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소패룡 황보장(1)
소패룡 황보장.
그는 철탑 같은 큰 체구를 자랑했다.
뿐만 아니라 체구에 걸맞는 당당한 기도를 가졌다.
천년소림의 나한당주, 대무당의 우진궁주, 화산파의 매화검주, 아미파의 멸절신니, 점창파의 일양신수!
정도십주 중 다섯에 남궁검가주를 비롯한 네 명의 가주들!
그리고 수백에 달하는 정파 무인들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특출난 발군의 기도를 과시하고 있어 보는 순간 화운의 신경을 자극했다.
‘나쁜 새끼! 난 너의 비밀을 안다!’
화운은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아버님은 세가로 모셨습니다. 가시는 길 편히 가시도록 염을 해드리는 게 자식 된 도리이나 언제나 무인이시길 바랐고, 자식들 역시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천사련의 발호가 임박한 때에 제가 그분의 곁만 지키고 있다면 염라왕의 뺨을 치고라도 절 훈계하기 위해 뛰쳐나올 분입니다. 하여 모자란 힘이나마 한 팔 거들기 위해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황보장의 힘찬 음성이었다.
패도적인 무학에 성격 역시 주저를 모르는 사내다워 늘 추종자들을 몰고 다니던 그답게 지금도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동경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거들긴 개뿔! 지 탐욕을 못 이겨 아비조차 제물로 던져 버리고 침 흘리는 개처럼 달려온 주제에!’
모두가 경탄하는 가운데 화운만이 못 마땅했다.
“황보세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목을 집중시킨 황보장이 주위를 둘러본 후 큰 소리로 외쳤다.
“그저 복수 때문이 아닙니다! 저 간악한 천사련으로부터 천하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선친의 가르침 그대로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황보장이 주먹을 불끈 쥐어 머리위로 쳐들었다.
그리고 더욱 힘차게 외쳤다.
“그 어떤 임무든 맡겨만 주십시오! 천사련의 개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어디든 황보세가가 달려갈 것입니다! 천하대의와 정당한 명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대의와 명분으로 천사련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이 두 주먹으로 천사련의 예봉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멸사봉정!”
황보장이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일갈을 터트리자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복창을 했다.
“멸사봉정!”
온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쳐대자 거기에 동화되어 다른 정파의 무인들도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
“멸사봉정!”
“멸사봉정!”
“의기천추!”
“의기천추!”
황보장은 대단한 선동가였다.
경험 많은 정파의 수뇌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휩쓸렸다.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화운은 선우유성마저 따라서 복창하자 부아가 치밀었다.
‘저 새끼 안 되겠군!’
화운이 뭔가를 작심할 때였다.
황보장이 나한당주와 우진궁주 등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맹이 만들어지면 이 아둔한 놈을 최선봉에 세워주십시오!”
진심이 느껴질 정도로 간곡한 모습이었다.
젊은 무인들을 홀려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경계하던 노고수들조차 지금의 모습에는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황보 소협에게 맞는 자리가 있을 것이니, 그만 허리를 펴시게.”
“저보다 더 선봉에 서는 자가 있다면 그자와 겨뤄서라도 선봉에 서고야 말겠습니다.”
“허허! 알았으니 그만 하시게.”
우진궁주의 말에 황보장이 허리를 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해야지. 자네 같은 젊은이가 있으니 정파의 앞날이 밝을 것이네.”
“허면 승낙해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패룡대!”
다시 한번 허리를 조아린 황보장이 한쪽을 향해 일갈을 터트렸다.
“예!”
“예!”
“옛!”
“분부만 내리십시오!”
여기저기서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노고수들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놀라는 가운데 황보장이 크게 외쳤다.
“천사련이 발호하였으니 이제 패룡대가 세상에 나올 때가 되었다. 나서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황보장 앞으로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앞다퉈 몰려온 것이다.
오대세가의 직계 혈손들이, 칠대문파의 일대제자들이 대거 포함된 이들로 그 숫자가 삼십이 넘었다.
황보장은 자신 앞으로 모인 이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본 후 당황하고 있는 우진궁주 등을 향해 돌아섰다.
“평소 절 따르는 동생들입니다. 소속 문파가 다르고 가문이 다르지만, 무림강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자고 피로써 맹세한 형제들입니다.”
“아, 그런가…….”
