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변고(2)
“선우세가는 전멸했습니다. 함께 움직이던 남궁검가는 가주만 살아남았는데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백리세가도 전멸했고, 황보세가 역시 가주가 부상을 입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는데, 공교롭게도 오대세가만 공격을 당했군.”
“칠대문파를 의심하도록 일부러 그런 겁니다.”
“칠대문파를 의심할 정도로 오대세가가 어설프진 않네.”
“의심을 하지 않더라도 흉수들을 찾아내는 일에 칠대문파가 나선다면 남은 세가에서는 협조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그렇겠지. 흉수들이 노린 것도 그것일 공산이 커. 그리 되면 칠대문파만 상대하면 될 테니까.”
화산의 매화검주와 점창의 일양신수가 나눈 대화였다.
일양신수가 나이도 많고 강호에서 따지는 배분도 한 세대 위였다.
두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한쪽이 시끄러웠다.
“무슨 일이냐?”
매화검주가 호통을 치듯 물었다.
“웬 청년이 선우세가가 어디에 있냐며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거 하나 막지 못해 시끄럽게 한단 말이냐!”
“데려와 보게.”
일양신수의 말에 매화검주가 돌아봤다.
“선우세가 사람이라면 막을 명분이…… 아니 막아서는 안 되겠지.”
“자칫 증거들이 훼손될 수도 있습니다.”
“증거보다 중한 게 사람 마음이네. 일단 데려오라고 하시게.”
“데려오너라.”
매화검주의 명에 화산파의 무인들이 한 청년을 경계하며 데려왔다.
다름 아닌 화운이었다.
“선우세가 사람인가?”
일양신수가 물었다.
“선우세가의 가모께서 보내셨습니다.”
“선우세가의 가모라면 병석에 계신 걸로 아네만?”
“다 나으셨습니다.”
“그런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모께서 보내셨다면 절강에서 온 거란 말인가?”
“예.”
“이렇게 빨리?”
“……!”
화운은 대답을 않고 쳐다봤다.
뭘 그리 따지느냐는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구나!”
매화검주가 호통을 쳤다.
순간 화운의 신형이 느닷없이 허공으로 솟구쳐 순식간에 모두의 눈 밖으로 사라졌다.
매화검주와 일양신수는 화운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막대한 공력의 움직임을 감지했었다.
하여 공격이라도 하려는 줄 알고 그에 대비하느라 쫓아갈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은 두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일어났다.
쿠-웅!
벼락같이 내리 꽂히며 화운이 되돌아온 것이다.
“이제 설명이 되었습니까?”
화운의 시선이 일양신수에게 향했다.
매화검주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화운의 목에 겨누었다.
“정체가 수상쩍구나!”
“당신보다 빠르면 수상한 겁니까?”
“이놈!”
매화검주가 역정을 낼 때였다.
“점창의 일양이라고 하네. 자넨 누군가?”
“화운, 선우세가가 제 외가입니다.”
일양신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매화검주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걸 어찌 믿는단 말이냐!”
원래 좋아하지 않던 화산파인 터라 화운의 반응이 좋을 리 없었다.
스릉!
화운이 검을 뽑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검이었으나 화운이 들어 보이자마자 새파란 강기를 잔뜩 머금더니 금세 검끝에 검환으로 응집하였다.
그 광경에 매화검주와 일양신수의 얼굴이 급변할 정도로 놀랐다.
“당신을 상대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음에도 이만큼이나마 참고 있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정파라는 허울을 조금이라도 지키겠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자극하지 마십시오.”
여차하면 난리를 칠 것이니 적당히 하라는 엄포였다.
크게 놀란 만큼이나 자존심이 상한 매화검주의 얼굴이 분노로 부들거렸다.
다행히 일양신수가 재빨리 나섰다.
“알겠네. 정파에 자네와 같은 신룡이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네. 둘 다 검을 거두시게. 그리고 자넨…… 아, 내가 안내해 주겠네.”
화운이 검을 거두자 일양신수가 직접 안내했다.
화운은 일양신수를 따라 계곡 안쪽으로 갔다.
“적들의 공세가 거세서 이쪽으로 몰린 모양이네. 하아! 대체 어떤 자들인지…….”
일양신수가 여러 말을 했지만 화운은 대꾸도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선우세가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전에는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분노조차 내지 않고 기다린 것이다.
