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무룡대
화운과 신풍대가 정무맹으로 복귀한 건 임무를 떠난 지 보름이 지난 후였다.
맹에서는 소림사에서 있었던 이화태양종과의 싸움을 비선들을 통해 보고받았고, 이후 대륙전장의 영애가 납치를 당했던 일과 관련하여서는 화운이 사람을 보내 간략히 보고를 했었기에 복귀가 늦어진 것에 대해 염려하거나 문제 삼을 일은 없었다.
화운은 곧장 맹주부로 향했다.
맹주를 비롯한 맹의 수뇌진들은 그때까지도 화운이 공개한 금강부동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화운이 임무를 떠나기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몇몇 만이 일상의 직무를 조금씩 보고 있다는 정도였다.
화운은 맹주에게 임무에 관한 보고부터 올렸다.
“그렇게 해서 대륙전장에 스승님을 모셔두고 오는 길입니다.”
화운이 검마의 제자라는 건 다들 알고 있다.
화운이 소패룡 황보장을 박살을 내버리던 날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밝혔다.
우문검가주 때문에 약간의 마찰은 있었으나 남궁검가주가 적당히 끼어들어주었고, 화운의 존재를 좋게 본 멸절신니가 매화검주한테 시비 걸지 말라며 호통치면서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검마의 제자라는 걸로 시비를 거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운이 따랐지만, 어쨌든 결과가 아주 좋군.”
“예.”
“태양존자는 누가 상대한 것이냐?”
맹주 조극산은 금강부동에 푹 빠져 있던 터라 화운의 보고가 달갑지는 않았다. 시간이 아까워 귀찮았다. 그럼에도 맹주의 직무를 태만할 수 없어 궁금한 건 짚고 넘어가고자했다.
“소림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까?”
“왔다.”
“그런데 어찌 물으시는지요?”
“너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 그렇다.”
“처음 뵌 날 말씀드렸잖습니까.”
“······!”
- 맹주님께서 예측하신 것보다 두 단계 더 위로 보시면 될 겁니다.
화운이 신풍대주직을 받아들이던 날 했던 말이다.
그 말을 기억한 조극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그때 화운이 했던 말이 적용된다면 태양존자보다 두 단계는 더 위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제천마존의 절학들을 얻고 금강부동에 발을 디뎠어도 그렇지······.’
조극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벅거렸다.
“그나저나 고민하시던 건 원하는 결과를 얻으셨습니까?”
“음?”
무슨 말인가 하고 화운을 바라보던 조극산은 뒤늦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며칠이 더 걸릴 것 같다.”
“알겠습니다. 보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 느긋하게 기다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아! 나도 할 말이 있다. 내가 아니라 여기 모두가 합의한 것이기도 하다만.”
“말씀하십시오.”
“먼저 말하거라.”
“사황이 혼자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쪽 동태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사황한테는 근처에도 갈 생각이 없다.
화운은 그의 동태를 살핀다는 빌미로 무해곡 즉 악인촌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흠, 사황의 동태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긴 하지.”
화운이 바라는 대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조극산이다.
화운은 정식으로 명령을 받고 출맹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굳이 몰래 다녀올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극산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말을 했다.
“무룡대를 데려가거라.”
“예? 무룡대라니요?”
“네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우리라고 맹의 일에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칠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을 하나로 모아 무룡대를 만들어서 너의 휘하에 두기로 모두가 뜻을 모았다.”
“예에?”
“추후에 조직개편을 다시 할 때까지 네가 신풍대와 무룡대 두 부대의 대주 자리를 다 맡도록 하여라.”
“······!”
화운은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 멍청히 쳐다보기만 했다.
“네가 지금까지 해온 임무만 봐도 너의 능력은 충분히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니 잘할 것이라 믿는다.”
조극산이 결정지은 투로 말하자 화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잘하고 말고의 일이 아니잖습니까. 칠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신성들을 누가 제게 맡기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말했잖느냐.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합의한 것이라고.”
“······!”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했다.
화운은 정말 그런 건가 싶어 장내를 둘러봤다.
두 사람이 속삭이듯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서 가까이에 있는 이들과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 이라면 다들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모두들 못들은 것처럼 자신들이 하던 궁리에만 몰두하겠다는 태도들이다.
