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레벨이 갑이다
318화
“요즘 서우 바쁘네?”
“응. 족장 놀이에 엄청 몰입해 있거든.”
“그게 그렇게 재밌나?”
“건물을 짓고, 업그레이드를 시키고, 사람들이 방문해서 구경하고, 그 모든 과정이 재밌나 봐. 게다가 족장 등급이 높아지면 더 좋은 건물로 바꿀 수 있어서 매력 있고.”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딱 서우가 그렇네.”
“심시티 같은 게임을 한 번쯤은 다 해 보니 보통은 재미가 없을 텐데, 언니 말 대로 날 새는 줄 모르는 것 같아.”
하루에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시간이 꽤 남는데, 족장 메뉴에 빠진 이후로는 이서우와 함께 길게 대화 나누는 것조차 힘들었다.
식사도 같이 하고, 20~30분 정도 대화를 나누니 무조건 불평만 할 수는 없어 지켜보는 중이었다.
“뭐, 그 덕분에 너랑 나랑 대화 많이 하잖아.”
“언니, 난 여자 취미 없다고!”
“이것아, 나도 여자는 싫거든!”
김소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장난이라는 걸 알기에 이설아도 웃었고, 김소연도 마주 웃었다.
“그나저나 언니. 요즘은 뉴 월드 말고는 조용하지 않아?”
“그러게. 시끄러워야 하는데, 너무 조용하니 오히려 기분이 안 좋아.”
“와, 진짜? 나도 딱 그런 기분인데. 마치 폭풍이 오기전 고요한 상태라고나 할까.”
“어후,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 그러다 진짜 폭풍이라도 몰아치면 어쩌려고.”
“오빠랑 같이 해쳐나갔는데, 뭘.”
“너 완전히 서우에게 빠졌구나.”
“그러는 언니도 종명 오빠에게 푹 빠졌잖아. 만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살림 차리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아, 아니야. 사, 살림은 무슨!”
“어라, 그냥 해 본 소린데 반응이 수상하네. 언니, 설마…….”
이설아도 눈치 하면 일가견이 있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내고야 만다.
매의 눈으로 김소연을 바라보자 뜨끔했는지 한숨을 깊이 쉬더니 말했다.
“사실, 종명이가 먼저 프러포즈하더라고.”
“어머, 벌써 프러포즈까지 한 거야?”
“뭐, 사실 거의 일주일의 반은 같이 지내니 결혼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식을 올리는 건 다르잖아.”
“그렇지. 다르지. 근데, 언니 표정을 보니 아직 대답은 안 한 것 같네.”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어. 그때 대답한다고.”
“언니도 종명 오빠 좋아하잖아.”
“완전 좋아하지. 내 인생에 그런 남자는 다시없을 정도로.”
“그러면 됐네, 뭘.”
이설아는 부러운 눈으로 김소연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부러움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지 김소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서우에게 프러포즈 받고 싶구나?”
“아, 아니야. 내, 내가 무슨!”
“당황하는 것 좀 봐. 그러고 보니 너희 1년 다 돼 가지?”
“아직 1년은 멀었어. 10개월 정도 지났네.”
“그 정도면 1년 다 돼 가는 거지. 뉴 월드에서 보낸 시간까지 하면 4년은 된 것 같겠다.”
“뉴 월드에서 보낸 시간까지 포함하면 그렇지.”
이설아는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현실에서보다 뉴 월드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은 게 별로인가 보네.”
“그렇지는 않아. 뉴 월드에서도 같이 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데. 난 그냥 오빠랑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좋아.”
“그건 나도 그래.”
두 사람은 동시에 머릿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절로 미소를 지었다.
“큭.”
“쿡.”
미소를 짓다가 마주 보았는데,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우리 참 바보 같다. 그치?”
“그러게. 하지만 기분은 좋잖아.”
“맞아. 나도 오랜만에 기분이 상쾌하네.”
“솔직히 난 언니가 부럽다. 프러포즈도 받고.”
“넌 서우에게 프러포즈 받으면 바로 수락하겠다?”
“당연하지! 그런 기회가 어디 있다고!”
“여자는 좀 튕겨야 되는 거 아냐?”
“어휴. 튕기긴 뭘 튕겨. 난 밀당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
“하긴 넌 누가 봐도 서우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게 티가 나.”
김소연은 처음 봤을 때부터 이설아가 이서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꾸밈이 없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하달까.
“언니, 설마 여자는 좀 튕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한 거 아냐?”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맞구만. 그러다가 진짜 좋은 사람 놓친다.”
“가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난 우리 오빠가 다른 여자랑 사랑을 나누고, 같이 사는 건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데. 언니는 괜찮은가 봐?”
“그렇게 말하니 나도 기분 나쁘긴 하다.”
