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88화 (88/325)

# 88

절실한 쪽이 다 하게 되어있어

“그럼 나 건조기 사도 돼요?”

“사. 그때 내가 사자고 했잖아. 딴 건 몰라도 건조기는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했을때 정작 필요 없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사. 제일 좋은 놈으로 사.”

“그럼 청소기도 그때 봤던 다이슨 말고 이번에 엘지에서 나온 거, 그거 산다?”

“사라고. 사. 거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그럼 침대 메트리스도...”

“아, 사라고요. 그냥 사세요. 한 번 살 때 좋은 거 사놓으면 오래 가잖아.”

“그럼 나 가방도 하나 사도 돼요?”

“응, 그건 안돼.”

“역시...”

어디 지금 누구 앞에서 약을 팔고 있어?

난 단호하게 말했고, 그 모습에 강혜선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왜? 가방 필요해? 그때 하나 샀잖아.”

“농담. 그냥 한 번 해본 소리.”

“필요하면 말해. 안 그래도 다음달에 만토바 한 번 다시 넘어가야 돼.”

“으으음...그냥 당신 허세 부리는 게 귀여워서 장단 한 번 맞춰준 거야.”

제주 갈치 조림 전문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은근히 생선 요리를 좋아하는 강혜선.

난 그녀에게 줄 갈치 토막 하나를 내 앞접시 위로 올려놓고 숟가락 두 개를 이용해 먹기 좋게 살만 발라서 그녀 앞으로 건넸다.

그리고 난 지느러미 부분에 붙은 살을 빨아먹었다.

“이러니까 꼭 아빠같다.”

“원래 생선은 대가리하고 여기 이 쪽 부위가 제일 맛있는 거야.”

“난 어디가서 돼지고기는 비계가 제일 맛있다, 닭은 껍질이 제일 맛있다, 생선은 대가리랑 눈알이 제일 맛있다면서 그거 못 먹는 사람한테 음식 먹을 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제일 싫더라.”

그러더니 다른 갈치 토막 하나를 자기 앞으로 덜어서 내가 했던 것처럼 살만 발라 내게 넘겨주고 남은 부위를 빨아먹기 시작하는 강혜선.

“다른 사람들도 다 알거든요? 이게 맛있다는 거.”

어깨 뽕이 천장에 닿일 정도로 한껏 올라간 상태에서 점심 식사를 했고, 식사 자리 내내 난 강혜선에게 금일봉을 받게 된 계기와 사장님을 직접 만나 칭찬을 받은 이야기, 그리고 회사에서 지금 현재 내가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지 등을 자랑했다.

“사실 난 이렇게 큰 금일봉은 기대도 안했는데, 막상 받고 보니까 좀 얼떨떨하네.”

“기특하네. 그걸로 딴짓 안하고 은행에 넣을 생각을 다 하고.”

“우리가 또 딴 건 몰라도 상대가 뭘 원하는지는 기가 막히게 알아내는 사람들이잖아. 밥 먹고 하는 게 그건데 설마하니 내가 당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귀신이지. 그냥 이걸로 뭘 하면 당신이 제일 좋아할지를 고민해보니까 답이 바로 나오더라고.”

“그러면서 또 내 앞에서 허세도 좀 부리고?”

“허세라니.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나.”

“우쭈쭈, 우쭈쭈...아이고 잘했네. 누가 데려갈지는 몰라도 이 남자 데려가는 여자는 완전 로또네. 그죠?”

“그만해.”

“진짜 그만해?”

“뭐...하고싶음 조금 더 해도 괜찮고. ”

“푸히히히...”

그렇게 점심을 먹던 도중 강혜선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이 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는 더 바빠지는 거예요?”

“응?”

“아까 그랬잖아, 사장님이 명품 브랜드를 아예 하나 사버리자고 했다고.”

“근데?”

“지금 안그래도 맡고 있는 프로젝트도 많은데, 그거까지 맡게 되면 더 바빠지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난 약간 허풍을 떨어본다.

