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
레벨이 갑이다
314화
-안녕하세요. 이서웁니다. 윤슬아씨 맞으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소연 누나에게 이야기는 들으셨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 전해 들었어요. 한데, 정말 전장의 지배자 님 맞으세요?
-네. 정 의심이 가시면 위치 보내 드릴 테니 제가 있는 곳으로 오시겠어요?
-네. 위치 알려 주세요.
-지금 보냈습니다.
-근처네요. 지금 갈게요.
-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서우는 귓속말을 종료하고 로비에 알렸다.
차 한 잔 정도 마실 시간이 지난 후, 윤슬아가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이서우가 머무는 곳이었는데, 온 도시를 다 볼 수 있어서 자주 애용하는 장소였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죠. 이서우입니다.”
“네. 윤슬아예요.”
“일단 여기 앉으시죠.”
“……네.”
윤슬아는 165센티미터의 키에 마른 체형이었다.
직업은 딱 봐도 힐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설아가 힐러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역시 4차 전직을 하셨네요.”
“할 게 이거 밖에 없으니까요.”
“실례지만 지금 몇 렙이세요?”
“710레벨이에요.”
“그러시구나. 제가 왜 슬아 씨에게 연락을 하려 했는지는 들으셨죠?”
“네. 한데, 정말 절 깨우실 수 있나요?”
“정민후라고, 이미 한 번 깨운 적이 있습니다.”
“정말요?”
“네. 저도 식물인간이었다가 깨어났고요.”
윤슬아는 두 손을 꼭 모으고 이서우를 쳐다보았다. 간절함을 얼마나 담으면 저런 눈이 되는지 모르지만 이서우가 본 그 어떤 간절함보다 더 강렬했다.
“일단 이걸 보시죠.”
“헐. 죽은 자도 살린다는 게 정말인가요?”
“네. 소생의 정수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죽은 지 1분에서 5분 안에 복용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죠.”
“그렇군요. 한데, 이걸 왜 저에게…….”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니까요.”
“네?”
윤슬아는 잘못 들었나 싶어 이서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
“저도 모든 걸 포기하고 죽었을 때 다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정민후도 이 정수를 아홉 번이나 복용하면서 시도해서 살아났고요.”
“아, 아홉 번이나 죽어야 하나요?”
“그건 저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소생의 정수는 넉넉하니 시도를 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현실에서 벌써 6년이 지났습니다. 가상현실에서는 26년을 보냈겠군요. 지겹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원래의 삶이 그립지 않습니까?”
“솔직히 전 오히려 이곳이 좋아요. 현실은 지옥이거든요.”
“윤슬아 씨가 깨어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어머님을 생각하셔야지요.”
“아! 어, 엄마…….”
윤슬아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곳에서 보낸 세월이 26년이다 보니 가족도 잊고 말았다.
한데, 하진우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리움이 폭포수처럼 밀려왔다.
이서우는 그녀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저희 어머니는 잘 지내시나요?”
“힘겹게 지내고 계십니다. 밤마다 슬아 씨가 깨어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를 만났나요?”
“저는 슬아 씨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들어와서 보지 못했지만 제 동료가 봤습니다. 하지만 슬아 씨를 깨울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슬아 씨가 결심을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이서우는 윤슬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맑았다. 가상현실 게임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녀의 눈은 청정수처럼 맑았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의 잔인함을 안 것이리라.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갈등하고, 깊이 고민을 했으리라.
“700레벨을 넘겼다면 골드도 많이 모았겠죠. 당신이 깨어나기만 한다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아!”
윤슬아는 이서우의 한마디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뉴 월드의 골드가 현금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남들과 달리 12시간 접속 제한에도 24시간 게임을 했다.
남들보다 레벨도 빨랐고, 많은 골드도 모을 수 있었다.
딜러를 했으면 더 많은 골드를 모았을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힐러를 했다.
이곳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다.
만약 그녀가 딜러를 했더라면 지금쯤 800레벨을 넘겼을지도 몰랐다.
“할게요! 도전하겠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오늘은 일단 이곳에서 쉬고 계시고, 내일 대규모 패치가 끝난 뒤에 어머님과 상의를 해서 날짜를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깨어나면 직접 들을게요. 아, 영상 하나만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어머님께 보여 드려야 안심을 하실 테니까요.”
“네!”
희망이 생기자 윤슬아의 슬퍼보이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이서우는 윤슬아가 찍은 영상을 가지고 접속을 종료했다.