“거 봐. 기분 나쁘잖아. 그냥 언니 마음에 솔직해지면 돼. 그게 최고라니까.”
“그럴까?”
“그럼. 나도 남자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은 없었는데, 한결 같은 오빠의 모습에 안심이 되더라.”
“한결 같은 마음?”
“응. 오빤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잖아. 자기가 한 말은 꼭 지키고.”
“그게 한결 같은 마음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오빠가 그랬거든. 날 끝까지 지켜 주겠다고. 그거면 된 거 아냐?”
“날 부러워할 게 아니라 내가 널 부러워해야겠는걸?”
김소연은 이틀 내내 류종명의 프러포즈 때문에 고민했다.
받아들이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은 너무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선 듯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한데, 이설아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프러포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민수도 했더라.”
“와, 진짜?”
“응. 아주 화려하게 했더라고.”
“그래서? 유진 언니는 수락했어?”
“수락했더라고. 단번에 했다던데?”
“그 커플이 제일 늦었는데, 제일 빨리 결혼하겠네.”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더라.”
“벌써 날짜 잡힌 거야?”
“상견례도 안 했으니 아직은 안 잡혔어. 한데, 두 사람 다 부모님들이 워낙 개방적이셔서 그냥 둘이 알아서 하라고 하셨나 봐.”
“하긴 요즘은 뭐 각자 알아서 하는 추세니까.”
15년, 아니 10년 전만 해도 결혼은 집안끼리 행해지는 일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문제가 점점 커져 가다 보니 젊은이들이 크게 반발했고, 요즘은 각자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아직까지도 절차니 뭐니 하는 것을 따지는 집안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남자든, 여자든 그런 집안과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해서 거의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결혼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혼인신고 전과 후가 다른 남자도 있었고, 여전히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여자 문제부터, 술, 성격 차이 등 갈등은 여전했다.
물론 여자들도 문제가 많았다. 빚이 있는데도 속이는 경우도 있고, 혼인 사실을 숨기거나, 심지어는 아이가 있는데도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과거와 다른 건 고부간의 갈등이 많아 사라져서 그로 인해 이혼하는 경우가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점이었다.
경제 상황도 좋아지고, 최근에는 정책이 잘되어 있어 아이를 낳는 분위기여서 결혼에 대한 인식도 많이 좋아졌다.
아이를 낳으면 남자도 여자도 각각 2년씩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다. 무조건 써야 하는 것이어서 회사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만약 회사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엄청난 페널티가 있어서 임신 소식만 전해지면 얼른 쓰라고 난리였다.
복직은 하더라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기 때문에 아이 키울맛 난다며 엄마들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아빠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져서 육아는 같이 하는 거라며 아이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다.
급여도 100퍼센트 다 나오기 때문에 2명 이상 키우는 가정이 많았다.
K사의 대우는 다른 곳과 비할 바가 아니라서 박민수와 하유진이 결혼을 하면 집도 주어지고, 신혼 휴가 6개월도 바로 쓸 수 있었다.
아이를 가지면 출산휴가 1년 6개월을 쓸 수 있고, 육아 휴가는 따로 3년을 쓸 수 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인 만 3세까지는 부모와 함께 지내는 게 좋다는 인식이 강해서 부부가 같이 3년을 쓸 수 있었다.
여성은 총 4년 6개월, 남성은 3년을 가정에 충실히 하면서도 급여는 급여대로 다 받으니 이만큼 좋은 회사가 없었다.
그 긴 세월을 연속해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임신부터 두 돌이 될 때까지는 연속해서 쓸 수 있어서 여자의 부담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두돌이 지나면 어린이집에 보내면 되니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게 가능했다.
그야말로 꿈에서나 나올 만한 일이어서 서로 K사에 취업을 하려고 난리였다.
“날짜가 언제 정해질지 궁금하네.”
“왜? 언니가 먼저 가게?”
“난 아직 대답도 못했는데 뭘. 뭐, 또 모르지. 진짜 내가 먼저 가게 될지도.”
“피. 역시 그래도 생각은 있네.”
“뭐, 나라고 생각 없겠어. 나도 종명이를 많이 사랑하는데.”
“와, 우리 언니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도 다 나오고. 오래살고 볼 일이네.”
“됐고. 만약 내가 결혼하면 뭐 해줄 건데?”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지. 전용기라도 한 대 사 줘?”
“헐. 됐거든. 넌 서우랑 같이 있더니 애가 통만 커졌네.”
“사랑하는 사람은 닮는다잖아.”
“이러다 너희들이 먼저 가겠다.”
“누가 먼저가든 뭐 어때?”
“그래. 누가 먼저 가든 축하해 주면 되지.”
이설아는 김소연이 조금씩 마음을 정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 다고 곧 좋은 소식이 또 들릴 것 같았다.