두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그런 화운의 마음을 짐작한 일양신수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계곡 안쪽에 당도한 화운은 목불인견의 참상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을 무수히 겪고 있는 화운이기에 참혹하게 죽어 있는 시체들 사이를 담담히 걸어가 선우세가주와 선우유성의 시체를 찾아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이구나.”
선우유성은 머리가 뽑혔고, 선우세가주는 팔다리가 뽑힌 데다 가슴팍이 박살이 나 있었다.
화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선우유성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죽는 순간까지 느꼈을 두려움과 고통을 생각하고 뇌리 깊이 각인한 다음 돌아섰다.
“흉수는 아직 찾지 못했다네.”
일양신수가 말했다.
“흉수는 늘 가까이에 있는 법입니다.”
“천사련을 의심하고 있군.”
“그들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들이라는 증거가 없네. 남궁검가주가 정신을 차리면 확실해 질 것이니 그때까지만 함께 기다리도록 하세.”
일양신수도 천사련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어 증거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일양신수는 고수인 화운이 힘을 보태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화운은 공공무영비를 펼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화운이 작정하고 펼친 것이라 일양신수조차 막지 못했다.
***
날벼락!
쾌청하게 마른 날에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그때의 기분이 궁금하다면 지금 낭왕에게 물어보면 된다.
“남궁검가와 선우세가를 공격한 이유가 뭐지?”
느닷없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검환을 날려대더니 다 죽어가는 이의 멱살을 붙잡고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니 낭왕으로써는 황당할 수밖에.
“넌 남궁검가주님의 상대가 못 돼! 누구냐? 선우세가와 남궁검가를 공격한 자가!”
화운의 말에 다 죽어가던 낭왕이 격분했다.
“나다, 이 씹어 먹을 놈아! 남궁가주의 팔다리를 잘라 버린 게 바로 이 몸이시다! 선우세가라고? 내 칼 한 방에 가슴이 갈라져 뒈진 놈이 무슨 세가라고! 푸하하하!”
낭왕은 통쾌하게 웃던 중에 머리통이 터져 죽었다.
낭왕이 말한 것과 선우세가주의 사인이 다르다.
흉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화운은 곧장 공공무영비를 펼쳐 사라졌다.
“남궁검가와 선우세가를 공격한 이유가 뭐지?”
화운이 다 죽어가는 도탑주의 멱살을 잡고 물었다.
“뭔 개소리냐! 우린 철수해도 좋다는 명을 받고 돌아가는 길인데……!”
“아냐? 너도 아니라고? 그럼 누구…… 그래, 그놈! 태자는! 구룡태자는 어디에 있느냐?”
“구, 구룡성에…….”
“거짓말 마라. 그는 제천마존의 비동에 왔었다. 지금 어디로 간 것이냐?”
“큭큭큭! 련주 외에는 고개조차 숙이지 않을 정도로 오만한 놈이 제천마존의 무공에 혹해서 비동까지 와? 개가 웃을 일이다!”
“……!”
“누명을 씌우려거든 상대를 잘 골라라, 멍청아!”
도탑주는 비웃다가 목이 꺾였다.
화운은 확신했다.
구룡태자가 흉수라는 걸.
화운은 구룡태자의 행방을 찾아 공공무영비를 펼쳐 사라졌다.
***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호숫가에 제법 운치 있게 세워진 팔각정자.
여느 호숫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곳보다 돋보이는 이유는 그 안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백발의 청년 때문이리라.
구룡태자 북궁무결.
바로 그다.
“예상대로 신중한 모습입니다.”
북궁무결 뒤쪽에 검은 구름이 일어나더니 곧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흑야의 주인 환사였다.
환사는 북궁무결의 한 걸음 뒤에 자릴 잡았다.
“남궁검가의 소가주가 죽은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능력이 안 되면 사라져야지.”
“남궁검가는 대대로 대기만성입니다. 게다가 현 가주보다 자질이 더 뛰어난 놈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줄 이유가 없어.”
북궁무결의 냉정한 반응에 환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백봉조차 일검에 베어버렸으니……!’
환사가 백봉의 죽음을 떠올릴 때였다.
저 멀리서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것이 있었다.
“뭔 놈의 새가 저렇게 빠르지?”
“새가 아냐.”
“예?”
환사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저 멀리 사라져가던 것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더욱 빠른 속도로 팔각정자를 향해 날아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환사가 경계심을 발동시킨 순간 팔각정자로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콰앙!
팔각정자가 박살이 나면서 땅거죽이 찢어져 흙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감히 어떤 놈이……!”
