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복수를 하다
검멸!
화운은 자신만의 검환의 경지를 이루었다.
굳이 고리형태의 검환으로 발전시킨 건 검신에 무수히 많은 검환을 한꺼번에 생성하는 게 더 편해서였다.
검멸을 발휘하면 검신에 너울거리는 새파란 강기를 볼 수 있다.
그냥 강기가 아니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무수히 많은 빛의 고리가 검신을 빽빽하게 휘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검멸이 무서운 건 바로 그래서다.
일반적인 검환보다 더 강하게 발전시킨 검환 수십 개를 한꺼번에 발출하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파괴의 검공이기 때문이다.
콰콰콰콰콰!
거대한 검은 안개처럼 보이는 흑야의 환신이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악!”
“크윽!”
화운은 순식간에 흩어지는 검은 안개를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이 보였다.
육신에 구멍이 뻥뻥 뚫리다 못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자신이 쏟아낸 피바다에 나뒹굴고 있는 환사.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어디론가 떨어져 날아가버린 북궁무결.
화운은 북궁무결 앞에 섰다.
“왜냐? 선우세가를 공격한 이유가 뭐냐? 널 꺾었다. 말해라!”
“네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면 널 먼저 찾아갔을 텐데 아쉽군.”
북궁무결은 담담했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없음에도 땅에 박아놓은 검에 의지해 꼿꼿이 서 있었다.
삶의 끄트머리에 선 자.
무너지고 붕괴되어야 할 자가 말간 눈빛으로 화운을 응시했다.
“난 열을 가지고도 하나를 더 가지려는 늙은이들의 탐욕을 경멸한다. 열을 가졌으니 이제 그만 만족한다며 자리에 웅크리고만 있는 그들의 나태함을 혐오한다.”
무겁게 뇌까리듯 말한 북궁무결.
화운은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로 북궁무결을 쏘아봤다.
“무인으로 태어났으면 세상을 향해 포효 한 번은 해봐야지. 내력 없이 검 한 자루 달랑 쥔 자라도 스스로 무인이라 생각한다면 당차게 한 번 휘둘러보아야 하지 않겠나.”
무심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북궁무결.
“무인의 가슴은 차갑고, 손속은 비정하니 죽음이 지천일 것이나 그것이야말로 무인들의 세상, 거북하다면 손에서 검을 놓고 무인임을 포기해야지.”
잠시 말을 멈춘 북궁무결은 화운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왜 그랬냐고? 자넬 위해서네. 날 위해서고 천하에 있는 모든 무인들 그리고 먼 훗날에 올 우리 다음세대 무인들을 위해서네. 강물은 흘러야 하고, 바다는 자유로워야 하네. 그래야 생동감 넘치는 세상이 될 것이니까.”
“무인들이 제 잘났다고 미쳐 날뛰는 세상을 만들려고 그랬다는 것이냐?”
“맞네, 맞아. 무인들이 미쳐 날뛰는 세상. 그런 세상을 보고 싶네. 그게 무인들의 세상이니까.”
“미친놈!”
“내가 죽더라도 자네가 있어 안심이네. 정사대전의 불씨는 당겨졌고, 자네가 등장했으니 늙은이들도 가만히 있지 못하겠지.”
“좆까지마 새꺄! 절대 그런 세상은 안 만들 거니까!”
욕설과 함께 성질을 터트린 화운이 북궁무결의 검을 걷어차 버렸다.
“크윽!”
북궁무결이 신음하며 고꾸라졌다.
“선우세가를 공격한 건 니가 아니야! 누구냐? 선우세가를 공격한 새끼가 누구냔 말이다!”
***
객잔.
술 냄새와 음식 냄새가 풍겨야 할 객잔이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화운은 객잔 앞에 내려섰다.
선우유성을 죽인 자.
북궁무결은 끝내 그 자를 말해주지 않았지만 화운은 이렇게 찾아냈다.
사방팔방을 미친 듯이 뒤진 결과였다.
객잔 안에 있는 살육자.
아직 모습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가 분명하다.
이건 경지에 오른 무인의 직감이다.
턱!
화운의 객잔 출입문 앞에 발을 디뎠다.
끼이이익!
낡은 경첩이 화운이 왔음을 알렸다.
문이 열리자 객잔 안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머리통이 부서지고 팔다리가 뽑히고, 심지어 몸통이 위아래로 찢어진 시체들 천지였다.
화운의 두 눈에 분노의 불길이 솟구쳤다.
남궁검가와 선우세가가 당한 모습과 똑같았다.