‘이건 내가 직접 전달을 해야겠네.’
이서우는 직접 윤슬아의 어머님을 만나려했다.
“어머, 오빠. 일찍 나왔네?”
“이야기가 잘됐거든. 내일 내가 직접 영상을 가지고 찾아가 보려고.”
“오빠가 직접?”
“경험자가 직접 가는 게 아무래도 낫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나도 같이 갈게.”
“그래.”
“그럼 오늘은 같이?”
이설아의 미소에 이서우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를 끝낸 이서우는 이설아와 함께 뜨거운 밤을 보냈다.
* * *
다음 날, 이서우는 박 대표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는 이설아와 함께 새벽부터 K사를 나와 윤슬아의 어머니가 일하는 곳으로 갔다.
그녀의 어머니가 일하는 곳은 허름한 상가 건물이었다. 손님들이 오기 전에 새벽같이 청소를 해야 하기에 그녀의 아침은 누구보다 빨랐다.
약속도 없이 찾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신축 건물들은 대부분 편하게 청소가 가능하지만 오래된 건물은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허름한 상가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니 윤슬아의 어머니가 계단을 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누, 누구세요?”
윤슬아의 어머니는 갑자기 낯선 남자가 나타나자 경계의 빛을 보였다. 같이 있던 이설아가 아니었으면 그녀는 비명을 질렀을지도 몰랐다.
“따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다, 당신 누구야! 내, 내 딸은…….”
윤슬아의 어머니는 갑자기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악착같이 참아 왔는데, 6년의 세월이 지나 잊glf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시계는 6년 전, 딸이 식물인간이 된 그날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서우와 이설아는 그녀가 진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조용히 동영상을 재생했다.
20인치 사이즈가 넘는 홀로그램에서 자신의 딸이 나오자 윤슬아의 어머니 한명숙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잡으려 했다.
홀로그램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었지만 더 이상 잡으려 하지 않았다. 손이 닿으면 딸의 얼굴이 가려지니 참는 것이다.
말라 버렸던 한명숙의 가슴에 뜨거운 불꽃이 일어났다.
바짝 마른 장작이 순식간에 타듯 그녀의 가슴 또한 순식간에 거대한 불꽃으로 채워졌다.
“내 딸, 내 딸 슬아를 깨울 수 있다고요?”
“네. 저 또한 5년 동안 식물인간이었다가 깨어났습니다.”
“설마, 당신이……?”
“네. 제가 바로 처음 깨어난 이서우라는 청년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정민후라는 사람도 깨어났고요.”
“봤어요. 두 분 다 봤어요! 기사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요. 제발, 제발 내 딸도 깨어나게 해 달라고요. 제발 내 딸도…….”
결국 그녀는 애써 훔쳤던 눈물을 다시 놓고 말았다.
이서우와 이설아도 그녀의 간절한 마음에 덩달아 눈물이 흘렸다.
6년의 시간 동안 얼마나 딸을 기다렸을까.
이서우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머니, 한정옥 여사를 봤다.
“반드시 깨어날 수 있어요. 제가 그렇게 해 드릴게요.”
“정말, 정말 깨어날 수 있나요?”
“네. 이미 경험을 했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따님도 제게 부탁을 했고요.”
“한데, 전 돈이…….”
“돈을 받자고 온 게 아니에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마시고, 따님에게 가시죠.”
“네? 네!”
한명숙 여사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딸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가는 내내 한명숙은 들뜬 기분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한명숙은 동의서를 작성하고 딸이 있는 곳으로 왔다.
글로벌사의 배려(?)로 다행히 윤슬아는 1인실에 있었다.
미리 박 대표에게 부탁을 해서 접속 베드를 갖다 놓았기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 이건. 이 망할 물건은 왜…….”
“괜찮아요. 이건 제가 사용할 물건이고, 이게 있어야 슬아 씨가 깨어날 수 있어요.”
“죄송해요. 그것도 모르고.”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걸 보면서 많이 겁을 냈습니다.”
이서우도 처음에는 뉴 월드 접속을 꺼렸다.
빚을 갚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접속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서우는 뉴 월드를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럼 접속을 할게요. 설아야, 부탁해.”
“응. 염려 마.”
“이번에는 2분 이상짜리를 이용할 거라서 여유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는 마.”
“응.”
