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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92화 (92/325)

# 92

이 맛에 영업한다

그리고 곧 알게 된다.

저 안낙현입니다...라고 하는 말이 괜히 우리끼리 장난을 친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의심이 많은 편이다.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의심이 많은 편이라는 걸.

하지만 그 의심은 사람에 대한 의심, 상황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업무에 대한 의심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업무를 줘놓고 그냥 그걸로 땡! 하는 스타일이 못된다.

그 업무의 진행 과정을 계속 확인을 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다.

비록 나로부터 업무를 하달받는 부하 직원들의 입장에선 뭘 하나 시켜놓고 수시로 체크를 하는 나의 모습에 숨이 막힐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회사 입장에서는 대형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거니까.

양 팀장의 경우에도 아직까지 H.I 편집샵이나 나크리스 매장 진행 상황을 주 단위로 꾸준히 보고를 하게끔 만들어 놓고 있다.

하물며 양 팀장을 상대로까지 그렇게 철저하게 보고를 받는데 안 팀장에게 맡겨놓은 프로젝트들을 내가 그냥 잘 준비되고 있다는 말만 듣고 알아서 하겠지...하며 믿어줄까.

내 스타일상 절대 불가능하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안 팀장이 하는 보고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계속 속으로 '제법이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 같다.

A를 주문해 놓으면 자기가 알아서 B와 C까지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주는 안 팀장이었다.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한다는 증거였다.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안 팀장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먼 모습들이다.

그동안 안 팀장하면 뺀질뺀질 거리면서 입으로만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중국 법인을 초토화 시켰던 내부 고발자라는 안 팀장의 이미지가 최소한 내게는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총 8개 국내 아동복 브랜드 업체와 접촉을 한 상태이고, 그 중 6개 브랜드와는 다음주부터 차례대로 미팅을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팅 준비를 너무나 깔끔하게 해놓았다.

입을 댈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미 미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진 흥정을 우리 홍성 쪽으로 유리하게 다 만들어 놓고 날 불렀던 거다.

난 그냥 그 자리에 참석을 해서 오케이 사인만 하면 되게끔 말이다.

일을 하는 것만 보면 상당히 설렁설렁하는 거 같다.

탕비실도 자주 들락거리고, 자기 자리에 앉아서 업무에 집중을 하는 시간 보다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다른 기획 1팀이나 해외 영업부의 상황을 훔쳐보는 등, 상당히 산만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런데 막상 결과가 좋으니까 내 입장에선 어이가 없는 거지.

그렇다고 자기는 아무것도 안하면서 부하 직원들에게 업무를 다 떠넘기는 스타일이냐?

그런 것도 아니다.

장향은이 어디 보통내기인가.

위아래 개념은 확실하지만, 상대가 누구건 아닌 건 아닌 거라고 확실히 표현을 하는 사람이 바로 장향은이다.

그런 장 대리도 처음 안 팀장과 함께 묶어놓았을 때 살짝 잡음을 만들어내는가 싶더니 이젠 내가 질투심이 날 정도로 안 팀장을 믿고 따르는 중이다.

분명 뭔가가 있는 사람이 확실하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안낙현을 진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이 한 번 펼쳐진다.

속으로 난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난 참 운이 좋다...

만약 내가 지금 차장을 달지 않았고, 그래서 여전히 팀장으로 안 팀장과 같은 포지션에 놓여있다면, 그래서 안 팀장과 차장 포지션을 놓고 나중에 경쟁을 해야하는 입장이었다면 과연 내가 안 팀장 보다 먼저 차장을 달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건 정말 나도 확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안 팀장은 아닌 거 같으면서도 나와 일하는 스타일이 상당히 비슷한 거 같았다.

만토바에서 스폰짜를 비롯해 총 4명의 대형 창고 주인들이 다시 한국을 찾아왔을 때였다.

일전에 가졌던 첫 미팅이 서류적인 내용을 서로 확인하고 조율하는 미팅이었다면, 이번 그들의 방문은 정식으로 홍성이 확보하고 있는 창고를 확인하고 또 홍성이 가진 물류 샌딩 시스템을 공유받기 위한 자리였다.

물론 최종 사인을 하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인 것이고.

"양 팀장님, 그리고 문 팀장님."

"네."