쿵!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 한복판에 털썩 앉아 술항아리를 번쩍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삼십 대 쯤 되어 보이는 괴인이 있었다.
그가 술항아리를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치 큰 산악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거인.
보통의 성인을 아이로 만들어버릴 큰 키와 거대한 체구였다.
“넌 누구냐? 말해라. 누군지 알고 죽여야 재밌다.”
괴인이 화운을 향해 입맛을 다셨다.
“너구나! 너였어!”
“뭐가 말이냐?”
“선우세가를 공격한 게 너였어.”
“선우세가?”
“남궁검가와 선우세가를 공격한 게 바로 너였어.”
“남궁검가라면 내가 죽인 게 맞다. 흐흐흐!”
괴인이 웃음을 흘린 순간 그의 앞으로 새파란 검환이 날아왔다.
꽈앙!
괴인은 검환을 피하지 않았다.
큼지막한 손으로 파리 쫓듯이 휘저어 막았다.
“억? 아프네? 너 보기보다 강하구나!”
괴인이 아픈 손을 주무르며 화운을 쏘아봤다.
검환이 무엇인지 아는 이가 보았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검환을 맨손으로 막는 자.
화운도 놀라긴 했다.
하지만 그 보다는 분노의 감정이 더 컸다.
화운은 다시 검환을 날렸다.
꽈앙!
마경이 다시 손을 휘둘러 막았다.
이전과 같았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손을 바꿨다는 것이다.
“손이 몇 개인지 보자!”
화운이 다시 검환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엔 화운도 달랐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동시에 날렸다.
괴인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하지만 곧 입매를 비틀어 음산하게 웃었다.
“암흑대절을 보여주마!”
괴인의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
손과 팔뚝 역시 그랬다.
꽝-꽝!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폭음.
괴인의 전신은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검은 기운으로 충만했다.
“크흐흐흐! 이 몸은 수수깡 같은 네놈들이랑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신감과 오만함이 가득했다.
거기에 사람을 찢어 죽이는 악랄함까지.
화운은 걸었다.
기고만장한 괴인을 향해 걸어가며 살기에 찬 엄포를 했다.
“열 번 찍어도 넘어가지 않으면 백 번을 찍어주겠다.”
“멍청한 놈! 검환이 무슨 쌓아놓은 화살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코웃음 치는 괴인.
화운이 그런 괴인을 향해 다가가며 검환을 날렸다.
꽝!
암흑대절을 발휘한 괴인이 웃으며 막았다.
꽝!
괴인은 여전히 웃었다.
꽝!
괴인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다섯 번, 열 번을 날려도 거뜬히 받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기세등등했다.
꽝! 꽝!
화운이 검환 두 개를 동시에 날렸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공력이 다 떨어지면 그 비루한 몸으로 싸울 테냐!”
괴인이 비웃었다.
여전히 그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꽝! 꽝!
화운이 두 개의 검환을 계속 날렸다.
꽝! 꽝!
괴인은 검환을 기계적으로 날려대는 자를 처음 보았다.
다가가는 걸음도 검환을 두 개씩 날려대는 모습도 똑같았다.
그래도 괴인은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꽝! 꽝! 꽝!
검환이 세 개로 늘어났다.
“마지막 발버둥이냐! 어림없다!”
괴인이 소리쳤다.
이제 한두 번만 더 막으면 끝일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지금까지 날려댄 검환의 숫자만으로도 천하가 놀랄 일이지만, 괴인 자신 같은 일반적인 상리를 벗어난 괴물도 있으니 자신과는 또 다른 괴물 같은 고수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꽝! 꽝! 꽝!
괴인은 거뜬히 막았다.
암흑대절은 검환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
꽝! 꽝! 꽝! 꽝!
검환이 네 개로 늘었다.
괴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지금껏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 이제야 불현듯 떠올랐다.
‘어떻게 검환을 동시에 세 개, 네 개를 날릴 수 있는 거지?’
두 개까지는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검환을 발휘할 수 있는 고수라면 능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상은 다르다.
차원이 다른 훨씬 더 상승의 경지에 올라야만 가능할 것 같다.
괴인은 살짝 흔들리는 눈빛으로 화운을 예의주시했다.
꽝! 꽝! 꽝! 꽝!
검환 네 개가 동시에 날아왔다.
심각한 건 처음 한 개를 날릴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펼친다는 것이다.
검환들을 쳐대는 두 손이 욱신거리는 게 착각인가?
꽝! 꽝! 꽝! 꽝! 꽝!
검환의 숫자가 다섯으로 늘어났다.
괴인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검환도 그냥 검환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검환과는 다르게 고리 형태였다.
