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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60화 (60/325)

# 60

미안합니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나이 많은 골드미스 여실장들을 상대로 영업일이란 걸 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뇌구조 한 곳에 진한 섹드립이 장착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일종의 영업 준비물처럼.

그런데 몰랐다.

진짜 몰랐다.

강혜선은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거지, 그 수위를 항상 아슬아슬하게 생각해오고 있었다는 걸.

홍성에 입사를 하고 섹드립이 난무하는 현장에 처음 들어갔던 난 여기가 어디고, 또 난 누구인지 상당히 혼란스러워 했었다.

특히 실장들을 다 초대해서 한 번씩 열어주는 연회 자리는 섹드립 천국이다.

그리고 백화점 여실장들을 상대로 영업현장에 뛰어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그 혼란스러운 환경에 적응을 하게 됐던 거지.

그러면서도 다시 회사로 돌아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고.

우리가 상대하는 건 남자에 굶주린 골드미스 여실장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영업맨으로 커가면서 내겐 여러가지 다양한 얼굴, 인격이 자리잡히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진짜 큰 실수를 한 게 강혜선이 너무 편해져버렸다는 거다.

나에겐 이런 모습도 있고, 또 저런 모습도 있다는 걸 다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 모두를 이해받고 싶었던 거 같다.

나도 내가 왜 그런 의미없는 욕심을 품게됐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미안해.”

커피숍.

차를 팔고 그 돈으로 신혼집에 필요한 이걸 사고, 또 저것까지만 장만하자...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엉뚱한 타이밍에 막상 해놓고도 아차싶은 아재 섹드립을 치게 된다.

내 딴에는 그런 드립이 재밌다고 느꼈던 모양이지.

아차싶었던 만큼, 강혜선이 그냥 웃어넘겨주길 바랐던 마음이 커져가고 있었다.

쎄한 정적이 흐를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강혜선이 정색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뒤 뭔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아까 말했죠,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거 같다고.”라는 말을 한다.

촤악!

차가운 물 한바가지를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그 전까지는 분위기가 좋았으니까.

내 딴에는 편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는데, 그 편함이 강혜선에게는 불편함이었다.

내가 싸질러 놓은 천박한 섹드립이 내 진심 마저 천박하게 만들어놓고 있었다는 걸 느낄 땐 이미 늦었다.

강혜선이 자신의 인내심의 끝을 얼굴에 걸어놓는 순간,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자꾸 그러니까 사람이 달라보이잖아.”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살얼음에 찌지직...금이 가는 것처럼 그동안 좁혀놓은 강혜선과의 거리에 틈이 생기게 됐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명백한 실수였고, 잘못이었으니까.

그리고 멍청해빠진 스스로를 원망한다.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고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강혜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내겐 완벽한 상대다.

그런 상대를 조금이라도 더 내 것으로 만들어보겠단 의미없는 소유욕.

그 소유욕이 오히려 더 거리를 만들어놓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난 내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실은 아까...집에서도 당신이 서비스, 팁 어쩌구저쩌구 할 때 소름 돋았어요. 이건 좀 아닌 거 같다는 말을 해주려다가, 괜히 당신 기분 망칠 거 같아 참았는데...나는 있잖아요.”

얼굴이 화끈거려서 쥐구멍이라도 있음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은 당신이 날 배려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직 시간 많잖아. 그런 농담은 나중에 결혼해서 애 한둘 정도 생기고 난 뒤에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주고받아도 되지 않나?”

“...진짜 미안. 실수였어.”

“그러니까요, 그런 실수를 안할 만큼만, 딱 그 만큼만 배려해주고 또 배려받는 연애를 하고 싶어요. 우리 그런 연애 할 수 있는 기간 그렇게 길지 않아요. 19금도 좋지만 때론 순정만화 같은 장면도 여자에겐 필요해.”

“...”

“나는 당신이 참 좋아요. 그래서 당신의 모든 걸 다 알고싶고, 또 궁금해. 그런데 그렇다고 너무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지는 마요, 좀. 다 알고 싶다는 게 꼭 알몸 어디에 점이 있고 어디에 상처가 있다...그런 것들까지 다 알고싶단 뜻은 아니잖아요. 그런 것까지 다 보여주려고 하면...오히려 여자는 거기에 상처받는다?”

“그게...”