"네, 차장님."

"저 좀 따로 봅시다."

문 팀장의 해외 영업부야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거고, 양 팀장의 기획 1팀 역시 나크리스를 제외한 H.I 편집샵의 모든 브랜드가 만토바에서 받는 물건으로 채워져있으니 당연히 만토바 창고 사장들을 접대하는 자리에 얼굴을 내비치는 게 맞는 거다.

하지만 안 팀장의 기획 2팀은 만토바와 엮여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제외를 시켰던 거고.

난 양 팀장과 문 팀장을 시켜 공항 픽업을 갈 인원을 알아서 뽑게끔 만들었고, 일전에 만토바 사람들이 한국에 왔을 때 그들이 먹는 내내 엄지를 치켜세웠던 소고기 집으로 예약을 해두라고 일러두었다.

만토바 창고 사장들의 한국 방문은 비단 우리 영업부 뿐 아니라 홍성 전체가 신경을 쓰고 있는 사안이었기에 시작부터 아예 박 이사의 법인 카드로 다 진행이 되고 있었다.

다만 장 부장과 우리 영업 기획부가 홍성을 대표해서 가장 앞에서 그들을 환대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오후 4시 정도에 전무님이 직접 자리한 그들과의 협상 자리에서 홍성 인터네셔널과 만토바 창고 네 군데가 정식 계약을 끝내고,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장 부장과 나, 그리고 양 팀장과 문 팀장이 만토바 창고 사장 넷을 모시고 소고기 집으로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갔다.

다리를 밑으로 넣을 수 있는 좌식 룸으로 안내를 받고 테이블 세팅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안 팀장이었다.

난 장 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개를 돌려 안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차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우리 지금 만토바 분들 모시고 식사하러 왔죠."

-벌써요? 아직 4시 밖에 안됐는데?

"다들 피곤하시죠. 그 먼길 비행기 타고 와서 제대로 시차 적응도 못하고 어제, 오늘 일정 소화하고 계시잖아요. 빨리 끝내고 호텔로 모시려고요. 저희도 여기서 바로 퇴근할 거고요. 근데 왜요?"

-아니, 가면 간다고 말씀이라도 좀 해주시지...전 그것도 모르고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었네요.

"어쩌다보니 계약 끝나고 바로 모실 수 밖에 없었어요. 왜그래요? 무슨 문제 생겼어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저는 나중에 식사하러 가실 때 장 대리도 같이 데리고 가라고 말씀을 드리려고 했죠.

"...!"

-이번에 오신 네 분 중에 영어가 되는 사람은 스폰짜랑 레빈인가 하는 그 두 사람 밖에 없다면서요. 나머지 두 분은 영어가 전혀 안된다면서요.

순간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만토바 사장들의 대표인 스폰짜의 영어가 유창하니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부분이다.

어차피 스폰짜가 대표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또 그네들의 언어로 통역을 해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안 팀장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뭘 어떻게해야 할지 몰라 뻘줌하게 앉아있기만 하고 있는 두 명의 창고 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장 대리 시간 있어요?"

-네.

"그럼 좀 보내주실래요?"

-주소 찍어주세요. 바로 보낼게요.

난 부랴부랴 현재 있는 식당의 주소를 찍어 안 팀장에게 보냈고, 장향은이 오기 전에 영어가 되지 않아 입을 꼬옥 다물고 있는 두 창고 사장 앞자리에 앉은 문 팀장을 반대 쪽으로 가서 앉게끔 만들었다.

"누구 더 올 사람 있어?

장 부장이 물었다.

"장 대리요."

"아참! 향은이가 이탈리아어가 되는구나."

"저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누구 전화였는데?"

"안 팀장이요."

이 식사 자리에 이탈리아어가 유창한 장향은이 함께 하면 자리가 훨씬 부드러워질 수 있겠다는 것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만, 그 보다는 안 팀장이 자기네 팀 일이 아닌 회사 전체, 영업부 전체 일에 이정도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언어천재, 자타 공인 홍성 인터 최고의 센터 장향은이 자리에 온다.

그리고 그때부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럼 제가 샤워주를 한잔씩 말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 만난 고기가 저럴까.