이서우는 당부를 하고 접속 베드에 누웠다.
이미 박 대표를 통해 병원 측과 이야기도 다 끝났고, 밖에는 경호원들이 이서우를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이서우가 접속하자 윤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지금 곁에 계세요. 힘내시고, 시작할게요.”
“……네.”
이서우가 대검을 꺼내자 윤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냥을 하면서도 죽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조심스럽게 행동했는지 모른다. 한데, 지금은 일부러 죽으려 하고 있었다.
“갈게요.”
“네.”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도저히 볼 수 없어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리고 곧이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었다고 느끼는 순간, 윤슬아는 생명력을 모두 잃고 쓰러졌다.
700레벨이 넘어서 칼질 한 번에 죽지는 않을 거라 여겼는데, 착각이었다.
1분 30초가 지나도 변화가 없었다.
그때 외부에서 메시지가 왔다.
이서우는 즉시 윤슬아에게 소생의 정수를 먹였다.
콜록, 콜록.
윤슬아는 기침을 하며 상체를 벌떡 세웠다.
“괜찮으세요?”
“네? 네. 네? 아, 아뇨.”
죽다 살아난 윤슬아는 정신이 없는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한 번에 성공하기를 바랐는데, 실패군요.”
“저도 한 번에 성공했으면 했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성공할 거예요.”
“그럴까요?”
“솔직한 대답을 원하세요?”
“아, 아니에요. 그냥 다시 해 봐요.”
“네.”
이서우의 솔직한 모습에 윤슬아는 약간이지만 긴장이 풀렸다.
다시 대검을 잡은 이서우가 윤슬아의 앞에 섰다.
“갈게요.”
“네? 네. 아! 저기, 살살해 주세요.”
“최대한 부드럽게 해 드릴게요.”
한 번 고통을 겪으니 오히려 두 번째가 더 힘들었다.
윤슬아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풀썩.
윤슬아가 쓰러지자 이서우는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1분이 지났을 때 메시지를 받았다.
“됐어!”
메시지가 일찍 와서 설마 했는데 두 번째에 바로 성공했다.
이서우는 서둘러 접속을 종료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의료진이 달려와 윤슬아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성공할지 몰랐는데, 정말로 윤슬아가 깨어났다.
담당 의사는 몇 가지 검사를 해 봐야겠다며 윤슬아의 혈액을 뽑았고, 3D 스캔까지 했다.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지만, 모든 게 정상이라고 했다.
물론 보통 사람처럼 걸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깨어난 것만으로도 한명숙은 너무 감사했다.
“어, 엄…….”
“윤슬아 환자, 아직은 말을 할 수 없을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슬아야. 엄마는 괜찮으니 의사선생님 말씀 들으렴.”
“…….”
“고맙다.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딸.”
윤슬아와 한명숙은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서우와 이설아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기다렸다.
“아이고, 제가 무례를 했네요. 이렇게 고마우신 분들을 세워 두고.”
“아닙니다. 저희는 윤슬아 씨가 깨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니에요. 제가 더 고맙죠.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한명숙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자 이서우가 얼른 그녀를 바로 세웠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운이 좋아 연장한 목숨입니다.”
“아니에요. 그래도 그건 도리가 아니죠. 정말 고맙습니다.”
한명숙이 다시 허리를 숙이자 이서우는 더 이상 그녀를 막지 않았다.
상대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 그냥 지켜보았다.
모든 상황이 끝나고 이서우는 한명숙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나왔지만 경호원과 이서우를 돕는 몇몇 사람들은 병원에 남았다.
“아직 시간은 좀 있지?”
“응. 운동하게?”
“몸이 근질근질하네.”
“3시간 정도 있으니 갔다 와. 나도 요가 좀 하고 있을 게.”
“조금 있다가 봐.”
“응.”
이제는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어색했다.
과거처럼 하루에 5시간씩 하지 않아도 되지만 1시간 이상은 꼬박꼬박 운동을 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자 이설아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식으로 아침을 먹은 두 사람은 드디어 접속 베드로 갔다.
“이제 끝났겠네.”
“응. 서버 다운 없이 재접속만 하면 되니 지금 들어가면 끝나있을 거야.”
“어떻게 변했나 볼까.”
“들어가자마자 영웅 포인트 때문에 피 터지는 싸움이 시작되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가자.”
“응.”
접속 베드에 누워 접속 과정을 거치자 뉴 월드 세상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