“아마도 그렇겠지? 근데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우리같은 회사가 좀 그래. 말이 영업부지 막상 따지고 보면 영업부가 전부야. 나머지는 다 그냥 뭐 서포팅 하는 부서라고 보면 돼.”

물론 그건 말이 안되지.

모르니까.

강혜선은 잘 모르니까 그렇게 내가,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영업부가 회사 내에서는 최고의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뻥을 한 번 쳐보는 거지.

그러면서 어깨에 뽕도 같이 한 층 더 쌓아올리는 거고.

“그래도 크게 걱정할 정도로 바빠지지는 않을 거야. 어디 뭐 회사에 일 할 사람이 나만 있나?”

위로 받고 또 인정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건 회사 동료들이 해주지 못하는 부분인 거 같다.

회사에서 아무리 동료들에게 위로를 받고 인정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그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내겐 강혜선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강혜선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고.

“당신은 좀 어때?”

“뭐가?”

“당신 일은 좀 할만 해?”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우린 그냥 기계야, 기계. 그래서 불안한 거고.”

“불안해? 뭐가?”

“하는 일이 기계다 보니, 진짜 기계들이 우리 일을 대신할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물론 아주 나중에 벌어질 일이겠지만, 워낙에 하는 업무가 반복의 연속이다 보니 그런 쓸데없는 걱정들을 사서 하는 게 버릇이 된 사람들? 딱히 당신처럼 프로젝트를 맡아서 머리를 쓸 일이 없잖아. 그러니까 몸이 일을 하는 동안 머릿속은 다른 곳을 헤메는 거지, 뭐.”

“나는 당신이 일을 해서 참 좋다. 물론 결혼해서 애 낳고 하다보면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당신이 직장 생활에 쩌든 날 동지 의식으로 다 이해해준다는 게 너무 고마워.”

“그럼 나 가방 사도 돼?”

“응, 안돼.”

“푸히히히...”

“근데 진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언제든 버거우면 내려놔도 돼. 이젠 당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서 당신은 그냥 집에만 있어도 되는 그림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중이니까.”

“듣기만 해도 고맙네.”

언젠가 내게 강혜선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결혼을 한 후에도 자기는 물론 일을 계속 할 거지만, 사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큰 경제적 걱정 없이 살림만 살아도 되는 컨디션을 거절할 것이냐고.

정말 자기가 하는 일이 좋아서,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만 놓고 보면 자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자는 남편의 수입만 여유가 있다면 전업 주부를 하고 싶지, 함께 경제 활동을 하면서 남편과 가사 분담을 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강혜선에게 은행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 자신의 꿈은 아니다.

그리고 그 최선을 지금 당장 버리기엔 아직 나 혼자 만들어내는 수입으론 강혜선 그녀가 그려놓은 그녀의 행복한 가정이란 그림을 완성시키기가 어렵고.

이미 그녀는 날 만나고, 또 내가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한 단계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난 그녀가 그린 큰 욕심에 설레고 또 응원을 하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날 만나기 전에 그렸던 자신의 결혼 그림과 날 만난 후 다시 그리게 된 그림의 크기가 달라졌다고 고백을 하는 강혜선이 난 당시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 조금만 더 애써보자.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보자.

비록 로또에 당첨이 되어 꿈같은 강남에 내 명의의 아파트를 가지게 된 건 사실이지만, 그래본들 정작 변한 거라고는 외식을 하는 횟수가 한 번에서 두 번으로 늘었다는 것 정도, 그 외식을 한 번 하면서 더이상 음식 가격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라는 게 고작 아닌가.

아마 앞으로 더 많이 가지게 되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 같다.

하루 네 끼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하나하나, 인생의 파트너와 함께 뭔가를 이뤄가는 재미가 진짜 열심히 사는 오늘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전사 운영본부로부터 미팅 제안을 받게 된다.

전사 운영본부.

이름이 거창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 거 없는 부서다.

우리 영업부가 박 이사의 직할이라고 한다면 전사 운영본부는 상무보의 직할 쯤 되는 부서라고 보면 된다.

