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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26화 (26/207)

#026. 제천마존(1)

다시 살아난 화운은 공청석유와 인형설삼 그리고 이무기의 내단을 복용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세 차례의 환골탈태를 통해 완벽한 육체로 재구성 되었기에 더 이상 복용해 봤자 아무런 효능이 없었다.

‘이것들은 유성이한테 복용시켜야겠다.’

화운은 영약들을 챙겼다.

동생한테 복용시킬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선우유성은 동생이고, 그 착한 놈은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

화운은 얼굴에 미소를 한껏 지으며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을 생각했다.

‘광장의 그 구멍으로 가려면 준비가 필요해. 그냥 가다간 용암의 바다에 빠져 한줌 혈수로 녹아버릴 거야!’

광장의 바닥에 있는 구멍 속으로 떨어졌을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데, 다른 곳은 몰라도 용암의 바다를 건너려면 공공무영비의 수준을 조금 더 끌어올려야 한다.

화운은 텅 빈 광장에 남아 홀로 공공무영비를 수련했다.

빨리 가보고 싶어 조급증이 날 만도 하건만 세상 다 살아본 노인처럼 궁금한 것을 참아내고 조급증을 여유롭게 눌렀다.

화운은 충분한 준비를 한 후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며칠 동안 수련했다.

다행히 노력이 헛되지 않아 중단전과 하단전에 가득한 공력을 바탕으로 육 성의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공공무영비는 단지 빠르기만한 경신공부가 아니다.

세심한 공력의 운용과 상승의 기술을 요하는 절학이다.

내력이 충분하다고 금방 흉내를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영투 영감한테 제대로 배워야겠군. 얼추 올 때가 되었지?’

화운이 고개를 들었다.

광장 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천장에 나 있는 통로로 빠른 속도로 내리 꽂히던 무언가가 광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부유하는 먼지처럼 둥실거리며 천천히 내려왔다.

“부풍무영! 언제 봐도 멋지단 말이야.”

화운이 반갑게 소리쳤다.

“이놈! 이제 네 정체를 말해라! 넌 뭐하는 놈이길래 노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냐?”

무영투가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화운을 노려봤다.

“공공무영비를 다 가르쳐 주면 말씀드리기로 했잖습니까? 시간이 없으니 부풍무영(浮風無影)부터 시작하시죠.”

“헉……!”

“방금 마지막에 펼친 것이 부풍무영 맞죠?”

“너…… 이놈……!”

무영투는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무영투는 궁금한 걸 도저히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죽음마저 도외시한 채 호기심을 채우러 다니는 성격이 바로 무영투였다.

화운은 그걸 너무나 잘 알았다.

“가르쳐 줄 테니까, 너도 한 가지 약속해라.”

“다시 살아날 때마다 알려달라는 거요?”

“지금 이 상황도 처음이 아니구나?”

“벌써 열 번쯤?”

“허어……. 내 나이 일흔을 넘은지 이미 오래다. 사는 낙이라곤 세상이 떠들썩할 만한 물건을 훔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재미난 일이 네놈에게 있다는 걸 알았거늘…….”

“그 말도 질리도록 들었습니다. 부풍무영부터 가르쳐 주시죠.”

“끙……. 좋다 이놈. 대신!”

무영투가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누런 황금으로 만들어진 열쇠였다.

손잡이 부분에 대륙(大陸)이라는 글자가 양쪽에 한 글자씩 새겨져 있었다.

“이건 대륙시(大陸匙)라고 한다. 이걸 가지고 대륙전장의 지부 어디든 찾아가면 그곳에서 융통할 수 있는 최대금액까지 받을 수 있고, 횟수 제한이 없다.”

“언제 주시나 했습니다.”

“이것도 알고 있는 것이냐?”

“여러 번 받았었는데 쓸 데가 없어서……. 주시니 챙겨는 놓겠습니다.”

화운이 웃자 무영투가 슬쩍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대륙시랑 부풍무영 둘 중 하나는 빼야겠다.”

“영감님.”

“왜?”

“잔머리 굴리지 마십시오. 그럼 거래가 깨집니다.”

“두 개랑 하나라면 형편이 안 맞지 않느냐?”

“그럼 그만두시죠. 어차피 전 죽었다가 살아나면 되니까요.”

