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43화 (43/325)

# 43

엄마야...

양 대리의 책상 위로 카드 두 장을 내려놓았다.

“행사 준비는 이걸로 진행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설마 부장님, 차장님 카드는 아니죠?”

“다음주 화요일까지 반납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우와...”

양 대리는 의자 등받이 깊숙하게 몸을 넘기며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셨길래...”

“지출내역은 다 뽑아주셔야 됩니다, 그래도.”

“그야 당연한 거고요.”

“그럼 저 먼저 퇴근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저도 이것만 정리하면 바로 퇴근...아참, 오늘 데이트 있다고 안 하셨어요?”

“네. 그렇지 않아도 조금 늦었습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미련해. 이거야 내일 해주셔도 되는 건데...”

“그럼 나머지는 양 대리님이 향은 씨하고 같이 마무리 좀 해주세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보세요. 이번주는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와 엘레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강혜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 늦을 것 같다고.

-괜찮아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 저도 이제 막 나왔어요.

“지금 어디세요?”

-은행 앞이요. 근데 사거리 대한생명 앞에서 기다릴게요.

“5분 정도 걸릴 거 같습니다.”

약속 장소에서 강혜선을 차에 태워 첫 번째 받은 신호에서 크게 유턴을 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같이 저녁 먹기로 했잖아요.”

“그니까 어디에서 먹냐고요.”

“강이 보이고.”

“강이 보이고?”

“날이 어두워지면 그 강은 사라지지만, 대신 멋진 서울 야경이 살아나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마포쪽은 거의 갈 일이 없는데, 장향은이 너무 강력하게 추천을 하는 집이어서 도전을 안해볼 수가 없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운치가 있고, 날씨가 맑으면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분위기를 연출해주는 집이라나 뭐라나.

예약까지 장향은이 직접 해줬다.

멀리서 보면 그냥 빨간 벽돌 일반 주택이다.

물론 레스토랑으로 바뀌기 전엔 실제로 누군가가 가정집으로 사용을 했을 것이고.

그런데 실내 모든 벽을 트고 유럽식 세팅을 끝낸 테이블 몇 개를 위치시켜놓는 것 만으로도 뷰와는 상관없이 상당히 이색적이고 또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창가쪽 자리로 안내를 받는 운까지 더해졌다.

“흐음...”

강혜선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레스토랑 실내를 한 번 스윽 훑어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떠세요? 분위기 마음에 드세요?”

“네, 너무 좋네요. 예뻐요. 와인잔도 예쁘고, 앞접시도 상당히 고급스럽네요. 그런데 이 동네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예약을 하셨어요?”

“저희 팀에 취미생활로 맛집 블로그 활동을 하는 직원이 한 명 있어요. 오늘 혜선 씨랑 데이트를 한다고 하니까 여길 한 번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비싼집 같아 보이네요. 당연히 비싸겠죠?”

“네, 뭐...”

“이런 곳을 다니면서 블로그 활동을 할 정도면 취미생활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하는 거겠네요?”

“소소하게 부업삼아 하기엔 괜찮은 모양이더라고요. 저희는 유럽 출장이 잦잖아요. 자연스럽게 회사 돈으로 파리, 마드리드, 제네바, 밀라노, 피렌체 등을 다니면서 여기저기 맛집들을 가볼 기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레스토랑과 음식 사진을 찍어서 블로그 활동을 했던 모양인데, 그렇게 꾸준히 한 몇 년 정도 하다보니까 국내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협찬도 들어오고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아...”

난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데려간 레스토랑을 강혜선이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가 시작되고, 에피타이저로 야채 새우찜과 하몽 샐러드가 나왔을 때 강혜선이 이런 말을 한다.

“혹시...아직 제가 불편하세요?”

“아뇨?”

신경써서 이곳까지 데리고 온 나의 예상과는 달리 강혜선의 반응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거 같았다.

“왜 그런 걸 물으세요?”

“저는 은태 씨와 좀 더 편한 사이가 되고 싶거든요.”

“저는 혜선 씨가 불편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요?”