“선봉에 서겠다는 거 그저 입바른 말이 아닙니다. 저와 패룡대가 기꺼이 선봉에 서겠습니다. 허니 패룡대의 이름을 맹의 조직도에 가장 먼저 올려주십시오!”
“올려주십시오!”
“올려주십시오!”
황보장을 따라서 패룡대 모임의 후기지수들이 일제히 복창하니 우진궁주 등은 서로를 돌아보며 당황했다.
그러자 멸절신니가 특유의 속 시원한 말로 나섰다.
“애들이 신나게 놀겠다는데, 늙은이들이 뭔 눈치를 보고 그래. 그냥 그렇게 하라면 되지. 해! 해라 해! 지금부터 함께 몰려다니고 맹이 만들어질 때까지 니들이 경계도 서고 여기저기 수고 좀 해. 그럼 누가 감히 니들을 해체하겠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황보장이 멸절신니를 향해 냉큼 허리를 조아렸다.
“험험! 어차피 자넨 황보세가의 대표 자격으로 나서야 하니 맹주님을 선출하고 조직을 구성할 때 함께 이야기해 봄세.”
눈치를 보던 우진궁주가 결국 돕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나한당주와 일양신수는 그저 웃는 낯으로 고개만 끄덕였고 매화검주는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황보장과 패룡대는 강한 인상을 남기며 첫 번째 무력대로 선점이 되다시피 했다.
‘꽤 오랫동안 준비한 모양이네! 미련한 곰이 아니라 영악한 너구리구만!’
화운은 그렇게 삐딱한 시선으로 황보장을 예의주시했다.
그런데 제법 요란했던 상황이 일단락되자 그가 다가왔다.
노고수들과 남궁검가주를 비롯한 어른들은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보장이 백리연 쪽으로 움직이자 그가 없는 자리에서 좀 전에 있었던 대화에 대해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연매! 이야기 들었다. 다친 덴 없는 것이냐?”
“전 괜찮습니다. 가주님 소식은 들었어요. 이쪽도 어수선해서 가뵙지 못했어요.”
“세가에 잘 모셨으니까,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함께 뵈러가자.”
“예.”
“그건 그렇고 찾았느냐?”
“예?”
“내가 그랬잖느냐. 천하를 뒤져서라도 네 짝을 찾아보라고. 만일 찾지 못하거든 나한테 오라고 말이다.”
“혼례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건 너의 생각이고, 혼사가 어디 너 혼자만의 일이더냐? 정사대전까지 발발하게 되어 오래 못 기다린다. 찾고 싶거든 서두르는 게 좋을 게다. 한두 달 기다려보고 여전히 혼자이면 백리숙부님께 널 데려가겠다고 찾아갈 것이다.”
“그러지 마세요.”
“그때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넌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백리연은 황보장의 체면이 있어 사람들 앞에서 차마 싫다는 내색을 할 수가 없어 인상만 썼다.
‘내가 차리고 있는 밥상에 숟가락을 내밀어? 이 새끼가 진짜 매를 버는구나!’
옆에서 보고 있던 화운은 속에서 천불이 났다.
아닌 척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백리연에게 신경 쓰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제 짝인 양 멋대로 휘두르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것도 제 탐욕을 채우고자 피와 살을 준 아비를 제물로 바친 놈이!
‘이 새끼를 어떻게 뭉개줄까?’
화운이 바로 앞에서 이를 가는 줄도 모르고 황보장은 제 세상인 양 막무가내로 굴었다.
“우선 패룡대에 들어오너라. 너 정도 실력이면 부대주 자리가 어울릴 게다.”
“아니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너도 어차피 무력대에 들어가야 할 텐데. 왕래가 없어 어색할 수밖에 없는 무당명검이나 화산기룡 같은 친구들의 밑으로 들어갈 바에야 차라리 나와 함께 있는 게 편치 않겠느냐.”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살짝 혹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는데 함께 지내다간 더 자기 여자인양 할까봐 망설여졌다.
“내가 백리숙부님께 말씀드려 너 역시 패룡대로 오게끔 하마.”
백리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보장을 좋게 평가하는 백리세가주라면 패룡대에 기꺼이 보내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전…….”
우물거리는 백리연에게 한 사람의 존재가 구세주처럼 퍼뜩 떠올랐다.
“선우세가의 소협들과 함께 들어가게 해주세요.”
“선우세가? 선우세가 누구?”
황보장이 뜻밖이라는 표정에 이어 궁금하다는 표정을 연달아지었다.