무영투의 얼굴이 급변했다.

“날강도 같은 놈!”

“영감님이랑 전 한 배를 탄 겁니다. 가진 것 다 나눠 쓰고 그래야지요. 그래야 영감님께서 화를 당하셨을 때 제가 죽고 살아나서 미리 막아주고 그럴 거 아닙니까?”

“정말이냐?”

“영감님. 제가 지금은 좀 강합니다. 낭왕은 물론이고 흑야의 환사, 신풍대도 그리고 구룡태자 북궁무결까지 제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과 싸워보았느냐?”

“다 죽여 봤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요. 제가 그렇게 강해지고 나니까 말과 행동의 무거움을 좀 알 것 같습니다.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른다는 절대고수들이 어찌하여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려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화운은 슬쩍 무영투의 반응을 살폈다.

무영투는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한 걸음이 세상에 미칠 파장이 워낙 크기 때문일 것이다.”

“예.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되 함부로 관여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말과 행동의 무거움…… 그러니 작은 약조라도 한 번 내뱉은 것이면 반드시 지켜야지요.”

“당연히 지켜야지.”

“당연하다는 분이 뭐 하십니까!”

“왜?”

“부풍무영을 가르쳐 주셔야지요.”

화운이 빙긋 웃었다.

“……망할 놈!”

무영투가 속은 느낌이 들어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는 가르쳐 주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다는 걸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화운은 어두워질 때까지 무영투에게 공공무영비의 후반부를 배웠다.

특히 부풍무영을 집중적으로 수련했다.

밤이 되자 무영투가 떠났다.

공공무영비 후반부까지 몽땅 내놓게 되었지만 절대 그에게도 손해나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천하제일공방으로 불리는 천병가에 이무기의 비늘로 병기를 제작해 달라고 맡겼다고 했으니 부르는 게 값이 될 신병이기 수십 자루를 가지게 될 것이니까.

무영투가 떠난 후 화운 역시 제천마존의 비동 입구가 있는 곳을 향해 떠났다.

***

만월이 뜬 밤이었다.

새하얀 인영이 달빛을 받으며 검무를 추고 있었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부드럽게 휘두르는 검신에 달빛이 부서졌다.

상큼하게 뛰어올라 검신을 쭉 뻗으니 시리도록 차가워 보이는 검광이 번뜩였고, 부드럽게 휘돌아 단호하게 내리그으니 달빛조차 둘로 갈라졌다.

빙글빙글 휘도는 신형을 따라 새하얀 옷자락이 소용돌이쳤고, 전후좌우 내딛는 발걸음에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한 식경의 시간이 흘러 검무가 비로소 멈추어졌을 때 옥 같은 땀방울이 맺힌 얼굴이 그 고운 용모를 달빛 아래 드러냈다.

“누구냐!”

옥구슬이 구르는 것 같은 고운 음성도 화가 나면 사납다는 걸 깨달은 화운은 공공무영비를 펼쳐 잽싸게 튀었다.

화운은 잠시 동안 멍한 얼굴이었다.

달리는 내내 그 고운 얼굴이 어찌 그리도 아른거리는지.

걸음이 느려 붙잡힌다면 그 고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아……!”

한숨만 절로 나온다.

언감생심인 그림의 떡.

우연처럼 마주친 그녀는 과거의 화운이라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였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두 명의 여인 중 한 명이 바로 그녀였다.

제천지존릉의 비동을 탈출해 산 중턱으로 빠져나온 근처에서 그녀가 검무를 추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 차려!”

주먹으로 머리통을 후려치고서야 정신을 차린 화운은 달리는 속도를 배가하여 산의 정상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바람이 분다.

차가운 기운을 싣고 온 바람이 전신을 식혀주었으나 그 여인의 자태에 흠뻑 취해버린 기분은 걷어주지 못했다.

“내게 여인은 사치다. 생각하지 말자.”

화운은 크게 고개를 저은 다음 제천마존의 비동을 향해 뛰어내렸다.

빠르게 낙하하던 화운의 신형이 비동 입구를 발아래 두고는 갑자기 느려졌다.

부풍무영!

무영투가 펼친 것처럼 티끌은 되지 못했지만, 나름 떨어지는 낙엽은 되어 입구를 지키는 자들의 뒤쪽으로 소리 없이 내려선 화운은 자신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경천보패가 있는 곳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갔다.