“나도 알아. 당신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알고, 또 당신한테 그정도 앙큼한 판타지가 있다는 것도 이해하는데...당신이 한 번씩 그렇게 노골적인 농담을 던질 때마다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이 남자가 밖에 나가서 일할 때도 저러나...백화점 실장들 상대로 한다는 영업이 이런 느낌인가? 하면서 불안해져.”

“...”

“밀당을 아예 안 하기로 한 건 아니잖아. 순서만 조금 바꾸기로 한 거지.”

그러면서 자신이 연애 초창기에 왜 내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왔는지를 고백하는 강혜선이었다.

“내가 먼저 안 다가가면, 안될 거 같았으니까. 내가 먼저 용기 내지 않으면 이 남자 분명 진심은 그게 아닐텐데 계속 선비행세만 할 거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랬던 거지, 나도 용기 많이 냈던 거예요, 그날 부산에서. 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당신의 모습이 너무 좋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게 까진 모습 보여주려고 애쓰지마요. 깬단 말이야.”

정말 수만가지 감정이 동시에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싫은 소리를 들어서 짜증이 났던 부분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나의 생각없음이 강혜선에게 상처를 줬다는 부분이 더 짜증이 났고, 그래서 이불킥을 날리고 싶다는 후회, 시간을 조금만 되돌릴 수 있음 좋겠다는 생각, 이렇게 내 이미지가 박살이 나는 건가 하는 불안함 등등이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생각을 해보면 난 친구들을 만나도 야한 농담같은 건 가급적 피하는 편인데, 왜 유독 강혜선에게만 그렇게 했던 것일까?

싸움도 아니고 다툼도 아니었지만, 지난 석달 동안 처음으로 둘 사이에 냉랭한 감정이 감돌기 시작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혼자 원룸 침대에 누워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봤다.

혹시 나도 모르게 별 생각 없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런 얄궂은 농담을 한 적은 없었을까, 과연 나란 사람의 무게는 어느정도일까, 도대체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나란 사람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등등...

그렇게 강혜선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혼자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서먹서먹하게 헤어졌던 강혜선으로부터 카톡 하나가 도착한다.

-뭐하고 있어요?

-그냥 있어.

-그냥 뭐하고 있어?

-그냥 침대에 누워있어.

-벌써 자게?

-잠이 안오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벌써 자요?

-몰라. 그냥 머리가 무겁네.

-아까 커피숍에서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런 거?

-여러가지...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곰곰히 생각을 좀 해봤는데 아마 불안했던 거 같애.

-불안? 뭐가?

-요즘 뭐가 다 잘되고 있잖아. 우리 결혼 준비도 아무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지, 또 회사에선 차장 진급 확정에 연말 성과급도 역대급으로 나올 예정이라고 하지...뭐하나 아쉬울 거 없이 다 잘 풀리다보니까, 지금 상황이 불안했던 거 같애. 그리고 당신한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삐뚤어지게 표현됐던 거 같고. 평생 요즘처럼 더할나위 없는 이런 기분을 느껴보지 못해서 그런지, 하기만 하면 다 잘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불안으로 다가오는 거 같애. 그래서 아마 당신이 내 여자라는 걸 그런 식으로 계속 확인받고 싶었던 모양이야. 진짜 미안해. 앞으로 조심할게. 한 번만 봐주세요.

-소심쟁이.

-그러니까. 겁도 많은 놈이 왜 그랬나 몰라.

-데리러 와요.

-뭘?

-지금 나 데리러 오라고.

-응?

-오늘 같이 있자고. 귀여워서 안되겠어. 꼬옥 안고 자야겠어.

-어머니, 아버지 집에 안 계셔?

-있음 뭐 어때서? 그리고 나도 살짝 궁금하네.

-뭐가?

-나 오늘 당신이랑 같이 있겠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미쳤구나?

-불안하다며? 내가 대신 확인시켜줄게요, 내가 당신 여자라는 거.

-왜 자꾸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지?

-내가 언제?

-아무리 봐도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 같애. 이상하게 조련 당하는 기분이야.

-그래서 싫은 거?

-30분 안에 도착한다.

-그럼 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기다린다. 지금 이 감정 식기 전에 얼른 데리러 와요.

그날 밤 좁은 원룸 침대에 엉켜 누워 강혜선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 일, 스트레스를 주는 인간들, 포지션에 맞는 인간 관계, 그리고 우리의 결혼 생활 등등...