“어쨌든 경사는 경사네. 민수 오빠 결혼한다는 거 오빠한테도 알려 줘야겠네.”
“말 잘해 봐. 서우도 눈치가 있는데, 네가 잘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럴까?”
“그럴걸.”
이설아는 상상만 해도 행복한지 두 뺨이 발그레 물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왜?”
“안재훈 때문에.”
“그 사람이 왜?”
“오빠 성격상 그 인간을 해결 못 하면 프러포즈는 안 할 걸?”
“에휴. 그 인간은 여러 가지 귀찮게 하네. 김승조가 그냥 털어놓으면 만사 오케인데. 무조건 시인하고 감옥에 처박혔으니.”
“김 과장님에게서 별다른 말은 없어?”
“풍진양을 건드려서 안재훈을 흔들어 보려 했는데, 의외로 멘탈이 강한가 봐. 좀처럼 안 걸려든대. 오히려 풍진양이 초조한가 보더라.”
“풍진양이? 그 사람도 죄를 지었나. 아, 동생 일?”
“응. 아마 그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오빠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신경도 안 쓰고 있는데, 혼자 그러나보더라고.”
“잡히라는 고기는 안 잡히고 쓰레기만 건져 올라오는 상황이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열심히 안재훈을 씹어댔다. 호흡이 잘 맞는 여자 한 명만 더 있었으면 끝없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으리라.
한참 안재훈에 대해 이야기 하던 이설아는 다시 화제를 바꾸었다.
“참, 언니, 슬아 씨 있잖아.”
“슬아 씨가 왜?”
“연락이 왔던데. 우리랑 같이 뉴 월드 하고 싶다고.”
“재활훈련에 매진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한데, 생각보다 빨리 몸이 회복되고 있대.”
“뭐? 벌써?”
“응. 오빠도 6개월은 걸렸다는데, 슬아 씨는 벌써 힘이 붙나 봐. 이 상태라면 오빠보다 2배는 빨리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진행이 빠르네.”
“병원에서도 놀라고 있나 보더라고. 이것저것 검사해 보자는 거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거든.”
“잘했어. 검사한다고 나오는 것도 아닌데, 해 봐야 뭐하겠어. 그럼 슬아 씨에게도 부작용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건가?”
“그건 오빠랑 한번 상의해 볼게. 당사자여서 그냥 묻어두고 같이 지낼 수도 없으니까.”
“아마 이야기를 꺼내긴 해야 할 거야. 나중에 알면 배신감 느껴질 테니.”
“몸부터 좀 낫고 나면 이야기해야지. 괜히 지금 말했다가 충격받으면 회복에도 안 좋으니까.”
이설아는 보통 사람처럼 행동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서우가 나오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을 할 것이다.
* * *
“서, 서우 씨.”
“슬아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 그게. 상의 드릴 게 있어서요.”
“대체 무슨 일이신데 표정이 그리 창백하세요?”
“제, 제가 아무래도 이, 이상한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의사들이 회복이 너무 빠르대요. 저, 어떻게 된 거죠?”
“…….”
이서우는 윤슬아가 무엇 때문에 무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걸 말해야 하나.’
이서우는 부작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아니지. 슬아 씨는 좋은 방향으로 몸이 바뀔 텐데.’
이서우는 자신과 정민후의 경우처럼 윤슬아도 더 나은 방향으로 몸이 바뀔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저기, 슬아 씨, 혹시 어떤 변화가 왔는지 말해 주시겠어요?”
“그, 그게. 제 몸에 너무 힘이 넘쳐요. 식물인간으로 6년을 있었는데, 이건 비정상이잖아요. 서우 씨, 저 너무 무서워요.”
슬아는 흐느껴 울며 이서우에게 안겼다.
다행히 이 구역에는 이번에 새롭게 건물들을 짓기 위해 따로 비워 둔 곳이어서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이서우는 얼른 그녀를 떼 놓았다.
“걱정 마세요. 저도 같은 경험을 했으니까요. 계속해서 몸이 좋아져서 운동선수보다 훨씬 강해질 거예요.”
“저, 정말인가요?”
“네. 그러니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휴우, 다행이에요. 전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힘들 게 깨어났는데, 또 이상이 생겨…….”
“안 좋은 생각은 마시고, 재활훈련에 힘쓰세요.”
“네. 고마워요. 서우 씨 덕분에 안심이 돼요.”
“별말씀을요. 그럼 재활훈련을 끝내시고 그때 다 같이 봐요.”
“네. 고마워요, 서우 씨.”
윤슬아는 이서우의 확신에 찬 말에 그제야 안심을 하고 돌아갔다.
이서우도 잠시 중단했던 족장 놀이에 다시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서우는 너무 일에 집중한 나머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며 촬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