그건 곧 검환조차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고차원의 고수라는 뜻!
꽝! 꽝! 꽝! 꽝! 꽝!
괴인은 검환을 막아낸 두 손을 들여다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두 손이 아프다.
충격과 고통으로 잘게 떨리고 있다.
괴인은 흔들리는 눈으로 화운을 바라봤다.
이때 화운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그제야 괴인은 볼 수 있었다.
고리 형태의 새파란 검환이 검신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것을.
꿀꺽!
괴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순간 화운이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다기보다는 세차게 뻗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검멸!
검환이, 검환의 고리가 검신에서 쏟아져 나왔다.
무려 열 개다!
괴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꽝꽝꽝꽝꽝꽝꽝꽝꽝꽝!
“쿨럭! 우웩!”
시커멓게 죽은피를 토한 괴인이 힘겹게 눈을 들었다.
화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는 또다시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검신이 새파랗게 너울거렸다.
“그만해라……. 너무…… 많이 아프다…….”
“너 같으면 동생의 머리를 뽑아버린 자인데 그만 두겠냐!”
“동생…… 글쿠나. 내가 니 동생의 머리를 뽑았던……. 그래, 죽여라. 죽여. 머리통 뽑아라. 그거 재밌다. 크큭큭!”
“미친 새끼, 머리통이 뽑혀도 그렇게 웃는지 보자!”
“그래, 뽑아라! 나 마경이 이렇게 가는구나! 푸하하하하!”
“마경?”
“마경(魔鯨) 몰라? 마도의 고래! 그게 바로 이 몸이시다! 크하하하하!”
“마도 놈이 왜? 니들 대체 무슨 꿍꿍이냐?”
“니들?”
“너랑 구룡태자.”
“아! 그 수수깡?”
“그래, 그 수수깡이랑 무슨 꿍꿍이냐?”
“어느 날 그놈이 찾아왔었다. 세상이 너무 재미없지 않냐고.”
“……!”
“늙은이들이 천하를 나눠먹어서 우리처럼 피 끓는 젊은이들이 맘껏 놀 곳이 없지 않냐더군.”
“그래서 정사대전을 일으키자?”
“어. 맞아. 정사대전을 일으키자고 했어. 정마대전, 사마대전까지 일으켜서 아주 난장판을 만들어 보자더군. 그래야 우리처럼 피 끓는 무인들이 맘껏 날 뛸 수 있을 거라나.”
힘은 넘쳐나는데 세상은 전 세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함부로 싸우는 것조차 막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시간의 반복 속에서 무공을 익힌답시고 맘껏 싸워본 화운 자신도 가끔은 날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사파인으로 태어난 북궁무결이야 오죽 하겠는가.
이해는 한다.
하지만 선우세가를, 선우유성을 죽인 이상 너희들은 모조리 죽는다.
“니들이 그러니까 사파고 마도란 소리를 듣는 거다. 너도 구룡태자 곁으로 보내줄 테니까, 나란히 염라대왕 앞에서 벌을 받아라!”
“야! 벌을 받으려면 다 같이 받아야지! 더런 수수깡 같은 놈아! 패룡 새끼는 같은 정파라고 살려주는 거냐!”
“패룡?”
“황보가의 소패룡 몰라?”
“정파새끼도 가담했다고?”
“아, 몰랐냐? 그 새끼가 제일 적극적이었다. 제 아비까지 내놓았으니까.”
“……!”
화운은 할 말을 잃었다.
미친놈 중의 미친놈이 혈육까지 죽여 가며 제 욕심을 채우려는 놈인데, 정파에 그것도 명문세가에 그런 놈이 있을 줄이야.
“그만! 아프다. 이제 가고 싶다. 얼른 뽑아라!”
마경이 소리쳤다.
화운은 그를 힐끔 본 후에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단번에 뽑아버렸다.
“끄악!”
마경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왜냐고 쳐다봤다.
화운은 말없이 반대쪽 팔까지 뽑아버렸다.
“끄으으윽! 머리통! 얼른…… 뽑아!”
마경이 소리쳤다.
화운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마경을 싸늘히 내려다보았다.
“뽑아준다고만 했으니 약속은 지켰다.”
“아, 안 돼! 죽여! 죽이라고! 어서 뽑아!”
“사람 머리통 뽑는 게 재밌다고? 짐승 같은 놈! 죽는 순간까지 벌레처럼 꿈틀거려라!”
화운은 침을 뱉고는 가버렸다.
“안 돼! 돌아-와!”
마경이 울부짖었으나 화운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마경은 자신이 처참하게 죽인 시체들 한복판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