뜨거웠다.

흡사 벌겋게 달궈진 무쇠통로 같았다.

하지만 호신강기를 펼쳐 단단히 방비한 화운에게는 그 어떤 열기도 침범하지 못했다.

공공무영비를 펼쳐 한참을 움직이다 보니 좌우로 구불구불 꺾이면서도 아래로 급격히 경사진 통로가 갑자기 위쪽으로 비스듬하게 경사가 졌다.

화운의 몸은 그 경사 끝을 밟고 신형을 날렸다.

‘용암이다!’

발 아래로 시뻘건 용암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전에 죽기 전에 보았던 기억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화운은 멀리 전방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열기와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방해하였으나 건너편에 용암이 침범하지 못하고 있는 웅대한 대전처럼 널찍한 공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기다!’

화운은 눈을 반짝 빛내며 허공을 박차고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던 신형을 다시 한번 뽑아 올렸다.

공공무영비가 팔성에 올라야만 펼칠 수 있는 운해비룡(雲海飛龍)이었다.

운해를 가르고 비천하는 용처럼 멋들어지게 날아간 화운은 잠시 후 바닥에 발을 디뎠다.

거무튀튀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이었다.

그곳에서 보니 안쪽으로 작은 통로가 나 있었다. 건너편에선 절대로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화운은 곧장 걸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일직선으로 걸어간 화운은 안쪽 벽 가까이에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

화운은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놀라운 광경 때문이었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곤룡포를 걸친 노인이 은빛의 수염을 가슴께까지 늘어트린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마치 살아 있어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았다.

“제천마존……!”

화운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운은 노인의 정체를 모른다.

하지만 노인을 보자마자 화운의 머릿속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이름은 제천마존 뿐이었다.

[맞느니라!]

“으헥?”

화운은 깜짝 놀라 부리나케 뒤로 신형을 날렸다.

초월적인 힘이 느껴지는 음성이 머릿속을 갑자기 울렸다.

화운은 잔뜩 경계하는 태도로 노인을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노인은 일어나기는커녕 눈조차 뜨지 않았다.

[죽은 자들을 지배하는 염왕도 이승엔 입김조차 불어넣지 못하거늘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한 노부가 무슨 해를 끼칠 수 있겠느냐!]

“죽었다고요?”

[너에게 미안함을 전하기 위해 억겁의 시간을 기다렸을 뿐, 본좌의 육신은 이미 멈추었느니라.]

화운은 죽었다는 말에 반신반의하여 물었다.

“돌아가셨다면서 어찌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널 만나는 이 순간을 위해 본좌의 혼백을 죽은 육신에 봉인해 두었다. 반각 후면 봉인이 풀릴 것이고 본좌는 억겁의 시간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니라.]

화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라운 말이었지만 사실이라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라 어쨌든 안도했다.

그런데 문득 자신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기다렸다는 것이 의아했다.

“절 아십니까? 제천마존이시라면 수백 년 전 분일 텐데요.”

[무극에 이르러 시공안을 깨친다면 수백 년의 시공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느니라.]

“무극…… 무극, 분명 어디선가…… 어, 어어! 무극! 생각났다!”

중얼거리던 화운이 눈을 있는 대로 치떴다.

억겁의 기다림이 이제야 끝나는구나.

나의 시간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너의 시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이야, 잊지 말거라.

무극(武極)에 이르러서야 너의 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화운은 당황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제천마존을 응시하였다.

[공청석유와 인형설삼은 복용하였느냐? 삼두독각망의 내단도 제법 익었을 터인데…….]

“아!”

화운이 놀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탄성을 터트렸다.

-억겁의 시간은 고통이다. 이것들로나마 위안삼기를 바라노라

그 글을 본 순간 자신에게 한 말인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는데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복용하였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화운은 정중히 청했다.

[내 앞에 있는 것이 경천보패니라.]

화운은 제천마존의 앞을 살펴보았다.

붉은 빛이 나는 돌을 깎아 만든 받침대 위에 오색영롱한 빛을 은은하게 발하고 있는 구슬이 보였다.

경천보패라는 구슬을 본 순간 화운은 자신의 손을 들어보았다.

‘맞아. 구슬 같은 걸 쥐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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