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태양존자
오십여 명이나 되는 숫자가 맹주전 입구에 몰려와 있었다.
대부분이 칠대문파의 제자들인 가운데 비천각의 부각주인 우문위도 보였다.
“삼 장로님!”
이심환이 모습을 보이자 화산의 제자들이 안도하며 몰려갔다.
“어인 호들갑들이냐!”
이심환이 호통을 치자 화산의 제자들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틀이나 돌아오지 않으셔서 많이 걱정했습니다.”
출중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것 같은 반듯한 외모의 청년이 공손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드높은 기개를 과시하듯 두 눈썹이 검처럼 곧게 뻗은 무척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화산기룡 적엽명.
화산이 자랑하는 기재였다.
“맹 내에 있거늘 무얼 걱정한단 말이냐.”
말은 그렇게 해도 이심환의 목소리는 무척 부드러워져 있었다.
“사형, 별일 없으신 거 맞지요? 다른 분들께서도 함께 계시는 겁니까?”
적엽명의 옆에는 오십대 중노인이 서 있었다.
화산 장로 중 막내인 허정양이었다.
별호는 화영객(花影客).
검으로 유명한 화산의 제자이면서도 검법은 입문무공이랄 수 있는 기초검법만 익혔고, 낙화추영장(落花追影掌)과 세류표(細柳飄)를 절정 이상으로 익힌 고수다.
“아무 일 없다. 침식을 잊어야 할 정도로 중한 일이 있어 당분간은 맹주전에 머물게 되었다.”
“모두 다 말입니까?”
“그래. 모두가 골머리를 앓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 그런 것이니 허튼 염려는 말고 물러가라.”
“정말이지요? 다른 일은 없는 거지요?”
“사제.”
“예?”
“자네가 혹시나 하고 우려하는 그런 종류의 일은 결코 아니니 안심해라.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모두들 머리를 모으고 있느라 다른 일을 볼 수 없을 뿐이다.”
“대체 그 일이란 게 뭡니까?”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 해줄 테니 지금은 그렇게만 알고 돌아가라.”
허정양은 정말 궁금했지만, 이심환의 얼굴을 보니 혹시나 하고 우려했던 종류의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알겠습니다. 사형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물러나 있겠습니다.”
허정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이때까지 보고만 있던 비천각의 부각주인 우문위가 슬쩍 나섰다.
“비천각주님이나 맹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하는데 맹주전의 출입을 막고 있으니 어찌 합니까?”
지금 맹주전은 맹주의 호위무사들이 입구를 철통 같이 차단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심환이 우문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슨 보고인가?”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당분간은 맹주님을 뵙기가 힘들 것이네. 내가 전해줄 것이니 염려 말고 말해보게.”
“천자산(天子山) 인근에 수상쩍은 괴인이 출현하여 그 일로 보고를 드려야 하니 직접 뵐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천자산 인근이면 제천마존의 비동이 있는 곳에서 가깝지 않은가?”
“맞습니다.”
“혹시 붉은 머리의 노인을 말하는 것인가?”
“어찌 아셨습니까?”
우문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 보고가 올라온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심환은 화운을 돌아봤다.
“자네 말이 사실이었군.”
“불행하게도 그렇습니다.”
화운이 공손히 대답하자 이심환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심환은 금강부동을 배우게 되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황에 대한 화운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그것이 모두를 위해, 천하를 위해 가장 좋은 상황이라 여겼다.
자신의 이기심을 눈감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사황의 존재가 사실임이 판명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몰라도 되니 차라리 아니었으면 좋겠군.”
금강부동을 몰라도 되니 사황이 등장한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만큼 사황과 천마는 공포의 대명사였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화운이 같은 생각이라는 듯 말하자 이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황과 천마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정의를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아니 그런 심정이어야 한다.
이심환은 화운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때 허정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친구는 누구이기에 저 나이에 사형의 인정을 받고 있단 말인가?’
허정양이 아는 사형은 잔정이 많지 않다.
그래서 젊은 무인들 중에 사형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상대는 둘 중 하나다.
역정을 내게 만든 자이거나 사형이 인정한 자다.
상황을 보니 지금은 후자다.
평소 빼어나다 이름난 후기지수들이라 하여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사형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놀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허정양은 화산기룡을 포함한 화산의 제자들을 데리고 뒤늦게 합류하였기에 화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평범해 보이는 화운이 정무맹을 한참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신풍대주일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그리고 그건 화산기룡 적엽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처음 본 화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구지? 사숙께 이토록 인정받고 있는 후기지수가 있었나?’