다른 회사로치면 기획부 정도가 되려나?

부서의 성질은 그런데, 홍성 인터네셔널이 가진 조직도의 특징상 딱히 기획능력이 뛰어난 부서가 아닌 게 사실이다.

오히려 브랜드 섭외 기획능력은 우리 영업부가 더 뛰어나니까.

그래도 상무보 직할이라는 부분과 또 중국 법인 설립 당시 그 레이아웃을 직접 잡았다는 부분만 놓고 보면 나름 회사 안에서 파워가 있는 부서임엔 틀림이 없고.

재무쪽과 영업쪽을 제외하면 소형 부서이긴 하나 인사부 보다 더 파워가 있는 부서가 확실하다.

상무보가 참관을 하는 자리라고 했다.

우리 영업부에서는 나와 장 부장, 김 차장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는 회의.

박 이사는 중국 법인 쪽 법인장 임명 문제로 잠시 센젠 출장을 떠나 있는 상태였다.

“여우들인 거 알고 계시죠?”

미팅 자리에 들어가기 전 장 부장이 나와 김 차장에게 말했다.

장 부장의 말에 김 차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진짜 우리 영업부보다 더 입으로만 일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말리면 안됩니다.”

“나는 그냥 입 딱 다물고 있으려고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공 차장.”

“공격은 부장님이 하십시오. 전 서포팅만 하겠습니다.”

사장님이 일전에 한 번 말씀하셨던 명품 브랜드 매입 건으로 우리 영업부에게 미팅을 제안했을 것이다.

백 퍼센트다.

그것 말고 지금 이 시점에 전사 운영본부가 왜 우릴 찾겠나.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건.

영업은 말 그대로 나가서 돈을 만들어 오는 부서일 뿐이고.

이번 건 같은 경우는 전사 운영본부가 진행을 해줘야 하는 부분이다.

“아마도 은근슬쩍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할 거다. 그리고 브랜드 파악 협조를 부탁할 거고.”

“브랜드 파악 협조 다음엔 자신들이 선별한 브랜드들을 놓고 뭐가 좋겠냐고 물어보겠죠.”

“뭐가 좋겠냐가 아니라 뭐가 팔기 쉽겠냐겠지.”

“그리고 거기에 넘어가면 결국 절반 이상은 저희 일이 되는 거겠죠.”

“우리 입장에선 보상 없는 일이다. 거기에 맨파워 낭비할 이유 하나 없어.”

“그럼요.”

“결국은 급하고 절실한 쪽이 다 하게 되어있어. 우리 지금 절실하냐?”

“절실할 여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쌓여있는 프로젝트가 얼만데.”

“김 차장님 지금 절실하십니까?”

“전혀요.”

“그럼 우린 들어가서 그들이 절실한 모습만 파악하고 나오면 되는 겁니다. 오케이?”

“오케이.”

“그럼 한 번 들어가 보자.”

전사 운영본부 사람들의 업무 스타일은 약간 이런 느낌이다.

대학에서 조별 과제를 받게 되면 꼭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나.

자기가 뭐 조사하고 발표까지 다 할테니, 파워 포인트만 만들어 달라고 하는...

그래서 파워 포인트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조사한 내용에 뭔가가 빠진 거 같아서 전화를 걸어보면 전화기가 꺼져있는.

그들에게 말리기 시작하면 결국 파워 포인트를 만들다가 다시 구글링을 시작해 자료 조사까지 해야 된다.

그리고 막상 PPT당일이 되면 목감기에 걸려서 발표를 할 수 없게 생겼는데, 어쩜 좋지? 하면서 그 방법을 도리어 내게 물어본다.

결국 파워 포인트도 내가 만들고 조사도 내가 하고 발표까지 내가 다 해야하는 상황.

하지만 조장은 전사 운영본부가 되는 거지.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다.

우리 영업부만 당한 게 아니라 아마 전 부서가 돌아가면서 한 번 정도는 당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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