그 모습들을 보니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제 보니 각파의 애새끼들을 나한테 맡겨 버리고 홀가분하게 금강부동에만 집중하겠다는 거잖아!’
화운은 맹주 이하 모두가 합의했다는 얍삽한 생각을 단박에 파악했다.
천사련과의 싸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나 칠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신성들도 임무를 맡고 전투에 참여해야 한다.
각파의 신성들이 임무를 나서거나 전투에 참여하게 되면 이곳에 있는 이들이 함께하고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자면 금강부동을 연구하는 걸 멈출 수밖에 없을 터.
자신들보다 강한 것이 확실한 화운에게 맡겨 버린다면 적어도 안전에 대한 측면에서는 자신들이 함께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리라.
화운은 심통이 난 얼굴로 다시 조극산을 돌아봤다.
“험! 네가 그들을 잘 이끌어준다면 장차 맹은 물론이고 천하에 큰 기둥들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거야 여기 계신 분들의 바람일 뿐이고요, 막말로 저보다 잘난 그들이 절 인정이나 하겠습니까? 맹주님이 심어둔 줄이라고 무시하고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없는 사람 취급할 건데, 전 싫습니다. 전 그냥 절 믿어주고 제 말이라면 묵묵히 따라주는 신풍대원들이랑만 함께하고 싶습니다.”
화운은 싫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귀찮아하는 일을 전부 모아서 자신이 몽땅 도맡아야 하니 절대 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강한 말로 거부했다.
화운이 그렇게 나오자 조극산이 헛기침을 한 번 하며 화산파의 한매검 이심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왔다.
“며칠 전 소림에서 보낸 사람이 도착했는데 하필이면 네가 태양존자를 쓰러트렸다는 이야기를 많은 이들이 듣는 자리에서 말해버렸다. 그 탓에 무룡대의 아이들이 자신들에게도 임무를 달라고 성화다. 여기 맹주부 앞마당까지 몰려와 하루 종일 입을 모아 소릴 질러대니 금강부동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나 결국은 화운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화운의 얼굴이 더욱 뚱해졌다.
“여기 계신 분들은 금강부동을 각파에 전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온전히 소림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각자의 몸에 봉인하기로 뜻을 모았다. 하지만 그건 사황과 천마를 상대한 후의 일이다. 그때까지는 그 어떤 방해도 없어야 할 것이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금강부동을 구현하는 데에 합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부탁하마. 네가 무룡대 아이들이 자숙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다오.”
이심환이 부탁했다.
칠대문파 그것도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화산파의 장로다.
처음 대면했을 때 화운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대단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아미타불!”
나한당주가 불호를 외는 것으로 이심환의 말에 힘을 실었다.
화운은 그래도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거부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살짝 바꿨다.
“무룡대주 자리까지 맡고 싶지는 않습니다. 반발도 클 거구요. 그 자리는 걔네들 중 한 사람에게 맡기십시오. 대신 임무는 함께하겠습니다. 안전도 최대한 신경 쓰겠습니다.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다보면 여길 찾아와 시끄럽게 구는 일은 없겠지요.”
“알겠다.”
이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는 책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동안 생각나는 바대로 틈틈이 적은 것이다. 아직은 뒤죽박죽이다만, 너라면 그 속에서도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게다. 읽어본 후에 나한당주께 주거라.”
“감사합니다.”
이심환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화운은 적잖이 놀랐다.
이심환이 자신의 심득을 직접 준다는 건 그만큼 화운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해서다.
‘사사로운 이득을 놓으면 꽤 괜찮은 분이라는 건 알겠습니다만, 늦었습니다.’
악다구니를 치던 사람들도 친해진 후에는 괜찮은 사람이 되고는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다.
친해지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중요하다.
둘 다 그 사람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당분간 천사련을 상대하는 전략은 군사가 진두지휘할 것이고, 여기 계신 분들 말고도 각파의 고수들이 있으니 넌 다른 일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좀 전에 네가 말한 사황의 동태를 살피는 것처럼 신풍대의 임무에 무룡대를 함께 데리고 다니기만 하면 된다.”
이심환이 물러가자 조극산이 말했다.
“예.”
“네가 무룡대주 자리는 싫다고 하니 무룡대 내에서 따로 뽑도록 하겠다만, 괜찮겠느냐? 아무래도 직위가 높아야 다루기가 편할 것인데.”