“지난주 금요일에도 한우 먹으러 가고, 일요일엔 대게. 그리고 오늘은 이런 고급 다이닝 레스토랑...저는 이런 비싼 식당도 당연히 좋지만 가끔씩은 몰라도 계속 이렇게 오는 건 좀 부담스럽네요. 순대국, 칼국수, 감자탕, 돈가스, 떡볶이, 어묵...그런 거도 은태 씨랑 같이 먹으러 다녀보고 싶거든요.”

“아우...좋죠, 순대국. 혹시 돼지국밥 드셔보셨어요?”

“부산 사람들은 돼지국밥이라면서요?”

“그럼요. 다음에 언제 같이 부산 내려갈 일 있으면 제가 돼지국밥이란 뭔가, 돼지국밥의 진수를 한 번 소개시켜드릴게요.”

그렇게 장난기를 섞어 분위기를 살짝 풀어놓고 강혜선에게 말했다.

“제가 계속 이런데만 가자고 하니까 불편하세요?”

“불편하다기 보다는...좀 걱정이 되네요, 아무래도. 두 사람 코스로 22만 원이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저 그렇게 막 돈 쉽게 쓰는 사람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물론 혜선 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유가 가장 크겠죠? 그런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요. 저 그때도 한 번 말씀드렸는데...10년이 넘게 연애라는 감정과는 담을 쌓고 살았어요.”

“...”

“진짭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생겼나요?”

“푸흡...그렇게 훅 들어오기 있어요?”

“진짜 10년 동안 연애 한 번 못해본 남자처럼 생기긴 생겼나보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부모님으로부터 아무런 지원없이 혼자 시작한 서울 생활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현재는 혼자 힘으로 원룸 전세까지 구하셨고. 아무리 대기업에 다닌다지만, 현실적으로 6,7년 만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현재 살고 계신 동네에 원룸 전세를 구했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사셨다는 증거잖아요. 연애할 틈도 없이.”

“상당히 민망하네요. 아파트 전세를 구한 것도 아니고...”

“따로 나와 살면서 부모님 용돈까지 꼬박꼬박 챙겨드리고, 거기에 연애까지 하고...그러면서 1년에 천만 원 이상 모은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봐요.”

“그러니까요.”

“뭐가요?”

“저라고 왜 연애를 안하고 싶었겠습니까? 정신적, 금전적으로 여건이 안됐다 뿐이지, 저도 꾸준히 연애는 하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걸 꾹 참고 지금까지 억척스럽게 일만 하면서 이 나이를 먹은 거죠.”

하몽 한 조각을 앞접시 위로 올려놓고 나이프로 절반을 잘라 입 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와인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궈놓고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레스토랑에서도 데이트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서른 중반 즈음에 결혼을 상대로 만나는 여자가 생긴다면 말이죠.”

“흐음...”

“물론 삼겹살도 좋아하고 포장마차 분위기도 무척 좋아합니다. 자주 가요. 하지만...”

“제가 괜히 분위기 파악을 못했네요. 미안해요. 기껏 신경 써서 이런 완벽한 레스토랑까지 예약을 하셨는데, 제가 초를 치는 소리를 해버렸네요. 그것도 식사 중에.”

“아뇨, 오히려 이런 걱정을 해주는 상대와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지난 몇 주간 은태 씨 혼자 데이트 비용을 너무 많이 쓰신 거 같아요. 제가 계산을 하겠다고 해도 못하게 말리시고. 금요일엔 같이 감자탕 먹으러 가요.”

“좋죠. 떡볶이도 먹으러 가고, 짜장면도 먹으러 가고...다 좋죠. 뭔들 안 좋겠습니까.”

오늘은 내가 로또에 당첨이 됐다는 걸 고백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강혜선을 만난 거다.

정식으로 만난 건 한 달 정도밖에 안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전제로 시작한 만남이어서 그런지,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결혼에 대한 확신이 강해지고 있었다.

꼭 강혜선과 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로또 당첨을 고백하기엔 아직 너무 성급한 게 아닐까, 그래도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하는 생각들 때문에 조심스러웠고.

