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검마 신위를 보이다!(1)
‘뭐 이렇게 빨리 왔지?’
어쩌면 자신이 본 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경신술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검마와 맞닥트리게 되자 말도 못하고 경계만 했다.
검마는 노인을 힐끔 보더니 나선형의 길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검마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성큼 성큼 가버리자 노인은 제천지존릉을 향해 달려갔다.
검마는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이 없는 사람처럼 내려왔던 나선형의 계단을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화운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얼음으로 뒤덮인 나선형의 계단을 눈앞에 두고 검마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계단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한 무리가 아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줄지어 내려오고 있는 이들은 여러 무리였다.
얼추 세어보니 이백이 넘어가는 숫자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의 경신술은 이전의 무인들과는 차원부터 달랐다. 각기 자신들을 상징하는 깃발까지 앞세운 무인들.
낭혈, 도탑, 잔월교, 혈악 그리고 흑마갱.
천하사파연합!
바로 그들이었다.
그중 선두의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 인상적이었다.
일만 낭인들의 전설이라는 낭왕.
낭왕 동패, 바로 그였다.
“검마! 저 안에서 무엇을 얻으셨소?”
“걸리적거리지 마라.”
검마가 차갑게 말했다.
그는 눈앞의 낭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검마의 검이 무섭다는 것쯤은 아오만, 제천마존의 보물을 혼자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소.”
낭왕이 씩 웃었다.
도탑, 잔월교, 혈악 그리고 흑마갱의 수장들이 낭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검마를 압박했다.
금방이라도 피가 튈 것 같았다.
“역시나 천사련답군.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려 하다니.”
비웃는 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낭왕 등이 돌아보았다.
화운 역시 그들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눈을 크게 치떴다.
‘저런 방법이……!’
화운이 쳐다보는 가운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벽을 새까맣게 채운 채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계단을 따라 걸어오지 않았다.
벽면을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었다. 나선형으로 파 놓은 계단을 지나쳐 내려올 때마다 손을 뻗어 난간을 붙잡듯 잡아서 멈춘 다음 다시 손을 놓고 한참 아래쪽의 계단이 나올 때까지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식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얼음조차 미끄럽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무공이 받쳐주니 별짓을 다 할 수 있구나!’
화운이 감탄과 시기를 온 얼굴로 드러내고 있는 동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푸른 경장차림이었다. 왼쪽 가슴팍에는 새하얀 구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천하오대세가 중 한 곳인 남궁검가.
바로 그들이었다.
“검마 선배!”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 같은 기도를 가진 중년인이 검마를 부르며 앞으로 나섰다.
남궁검가의 가주였다.
검마가 힐끔 쳐다보자 남궁검가주가 점잖은 소리로 말했다.
“무얼 얻으셨는지는 모르나 일단 우리와 함께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천사련이 하는 일에 끼어들겠다는 것이냐?”
낭왕이 끼어들었다.
그는 잔뜩 성이 난 기색이었다.
“말은 바로 합시다. 그쪽의 일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의 일입니다.”
“닥쳐라!”
“선배 대접 좀 해주려 했더니 함부로 구는군. 떠돌이 낭인들이 전설이랍시고 추대해 주니 보이는 게 없다는 건가? 원한다면 이 기회에 남궁검가의 검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직접 겪어보게 해주지.”
남궁검가주가 검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수적으로 보면 압도적이랄 수 있을 정도로 불리함에도 남궁검가주의 모습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대단하다!’
화운이 적잖이 감탄한 가운데 낭왕 역시 허리춤에 대충 걸려있는 구환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베기가 수월하도록 휘어져 있는 큼지막한 환도의 칼등에 아홉 개의 자잘한 고리를 걸어놓은 게 구환도다.
낭왕의 내력이 실려서인지 구환도가 처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 사이로 팽팽한 기운이 부딪쳤다.
금방이라도 검과 칼이 폭풍처럼 사납게 격돌할 것만 같았다.
바로 이때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저벅저벅!
검마였다.
검마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이를 지나갔다.