“신풍대와 임무를 함께 가라는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임무에 관한 계획은 제가 세우겠으니 자세한 설명은 저한테 들으라고 해주시면 알아서 하겠습니다.”
“사황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은 함구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허면 언제 출발할 것이냐?”
“내일 아침입니다.”
“알겠다. 군사에게 일러 네가 말한 대로 조치해 두마.”
“감사합니다.”
“내가 고맙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고. 하지만 어쩌겠느냐, 너도 알다시피 천사련에 연연할 시국이 아니질 않느냐.”
“이해합니다.”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집중해줘서 달갑기만 하다.
다만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이 못마땅할 뿐.
‘여튼 이번엔 무해곡을 찾아가는 것이 우선이니까.’
화운은 그렇게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남궁검가주와 선우세가주 그리고 백리세가주에게로 갔다.
세 사람은 가까운 곳에 있어 한 번에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남궁현과 선우유성 그리고 백리연의 무사함을 알리고 약간의 한담을 나눈 후 세 사람에게서도 물러났다.
화운은 창가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이심환이 준 책자를 들쳐봤다.
- 결과 결 그리고 간극. 공간과 공간 사이에도 간극이 존재한다면, 그 간극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공간을 여의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위의 화두는 금강부동에 다가가는 데에 아주 적절한 접근법이라 생각한다.
책자의 서두에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위의 것은 화운이 이심환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이심환은 화운의 말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금강부동에 접근했다는 뜻이다.
화운은 궁금증이 생겨 얼른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 일(一)이 모여 이(二)가 되고, 이가 삼(三)이 되고, 삼이 사(四)가 되었다.
- 일(一)은 선이다. 이(二)와 삼(三)은 면이다. 면과 면이 모였으니 사(四)는 사방(四方), 즉 공간이다.
-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면을 보아야하고, 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을 보아야 한다.
- 그래서 선이 시작이다.
‘결을 선으로 보고 있구나!’
화운은 이심환의 접근법에 관심이 생겼다.
나한당주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이 정리한 책자들도 읽어봐야 하는데 이심환이 작성해 둔 글에서 헤어날 수가 없을 정도로 푹 빠져버렸다.
***
“이런!”
창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강렬했다.
정신을 차린 화운은 자신이 밤을 꼬박 새웠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운은 밤새 보던 이심환의 책자를 덮었다.
이심환이 남긴 기록 덕분에 금강부동에 한 걸음 더 나아간 느낌이었다.
화운은 고개를 들고 이심환을 바라봤다.
마침 그가 화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화운은 자신도 모르게 정중히 포권했다.
이심환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화운은 책자를 나한당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공손히 예의를 갖추었다.
“맹주님이 운기행공 중이시니 이대로 조용히 나가보겠습니다.”
맹주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운기행공으로 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맹주님껜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미타불.”
화운은 조용히 맹주전을 빠져나갔다.
신풍대 숙소.
화운은 늦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늦은 밤에 돌아오거나 아침에 올 수도 있으니 때가 되면 식사 챙겨 먹고 자라고 말해두긴 했지만, 너무 늦은 아침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별일이야 있겠냐는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신풍대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앞마당에 일단의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얼추 봐도 스물은 되어 보인다.
“어? 대주님!”
남궁현이 화운의 등장을 알리듯 소리치자 모두들 돌아봤다.
화운은 신풍대 숙소로 찾아온 이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젊었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중반까지.
‘무룡대로군.’
아는 얼굴들도 있었다.
“또 보는군. 소림에서도 대단했다지? 잘했네. 잘했어. 이거 자네 덕분에 내 동생도 유명세 좀 떨치겠는 걸?”
생글생글 웃으며 반가워하는 이는 백리연의 오빠인 백검룡 백리명이었다.
“형님도 무룡대에 들어가신 겁니까?”
“자네가 안 받아주니 무룡대에라도 들어가야지. 그나저나 형님이란 소리 아주 듣기 좋구만. 신검룡의 유명세가 워낙 대단해서 모르는 사람 취급하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유명해졌다고 사람이 달라져서야 되겠습니까. 그보다 대주는 누굽니까?”
화운이 묻자 백리명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중한 외모의 청년이 여유로운 태도로 서 있었다.
화산이 자랑하는 기재 화산기룡 적엽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