적엽명은 화산 대제자의 체면 상 먼저 물을 순 없어 궁금증을 애써 외면했다.
“그 노인의 정체에 대해 짐작하고 있나?”
이심환이 우문위에게 물었다.
“혹시나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너무 얼토당토않은 일이라······.”
“별호만으로도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그 사람이 맞네, 그 사람의 등장에 대해서는 맹주님 이하 모두 알고 있고, 그 때문에 불철주야 고심 중이니 따로 보고 할 건 없네. 정보원들에게는 혹여 그 사람이 보이더라도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즉각 맹으로 보고하라고 일러놓고, 자네는 단단히 입을 다물게. 알았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문위는 지금 이심환을 만나기 전까지는 맹주전 내에서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허정양을 찾아가 이렇게 몰려온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자신이 보고를 받고 고개를 갸웃하던 인물 때문일 줄이야.
‘정말 사황이란 말인가? 세상에! 어찌 사황이······! 어찌 그런 자가 여태 살아있단 말인가!’
우문위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갔다.
“나는 물론이고, 지금 맹주전에 모여 있는 분들은 당분간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중대한 일이 있어서 함께 머리를 맞대느라 그런 것이니 얼토당토않은 추측 따위는 하지 말고 각자의 위치를 지키도록 해라.”
이심환의 말에 화산의 제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칠대문파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칠대문파들끼리는 왕래가 빈번하여 한 식구라는 유대감이 강했다.
그래서 화산의 이심환을 각파의 어른처럼 대했다.
“그리고 부각주는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맹주전에 보고할 사항이 있으면 여기 군사를 통하도록 하게.”
우문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군사도 드나드는 맹주전에 자신은 끝까지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었고, 보고조차 군사를 통해 하라고 하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영호풍이 군사라고는 하나 강호에서의 위치나 이름값으로 보면 자신의 아래가 분명했다.
게다가 신풍대주마저 맹주전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우문위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화운의 눈치를 보느라 따질 수가 없었다.
장강에 사천독왕이 합류했다는 걸 알고도 감추었다가 화운에게 발각되었기에 그가 있는 곳에서는 언행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이심환이 화운을 돌아봤다.
“병력이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
맹주와 화운이 나누는 대화를 이심환도 들었다.
하여 천사련을 상대하러 가는 인원이 충분하겠냐는 뜻의 물음이었다.
“구룡제나 적성대도황이 직접 움직이진 않았겠지요.”
화운이 대답했다.
그들이 나선 게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뜻이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화태양종의 태양존자와 싸워보았고, 그를 쓰러트렸던 화운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 무당검성에게 검을 배우고 오 년만에 출도했을 때 선우유성 등을 만나고자 남궁검가에 세 개의 깃발을 꽂고 기다린 적이 있다.
그때 태양존자가 이화태양종을 직접 이끌고 나타났었다.
그날 화운뿐만 아니라 선우유성과 남궁현 그리고 백리연 역시 대단한 무력을 보여주었고, 이화태양종은 무참히 박살이 났다.
자신감 넘치는 화운의 모습에 이심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넘치는 혈기만 믿고 날뛰다 사라져간 청년무인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자만심은 나태함만큼이나 무인이 멀리해야 할 해악이었다.
하지만 곧 장강수로왕과 사천독왕이 화운을 어쩌지 못해 쫓는 것조차 포기했다는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맹주전에서 직접 겪어보았던 경신술.
‘금강부동신법······!’
아직은 초입의 단계라고는 하나 구룡제나 적성대도황 같은 고수가 아니라면 그림자조차 잡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심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녀오면 보겠다.”
“예.”
화운이 고개를 숙이자 이심환은 뒤돌아 맹주전으로 향했다.
그러다 몇 걸음 못가 다시 뒤돌아보았다.
막 돌아서는 화운이 보였고, 화산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화산기룡이 보였다.
비슷한 나이임에도 한쪽은 고강한 무위에 독자적 임무 수행을 나서고 있었고, 한쪽은 이제 막 둥지를 벗어났다.
그렇게 비교가 되니 신풍대주 화운의 대단함이 더욱 부각되었다.
‘내 것이 더 크기를 바란 건 욕심인 겐가?’
이심환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맹주전으로 향했다.
***
신풍대 숙소.
화운이 돌아오자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잽싸게 다가왔다.
“우리도 가르쳐 주십시오. 대주 형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형, 나도 충성할게.”