“못 가오!”
낭왕이 소리쳤다.
“천하를 위협할 수도 있는 보물이라면 공개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남궁검가주 역시 붙잡았다.
검마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쓱 돌아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보물은 저 아이가 가졌다.”
검마의 시선이 화운을 향했다.
“으잉?”
화운의 얼굴이 황당한 빛으로 일그러졌다.
수백 쌍의 시선이 화운에게 집중되었다.
그게 사실이냐?
무엇을 가졌느냐?
어서 꺼내봐라.
근데 넌 어느 문파 소속이냐?
다양한 의미를 가진 시선들이었다.
화운은 당황하여 멀뚱멀뚱 눈만 끔벅거렸다.
“저런 아이에게 전가하다니! 검마께서 이토록 후안무치할 줄은 몰랐습니다.”
남궁검가주가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응? 저런 아이가 어떤 아인데?’
화운이 살짝 기분 상해할 때였다.
“어이, 일루 와 보거라.”
낭왕이 손짓했다.
당연히 화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 낭왕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순간 화운이 잽싸게 소리쳤다.
“제천지존릉이 저쪽에 있습니다. 가서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누군가가 먼저 와서 제천마존의 유물들을 싹 쓸어갔습니다.”
“그 누군가가 네놈인 건 아니고?”
낭왕이 성난 모습 그대로 물었다.
화운은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얼음조각들이 바닥에 붙어 있습니다.”
“뭐?”
낭왕은 이해를 못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먼저 온 자가 있음이 분명하겠구나. 그것도 한참 전에.”
남궁검가주가 이해했다.
이제 막 부순 것이라면 얼음조각들이 굴러다닐 것이고, 한참 전에 부순 것이라면 바닥의 빙판과 붙어 있을 것이다.
“예. 가보시면 분명히 아실 겁니다.”
“좋네. 확인해 보도록 하겠네.”
남궁검가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십여 명이 달려갔다.
이때 낭왕이 함께 온 천사련 소속의 다른 방파의 수장들에게 말했다.
“내가 가보겠소. 다른 분들께선 누구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오.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가선 안 될 것이오!”
낭왕은 단호히 말하고는 검마와 화운을 쓱 쏘아보고는 제천지존릉을 향해 달려갔다.
“멈춰주십시오.”
남궁검가주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검마를 향하고 있었다.
검마가 돌아봤다.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듯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한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피바람이 불 수도 있습니다. 걸리적거릴 게 없는 분인 줄은 압니다만, 후배들을 생각해서라도 가끔씩은 걸음을 멈춰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검마는 마인이 아니었다.
검마라는 별호를 얻을 때까지 그가 죽인 이들 치고 무고한 자는 없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거나 겁 없이 검마에게 달려들었던 자들이었다.
괴팍할지는 몰라도 사마외도는 아니다.
그래서 검마를 대하는 남궁검가주의 언행은 정중했다.
검마는 말없이 응시했다.
그의 두 발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남궁검가주처럼 명성 있는 정파의 수장이 저런 자세를 보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검마는 석상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남궁검가주는 고마움을 담아 목례를 하고는 화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자넨 누군가?”
“화운이 제 이름이며, 선우세가가 제겐 외가입니다.”
“선우세가라고?”
남궁검가주의 얼굴이 굳었다.
화운은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의아했다.
“어찌하여 선우세가랑 따로 움직인 건가?”
“선우세가는 제 외가일 뿐이니까요.”
“아, 그래. 외가라고 했었지.”
확실히 남궁검가주의 반응이 이상했다.
검마나 낭왕을 대할 때의 당당함 대신 약간의 당황이 엿보였다.
“그런데 검마 선배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뭘 말하는……!”
“이럴 수는 없다! 왜 아무 것도 없는 거냐고!”
낭왕이 씩씩거리며 달려왔다.
남궁검가주는 입을 다물었다. 화운에게도 대답하지 말라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때 제천지존릉을 둘러보고 온 남궁검가의 무인이 남궁검가주에게 달려와 귓속말로 보고했다.