내일이 일요일이란 보험 덕에 새벽이 올 때까지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콩나물 국밥집에서 아침밥을 해결하고 공인 중개소를 찾았다.

현재 서로가 모아놓은 돈에 강혜선 부모님이 해주시기로 한 1억을 보태니 이리저리 대출을 받으면 대략 큰 부담없이 7억 짜리 집을 하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미삼아 둘러본 거다.

지금 당장 사겠다는 게 아니라 함께 집을 알아보러 다니며 신혼 생활을 상상하는 재미로 몇 군데 집을 알아보러 다녔고, 또 저녁엔 근처 백화점에 들러서 프로포즈용 반지를 하나 봤다.

“나는 드라마 같은 거 볼 때마다 남자들이 여자 손가락 사이즈를 어떻게 알고 혼자 반지를 사는지가 항상 궁금했어.”

그렇게 운을 띄웠다.

“막상 샀는데, 디자인이 여자 마음에 안들 수도 있는 거 아냐.”

“어지간하면 다 예쁘지.”

“그래도 어차피 평생 할 거 마음에 드는 반지를 받는 게 더 좋지 않나?”

“평생할지 누가 알아요?”

“뭐?”

“아니, 더 좋은 것도 계속 얻어껴야지 어떻게 평생 똑같은 반지 하나만 끼고 있을 수 있냐는 말이지,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뭐래?”

“암튼 그래서 말인데...나 결혼할 여자한테 프로포즈를 좀 해야할 거 같은데, 나랑 같이 가서 반지 좀 골라주면 안돼?”

“내가 그 여자 취향을 어떻게 알고?”

“어지간하면 다 예쁘다고 할 여자거든. 그런데 프로포즈를 그렇게 해도 되나?”

“안하는 거 보단 백배 낫지. 요즘엔 그런 거 생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지? 그 정도면 딱히 나쁜 프로포즈는 아니겠지?”

“뭐 나름 신박하네.”

“그 여자 나랑 결혼해주겠지?”

“당신 정도면...어디 보자...흐음...쩝. 해주겠지, 해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물어는 봐요.”

브랜드 샵이었기에 딱히 주문을 해야해서 제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곳에서 강혜선의 왼손 약지에 딱 맞는 반지 하나를 사고, 그와 같은 라인의 다이아몬드 없는 남자 반지까지 함께 샀다.

그리고 백화점과 붙어있는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분위기를 잡으며 강혜선의 손가락에 그 반지를 끼워주었다.

“나는 그렇네.”

“뭐가요?”

“하는 일이 영업이라 어쩔 수 없이 사람들한테 대범해보여야 하는데, 정작 진짜 성격은 은근히 겁이 많고 내성적이거든.”

“그걸 누가 모르나?”

“그러니까 말이야. 어제처럼 내가 실수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적하고 혼내는 건 인정. 근데 대신 바로 풀어주면 안되나?”

“피이...”

“아, 나 진짜 어제 당신 연락 받기 전까지 당신이 나란 사람에 대해 너무 큰 실망을 하고 있을까봐 완전 많이 쫄아있었어.”

“좀 그러라고 일부러 일찍 헤어진 거거든요?”

“그러지마라. 내가 뭐 말로 하면 못알아 듣는 사람이냐?”

“당신 그거 모르죠?”

“뭐?”

“당신 쫄아있는 모습이 의외로 귀엽다는 거. 혼자 심각해있는 모습 완전 재밌어. 나 변탠가? 이상하게 당신 얼어있는 모습 보는 게 너무 좋아.”

“참...”

“그래도 어제 고맙더라.”

“뭐가?”

“바로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해줘서. 사실 나도 속으로 내가 너무 강하게 말한 건 아니었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

“이해해줘요. 나도 어쩔 수 없는 우리 엄마 딸인가봐. 한 번씩 나도 모르게 욱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내가 생각해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차가워져. 내가 그렇게 차갑게 굴땐 얼른 풀어달란 뜻이니까, 어제처럼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한다고 진짜 딱 집에만 데려다주지 말고, 쫌. 나 어제 당신 바본줄 알았어. 그런 바보가 계속 그런 까진 농담을 하니까 얼마나 미워 보였겠냐고.”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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