장 대리는 자신의 앞으로 모든 맥주잔을 긁어 모았고, 일렬로 세워놓은 맥주잔 속으로 소주 한 병을 말끔하게 나눠 따랐다.

그리고 이제 막 긴장을 풀기 시작하는 만토바 사장들에게 그네들의 언어로 지금 자신이 제조하고 있는 소맥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칫 거품이 튈 수도 있으니 조금 멀리 떨어지라는 말을 하는 거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장향은은 곧바로 샤워주를 만들기 시작한다.

맥주병 주둥이를 엄지로 막아 몇차례 흔든 후 거기서 세어나오는 거품을 잔속에 부었고, 그 모습에 스폰짜를 포함한 모든 창고 사장들은 무슨 칵테일을 이렇게 만들 수가 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쩌억 벌렸다.

"브라보!"

진짜 맛이 좋아서 맛있다고 하는 거겠냐만, 장향은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다시 한 번 보고싶다며 만토바 사장들은 소맥을 한 잔 더 마시자고 했고, 이에 장향은은 슬며시 미소를 띄우며 이번엔 살짝 다른 걸 보여주겠다며 소주를 따라놓은 맥주컵에 얌전히 맥주를 부었다.

그리고 입을 대지 않은 숟가락과 병따개를 양 손에 하나씩 들걸로 거품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장 대리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한 결 부드러워졌다.

만토바.

전 세계 소매업자들을 상대로 명품 도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창고 사장들은 하나같이 구수한 이탈리아 촌부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다.

패션에 집착하는 스폰짜는 예외로 두더라도 말이다.

조금 투박한 느낌마저 들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단 두 번의 소맥 제조로 그런 만토바 사장들을 사로잡은 장향은.

물론 그들을 상대로 그들의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

그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 대리가 그들의 생각을 내게 전달했다.

"다음달 센젠 법인 창고 둘러보러 가는 자리에 저도 같이 가느냐고 묻는데요?"

고민할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다.

"어차피 기획 2팀도 국내 아동복 수출 건으로 중국 출장 한 번 가긴 해야하잖아요."

"그야 그렇죠..."

"그거 장 대리가 가는 걸로 하면 안되나?"

곧바로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그들의 언어로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약속을 하는 장향은.

그리고 그렇게 부드러워진 식사 자리에서 양 팀장은 만토바 창고 사장들을 상대로 H.I 편집샵에 들어가는 브랜드에 한해 컨사인먼트 계약을 해줄 수 없겠느냐고 넌저시 묻는다.

어차피 중앙 창고가 한국에 있고, 또 그걸 우리 홍성이 컨트롤하게 될 상황.

매달 필요한 만큼 물건을 유통시켜서 팔아도 되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상대는 중국이란 거대 시장에 눈이 멀어 그 정도 쯤은 얼마든지 알아서 컨트롤을 하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여기서 양 팀장은 인보이스를 한 달 더 연장받은 것보다, 그동안 판매상에 생겨난 제품 데미지 건이나 하자에 의한 고객 반품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무기를 얻게 된 셈이었다.

"뭐라는 거예요?"

소맥 몇 잔에 살짝 취기가 오른 상대.

혼자 이탈리아 말로 뭐라고 하길래 옆에 있던 장 대리에게 얼른 통역을 좀 해보라고 했다.

"꼭 편집샵에 들어가는 브랜드만 그렇게 할 게 아니라..."

"...?"

"현재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들 중 이 분 창고에서 가져가는 브랜드는 다 그냥 컨사인먼트로 돌리자고 하시네요."

"...!"

"복잡한 건 딱 질색이시라고...이건 선결재, 이건 컨사인먼트...본인 입장에선 별로 크지도 않은 시장인데, 너무 복잡하다고 그냥 하나로 통일해버리자고 하시네요."

스폰짜가 가만히 있을 사람인가, 어디.

분위기 한 번 타면 신도 못 말릴 사람이 바로 스폰짜다.

스폰짜가 다른 창고 사장들을 상대로 분위기를 묘하게 이끌어간다.

그리고 결국...현재 홍성 인터가 컨트롤 하고 있는 브랜드들 중 만토바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브랜드에 한해서 모두 컨사인먼트 계약이 채결되게 된다.

그것도 술자리에서 말이다.

안 해본 사람들은 모를 거다.

이 맛에 영업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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