화운의 말대로 입구에 있는 얼음조각들이 오래전에 부서져 있었던 듯 빙판 바닥과 단단히 붙어 있다는 것과 석실이 텅텅 비어 있다는 보고였다.
그 모습을 힐끔 본 화운은 낭왕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 네놈 같으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을 믿겠느냐?”
낭왕이 괜히 화운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신경질을 터트렸다.
“정황이 그러하다면 믿을 수도 있겠지요.”
“정황? 무슨 정황!”
“낭왕께서도 이젠 아실 거 아닙니까. 최소 며칠 전에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온 사람이 있었다는 걸.”
“그래서?”
“그 사람이 뭔가를 남겨 놓고 갔겠습니까? 낭왕이시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가져갈 만한 건 죄다 쓸어…… 남아 있는 게 전무한 걸 보면, 어쩌면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화운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신경질적인 낭왕조차 잡아먹을 듯이 노려만 볼 뿐이었다.
“네놈은 뭐냐, 검마의 제자냐?”
노려보던 낭왕이 불쑥 물었다.
화운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하면서 대답했다.
“아뇨.”
“그럼 뭐냐? 넌 뭐하는 놈이냐! 어떻게 그 비루한 몸뚱이로 여기까지 온 것이냐! 아! 네놈이 가졌다는 건 뭐냐? 어서 썩 꺼내봐라!”
낭왕이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갑자기 끼어든 이는 검마다.
검마가 화운을 향해 그 한 마디를 내뱉고는 남궁검가주를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남궁검가주가 정중히 포권하자 검마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여, 이렇게 보내자고?”
낭왕이 소리쳤다.
“스스로에게 당당한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거짓을 하지 않는 법이오.”
남궁검가주가 말했다.
단호함이 서린 태도였다.
낭왕은 남궁검가주를 쏘아봤다.
“정파가 마도로 낙인찍힌 검마를 믿는다고? 그야말로 개가 웃을 일이다.”
“낭왕!”
남궁검가주가 인상을 썼다.
“됐고, 나서지 않겠다면 니들은 물러나.”
낭왕은 남궁검가주를 뒤로하고 검마를 향해 움직였다.
천사련 소속의 다른 수장들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난 사람을 믿지 않소. 애새끼가 말한 정황이라는 것도 못 믿겠소. 내가 믿는 건 오직 내 눈과 귀뿐이오.”
낭왕이 검마를 향해 흉심을 드러냈다.
그에 검마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특유의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남궁검가가 그리 오랫동안 명문을 이을 수 있는 이유를 알겠군.”
“거 무슨 개소리요?”
낭왕이 소리쳤다.
검마는 낭왕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으며 계속 말했다.
“한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피바람이 불수도 있다는 말, 아주 훌륭한 말이다.”
말이 끝난 순간 검마의 기도가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빙글 돌아서는 검마의 몸에서 새파란 섬광이 폭발했다.
너무나 짧은 순간에 피어난 섬광.
쓰카앙!
낭인들의 전설인 낭왕이 검마가 발휘한 찰나의 일검을 받았다.
하지만 낭왕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벌겋게 일그러졌다.
일곱 걸음!
검마의 일검에 실린 힘을 완벽히 감당하지 못해 일곱 걸음이나 튕기듯 미끄러졌다.
비단 낭왕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낭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다른 천사련의 고수 두 명이 한꺼번에 미끄러졌다.
검마의 간격에서 벗어나 있던 다른 두 사람만이 제자릴 지켰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검마의 검력이 세 사람을 압도한다는 뜻.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검술은 일도양단의 패도적인 힘이 아니라 속도와 변화 그리고 면면부절하게 이어지는 지속력에 역점을 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패력을 발휘한다면 제대로 된 검법이 펼쳐졌을 때의 고강함이란 실로 엄청날 것이다.
“들어야 할 걸 듣지 못하고,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귀와 눈은 있을 필요가 없다.”
검마가 걸었다.
검끝을 바닥을 향해 내린 채 낭왕 등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