈은 끝까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잘 조절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도 ‘나 화났어’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재훈의 눈빛에서 광기도 보았다. 주체할 수 없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광기를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뉴 월드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이서우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었는데, 손규석의 얼굴이 마치 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갑자기 바뀌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젠장, 안재훈 이놈…….”

“대체 무슨 일…… 헉!”

손규석의 거친 음성에 이서우는 참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한데,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뜨는 게 아닌가.

이서우는 그 메시지를 듣고 너무 놀라서 튀어나올 듯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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