그런데 지난 일요일날 조금은 더 구체적인 결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금껏 서로가 모아둔 결혼자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예 평생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지 않을 거면 이쯤에서 로또 당첨 사실을 알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혜선은 현재 서로가 모아둔 돈으로 남자가 집, 여자가 혼수...이런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집과 혼수를 해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거 같은데, 여기서 말할 타이밍을 한 번 더 늦춰 나중에 로또 당첨 사실을 말해버리면, 충분히 기분 좋게 서프라이즈를 해줄 수 있는 재료로 자칫 강혜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낼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강혜선은 나에게 자신의 모든 걸 다 깠는데, 그리고 자기보다 부족하게 모아놓은 나의 결혼 자금까지 충분하다 말해주는 사람인데, 어쨌든 난 결론만 놓고 보면 그런 강혜선을 상대로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음이 불편했다.

어쩌다보니 내가 강혜선에게 말한 나의 환경, 배경은 거짓말이 되어가고 있었다.

로또 당첨만 빼면 모든 게 진실인데, 로또 당첨을 뺄 수는 없는 거니까.

서서히 살아나는 야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디저트로 나온 수제 티라미수를 티스푼으로 잘라 먹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기...혜선 씨.”

“네.”

“저 고백할 게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대치동쪽에...”

“네.”

“제가 살 때는 14억 조금 넘게 주고 샀는데, 당시 제가 살 때도 실거래가만 놓고 보면 16억 선에서 거래가 되던 제 명의로 된 아파트가 한 채 있습니다. 급매로 나온 물건이라 실거래가 보다 많이 싸게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팔 수는 없지만, 당장 판다고 해도 16억 이상은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네? 뭐, 뭐, 뭐, 뭐가 있다고요?”

“대출같은 건 없으니까 아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강혜선은 두 눈만 감았다 뜨길 반복할 뿐이었다.

“제가 부동산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앞으로 전망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격이 오르면 올랐지 떨어질 집은 절대 아니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하시는 거예요?”

“현재 월세를 돌리고 있습니다. 한달에 240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혜선 씨만 괜찮다고 하시면 현재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있는 사람 월세 계약이 끝나더라도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가 살기 보다는 계속 다른 사람한테 월세를 놓으면서 고정적인 수입을 확보하고 싶습니다. 우린 지난주에 이야기 했던대로 현재 우리가 가진 돈을 합쳐서 그 돈에 은행 대출을 조금 받아서 회사 근처 괜찮은 신축 빌라 같은 곳에 전세를 얻어 들어가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아니...자, 잠깐만요, 은태 씨. 잠깐만...대치동에 뭐가 있다고요? 은태 씨 명의로 된 아파트가 있다고요? 어떻게?”

“네. 14억짜리, 아니 실거래가 16억짜리 제 명의로 된 아파트가 한 채 있습니다.”

“엄마야...”

강혜선은 너무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입을 가려놓고 토끼눈을 떴다.

“그러니까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도 종종 하면서...그렇게 즐기면서 준비해도 될 거 같습니다, 우리 결혼.”

“...”

“우리 결혼하는 거 맞죠?”

여전히 토끼눈을 한 채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던 강혜선.

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여러차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외로 부동산이나 금융상품...이런 재테크 쪽에 무지합니다. 다른데 한눈 팔 여유가 없죠. 그만큼 회사 일에만 올인을 했으니까 회사로부터 인정이라는 걸 받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그 중 한 명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월급받는 건 참 잘하는데, 그 월급을 굴리는 건 전혀 못합니다. 하지만 혜선 씨는 은행 생활을 오래 하셨으니까....”

“...”

“처음으로 결혼을 하고 싶은 상대를 만났는데, 그 상대가 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혜선 씨라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둘 다 혼기가 찬 상태에서 만났기 때문에 애틋함을 주고받을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현실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더 편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스킵하고 그냥 건너뛸 수 밖에 없는 다른 감정들은 함께 살아가면서 천천히 다 채워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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