어지간히도 배우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화운은 두 사람의 간곡한 요청을 간단히 무시했다.
“임무가 떨어졌다.”
임무라는 말에 남궁현과 선우유성의 태도가 달라졌다.
“어딥니까?”
불타는 눈빛으로 남궁현이 물었다.
선우유성도 비슷했다.
지난 번 장강의 전투로 인해 자신들의 무공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선우유성은 공청석유와 인형설삼 그리고 이무기 내단까지 복용하여 체형이 바뀔 정도로 탈태환골하였고, 대환단을 복용한 남궁현 역시 내공이 훨씬 더 순후해졌다.
백리연 역시 대환단을 복용하여 이전보다 눈빛이 깊어 보일 정도로 내공력이 강해졌다.
그렇게 영약들을 복용한 덕분에 세 사람은 장강의 전투에서 흑사채주, 교룡채주 그리고 무하채주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어디인지는 가면서 알려줄 테니, 준비들 해.”
선우유성과 남궁현은 한쪽에 풀어두었던 이무기 비늘로 만들어진 방패를 팔에 착용했다.
이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있던 백리연도 임무라는 말을 듣고는 검을 갈무리 하고는 자신의 거처로 가서 방패를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간단히 준비를 마치자 화운은 세 사람과 함께 신풍대 숙소를 나섰다.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대륙전장의 본장은 하남성 개봉에 있다.
이전의 삶에서 신풍대원 셋과 함께 무영투를 구하러 간 적이 있어 위치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개봉까지 가는 노선이다.
천사련보다 앞서 당도해야 하니 가장 빠른 길로 가야하는데, 다행히 군사인 영호풍이 알려주었다.
“악양으로 가서 장강을 건넌 다음에 곧장 북상할 거야.”
정무맹이 있는 장사 땅을 빠져나가자마자 임무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때만 해도 전투에 대한 기대로 활활 불타더니 노선을 알려주자 선우유성과 남궁현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장강을 건넌다고요?”
“그래.”
“설마 또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뭘 그런다는 거냐?”
“지난번 장강에서 수적들의 선박을 공격할 때처럼 그렇게 할 거냐는 겁니다.”
장강에서 수적들의 선단을 공격할 때였다.
그때 화운은 선우유성과 남궁현의 뒷덜미를 잡아 장강의 수적선박을 향해 냅다 던져버리는 방식을 썼었다.
“그것보다 더 빨리 건너는 방법이 있어?”
화운이 물었다.
선우유성과 남궁현은 대꾸 할 말이 없어 시무룩해졌다.
“싫으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경신술을 보강해.”
화운은 엄한 스승처럼 굴었다.
‘언제고 반드시 마교가 몰려올 거야. 니들은 더 강해져야 해.’
***
수백의 무리가 거리를 꽉 채운 채 기다란 대형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장창을 높이 세운 채 움직이니 흡사 거대한 송충이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대형의 중간에는 커다란 남여(의자처럼 생긴 가마)에 검은수염의 중년인이 위엄찬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바로 그 뒤로는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의 깃발이 세차게 펄럭이며 따르고 있었다.
천사련 삼천 중의 하나인 이화태양종이다.
태양존자 명교진.
검은수염의 중년인이 바로 그다.
“좌우호법들께서는 개봉으로 가시오. 대륙전장의 장주가 가장 아낀다는 계집아이를 잡아오시오. 본좌는 이대로 소림이 있는 숭산으로 갈 것이니 거기서 합류토록 하시오.”
“존명!”
이화태양종의 좌우 두 호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상 장로!”
“하명하소서!”
태양존자의 부름에 열두 장로 중의 하나가 허리를 조아렸다.
“정무맹의 세작들에게 그놈에 대한 보복으로 대륙전장을 칠 거라는 걸 제대로 흘려놓았겠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필시 그놈이 움직일 터, 결국 소림에서 만나게 되겠군.”
“종주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좋아! 감히 날뛰는 쥐새끼를 밟아 죽이고 소림을 쓸어버릴 것이다. 정무맹의 약점은 각파가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이니 숭산에 성스런 태양의 깃발을 꽂은 다음 무당산으로 가겠다! 무당에 이어 화산까지 본종의 깃발이 꽂히면 천하는 알게 되겠지. 본좌의 위대함을. 크핫하하하하!”
태양존자 명교진!
천사련의 삼천삼제 중의 일인인 그가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화운이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그가 무참히 박살이 났던 적이 있음을.
그가 쥐새끼라고 말한 바로 그 화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