“여기 화운 소협과 선우유성 소협이요.”
백리연이 화운과 선우유성을 가리키자 황보장의 시선이 두 사람을 쓱 쓸어보았다.
저자의 왈패처럼 삐딱하게 서 있는 화운과 수줍음 많은 아가씨처럼 얼굴부터 붉히는 선우유성.
‘별 볼일 없는 놈들이군!’
평가를 마친 황보장이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너희들도 이제부터 패룡대다. 기존의 형제들이 다들 대단한 실력들을 갖추고 있으니 잘 따라다니다 보면 한가락씩 얻어 배울 수 있을 거다.”
선심 쓰듯 말하는 황보장의 모습에 백리연이 안절부절못했다.
“어찌 그러는 것이냐!”
황보장이 물었다.
하지만 백리연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화운에게 큰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너무 미안해서다.
천하의 구룡태자를 일방적으로 날려 버리고 백리세가를 구해준 화운이다.
그런 화운을 함부로 취급하고 있다.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황보장이 어떤 성격인지 잊어버리는 씻을 수 없는 판단 실수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화운의 정체를 말할 수도 없다.
화운이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것마저 저버릴 순 없잖은가.
백리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미안한 마음으로 화운을 돌아봤다.
그런데 화운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째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됐어! 너 이제 뒈졌어!’
내심 히죽 웃은 화운은 선우유성을 돌아봤다.
“유성아! 패룡대에서 받아준 댄다. 얼른 줄 서자.”
“형!”
“왜?”
“난 선우세가의 소가주야.”
“그치. 넌 선우세가의 소가주지. 근데 왜?”
“난 위에서 정식으로 내려온 명령이 아니면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
선우유성이 소가주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화운은 선우유성이 기특해서 웃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깟 몰락해 버린 세가의 자존심 때문에 소패룡 황보장 대형의 호의를 무시하겠다는 거냐!”
차가운 비웃음이 터졌다.
화운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변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우문가의 잠룡 우문산이다.
주위의 다른 이들도 비슷한 얼굴로 비웃고 있었다.
“황보장 대형.”
화운이 불렀다.
“뭐냐?”
“우리가 막내가 되어야 하는 건 실력이 없어서겠지요?”
“넌 나이가 좀 있어 보인다만, 무인은 나이가 아니라 실력으로 말하는 법이다.”
황보장은 재밌게 돌아간다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 역시 평소에 선우세가를 더 이상 오대세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심지어 선우세가주가 이 자리에 있어도 그가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선우세가의 소가주에게 선심 쓰듯 패룡대에 들어오라고 한 것이었다.
“내 자리를 찾아야겠습니다.”
“실력이 된다면 찾아봐라.”
황보장이 허락했다.
우문산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잘 되었다며 검자루를 잡으며 한 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화운이 선우유성을 불렀다.
“유성아!”
“어, 형!”
“형이 선우세가가 가진 힘을 지금 보여줄게.”
“……!”
선우유성은 화운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몰라 대답도 못했다.
그런데 화운이 주변을 둘러보는 게 아닌가.
“뭐하는 것이냐! 선우가주님이라도 찾는 것이냐!”
우문산이 비웃었다.
화운은 주위에 찾는 게 안 보이자 고개를 들고 둘러보았다.
그러다 적당한 게 보이자 손을 뻗었다.
“별짓을 다하는구나! 이젠 산신령께 도와달라고 빌기라도 하는 것이냐! 쯧쯧! 차라리 실언을 했다고 인정해라. 대형께서 허락하신다면 없었던 일로 눈감아줄 아량 정도는 있다.”
우문산이 혀를 차가며 비웃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우-우-웅!
대기가 울었다.
화운의 손에서 뻗어 나온 강력한 기운에 대기가 몸서리를 치듯 울어댔다.
그리고 곧 경악스런 일이 벌어졌다.
우지끈!
어른 팔뚝만한 두께의 생목의 가지가 부러지더니 화운의 손으로 빨려들 듯 날아온 것이다.
그 믿지 못할 광경에 패룡대 전체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황보장 조차 팔짱을 풀고 석상처럼 굳었다.
생목의 굵은 가지를 손에 쥔 화운은 적당한 크기로 부러트려 몽둥이로 만든 다음 빈 허공에다 크게 휘둘렀다.
붕-붕!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개새끼 패기엔 딱 좋군!”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화운이 우문산에게 쓰윽 시선을 돌렸다.
우문산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