환사가 분노로 소리친 순간 뿌연 흙먼지 속에서 잔뜩 억누르고 있는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궁검가와 선우세가를 공격한 이유가 뭐냐?”
화운이었다.
잔뜩 억누르고 있음에도 살기가 요동쳤다.
환사는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북궁무결은 원래 말수가 적었다.
특히 적 앞에서는.
“정사대전을 바라는 거냐? 아니면 무공을 과시하여 우월감을 만끽하기 위해서냐?”
화운의 목소리는 폭발 직전의 화산 같았다.
그래서일까, 북궁무결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지?”
“널 죽일 사람.”
화운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한 순간 북궁무결로부터 새하얀 섬광이 폭발하였다.
번-쩍!
찰나의 순간에 피어오른 섬광이었다.
얼마나 빨랐는지 구름처럼 일어난 흙먼지조차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끝났군!’
환사는 확신했다.
북궁무결의 이번 공격이 완벽하게 적중했다는 걸.
그러나 예외라는 건 난데없이 찾아오는 법.
“대답해 봐. 남궁검가와 선우세가를 공격한 이유가 뭐냐?”
뿌연 흙먼지 속에서 화운의 목소리가 들리자 환사가 흠칫 놀랐다.
반면 화운을 공격했던 북궁무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놀랐음을 드러냈다.
“누구지?”
“화운. 선우세가가 내겐 외가다. 자, 마지막으로 묻겠다. 선우세가를 공격한 이유가 뭐냐?”
화운의 목소리는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가까스로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날 꺾어봐. 그럼 다 알 수 있을 거다.”
북궁무결이 호승심을 드러낸 순간.
번-쩍!
시퍼런 섬광이 뿌연 흙먼지를 가르고 튀어나왔다.
북궁무결이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다.
카앙!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북궁무결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소리만 컸을 뿐 검을 통해 전해진 충격이 예상보다 가벼웠다.
그러나 그 이유가 금방 드러났다.
“크윽!”
신음이 들렸다.
북궁무결이 고개를 돌렸다.
환사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오른손 손바닥과 옆구리가 갈라졌다.
화운의 일검을 피하지 않고 막으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선우세가를 공격한 자들은 전부 죽는다.”
화운이 흙먼지를 헤치고 튀어 나왔다.
맹수가 먹잇감을 덮치듯 북궁무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북궁무결은 그 자리에 태산처럼 서서는 마주 검을 휘둘렀다.
콰앙!
이전에 받았던 충격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충격파가 폭발했다.
사혼구검의 오 초식 사혼폭의 발휘였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화운이 검을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렸다.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섭다.
북궁무결이 허리를 비틀며 검을 쳐올렸다.
쿠-웅!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무겁게 터졌다.
사혼붕!
사혼구검의 육 초식.
화운은 북궁무결이 더 버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빙글 휘돌며 수중의 검을 폭풍처럼 휘둘렀다.
칠 초식 사혼혈.
뚜다다다당!
북궁무결의 백검이 미친 듯이 휘둘러지며 화운의 검세를 막았다.
폭풍 같았던 격돌이 끝난 순간.
백궁무결의 눈앞이 위아래로 완벽하게 갈라졌다.
거침이 없다.
완벽하다.
걸리는 건 모조리 갈라버릴 절멸의 일검.
팔 초식 사혼멸!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검을 세워 막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검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은 간단치 않다.
“크음!”
북궁무결의 입에서 기어코 신음이 흘러나온 순간 화운의 검이 지극히 간결한 일초를 펼쳤다.
단 한 점을 찌르는 검초.
사혼구검의 마지막 구 초식 사혼종극!
북궁무결은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전력을 다해 백검을 들어 막았다.
새하얀 강기가 검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화운의 검은 거침이 없었다.
새파란 기운을 머금은 화운의 검끝이 북궁무결의 검면을 찍은 순간.
쾅!
굉음과 함께 북궁무결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휙!
한 줄기 시커먼 기운이 날아가는 북궁무결을 휘감아 검은 안개 속으로 끌고 갔다.
흑야의 환사.
그가 북궁무결을 구하기 위해 흑야의 환신을 펼친 것이다.
“누가 보내줄 것 같으냐!”
화운이 성난 맹수의 포효 같은 고함을 터트리며 검을 뻗었다.
순간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새파란 빛의 고리 수십 개가 흑야의 환신을 향해 빗발치듯 날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