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90화 (90/207)

#090. 세 사람이 악착같이 싸워야지

천하십이흉!

일인단신으로 천하를 유린하던 사파의 전대 거흉들이다.

십여 년 전부터 사라진 이름이었는데, 그간 천사련에 자릴 잡고 있었다.

열두 명의 거흉들 중 다섯이 죽고 이제 일곱이 남았다.

하지만 특히 악명이 자자한 자들이 남았으니 그들의 흉악함을 아직은 잊어서는 안 될 모양이다.

“크흐흐! 당돌한 놈이로고, 감히 우릴 낚겠다니.”

괴소를 흘리며 말한 이는 거인이다.

그냥 거인도 아니고, 거인 중의 거인이다.

보통 어른들보다 두 배 가까이 큰 엄청난 거인이다.

철탑거왕!

천하십이흉 중 흉포하기로는 단연코 첫 번째에 이름을 올릴 작자다.

“태양존자를 죽인 놈이야. 그렇게 우습게 보다간 네놈 모가지도 떨어지고 말 게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철탑거왕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대하는 노인.

선풍도골이라는 말처럼 고아한 선인의 풍채를 가졌다.

혈선(血仙)!

고아한 선인의 풍채 뒤에 악마의 잔혹함을 감춘 노인.

혈사공(血邪功)을 일으키기 전과 후가 극명하게 다른 두 얼굴의 노인이다.

“태양존자가 뭐 대단하다고. 난 그를 인정하지 않소. 그 작자가 구룡제, 도황과 함께 삼천이라는 것부터가 탐탁지 않았소.”

도황은 적성대도황을 일컫는다.

철탑거왕은 오래전부터 구룡제와 도황 앞에서는 철저히 머리를 숙였으나 태양존자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한 마디로 태양존자만큼은 만만히 본 것이다.

“그래도 조심해. 성질이 난다고 앞에 나서지 말고, 쟤들이 먼저 하도록 내버려둬.”

혈선이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흑천, 낭혈, 도탑을 비롯한 천사련 육지의 수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정무맹의 어린 쥐들을 사로잡을 계획을 모의하고 있었다.

“내가 애요? 화난다고 날뛰게. 대형이 고개를 끄덕일 때만 나댈 테니까, 너무 기다리게 하지만 마쇼.”

“그러마.”

혈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두 눈에 붉은빛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약관에 태양존자를 쓰러트리다니, 죽일 맛이 나겠어.”

음산한 기운을 일으키는 혈선과 철탑거왕 옆에 다섯 명의 늙은이들이 더 있었다.

***

“의외로군.”

멀찍이서 무룡대의 모습을 지켜보며 화운이 중얼거렸다.

“저럴 거라고 예상 못한 겁니까?”

남궁현이 물었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처음 맹을 나서는 저들의 모습을 보며 실망이 컸다. 칠대문파의 기대주라는 자들이 그토록 생각 없을 줄은 몰랐거든. 오는 동안 줄곧 보여준 꼬라지를 보면 싸우는 것 보다는 돌아가는 걸 택할 줄 알았다. 도리 없이 두 번째 방안대로 해야겠다.”

“두 번째 방안이요? 그게 뭡니까, 첫 번째 방안은 또 뭐구요?”

“천사련은 바보가 아니다. 아마 미끼라는 걸 짐작했을 거다.”

“예에?”

“뭘 놀래? 너라면 그런 생각쯤은 안 해보겠냐?”

“그게 아니라 그런 의심을 했다면 이쪽이 예상치 못한 엄청난 전력을 보냈을 거 아닙니까?”

“맞아. 구룡성과 적성대도문을 제외한 천사련의 모든 힘을 동원한 모양이더라.”

남궁현이 숨이 막힐 정도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룡성과 적성대도문 그리고 이화태양종까지, 그들 삼천이 천사련 전력의 육 할을 차지한다고 해도 나머지 삼 할의 전력이면 어마어마해요. 일 할 정도만 몰려와도 대주 형님이 이곳에 없다면 우린 다 죽어요. 근데 삼 할이 다 오고 있다면······.”

화운이 있어도 쉽지 않겠다.

어쩌면 대부분이 죽어나가겠다는 말이 남궁현의 입안에서 감돌았다.

“그래서 두 번째 방안이 뭔가요?”

남궁현이 물었던 것을 백리연이 다시 물었다.

아직 그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아서다.

“무룡대가 싸우겠다고 하니 도리 없이 함께 싸워야지요.”

“그게 방안이라구요?”

“다른 방안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야지요.”

화운의 대답에 백리연을 비롯한 세 사람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첫 번째 방안은 뭔가요?”

“천사련이 바보가 아닌 이상 무룡대가 돌아가는 걸 놔두지 않을 겁니다. 맹에서 보낸 지원군을 먼저 치고 기다리던지, 중간에 무룡대가 돌아가는 길을 차단하려 들겠지요. 그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린 거기에 맞춰 그들을 급습하는 게 첫 번째 계획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숫자와 전력으로 펼칠 만한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계획이다.

“급습하는 거면 지금도 할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우리가 없는 사이에 쟤들 공격당하면 골치 아파져서요.”

지금 움직이고 있는 천사련의 무리들을 쓸어버린다 하여도 무룡대를 잃는다면 맹으로 돌아갈 낯이 없어진다.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무룡대는 맹의 귀한 전력이고 자산이니까.

“정말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싸울 생각입니까?”

남궁현이 물었다.

“두렵냐?”

“예. 두렵습니다. 피해가 너무 많을까 봐서요. 대주 형님 말씀대로 사황에 천마 그리고 그들의 수하들까지 상대하자면 정파가 하나로 똘똘 뭉쳐야 할 거 아닙니까. 쟤들이 잘난 체 하는 게 꼴 보기 싫긴 하지만 쟤들만큼 정파다운 무인들도 드뭅니다.”

“형, 현이 말이 맞는 것 같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룡대가 정파의 근간이니까 최대한 지켜줘야 할 것 같아.”

“호, 뜻밖인 걸? 백리 소저도 같은 생각입니까?”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죽는 꼴도 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최대한 지켜주어야겠군요.”

“방법이 있습니까?”

남궁현이 반색하며 재빨리 물었다.

하지만 씩 웃는 화운의 대답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세 사람이 악착같이 싸워야지.”

“······!”

“······?”

“내가 말했을 텐데, 세 사람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야 한다고. 그리고 지금 세 사람한테 필요한 건 생과 사를 수십 번 넘나드는 실전이라고. 이번 싸움의 주인공은 세 사람이야. 세 사람이 천사련과 악착같이 싸우도록 해. 뒤는 내가 지켜줄 테니까.”

화운의 말에 세 사람이 흠칫 굳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리 오고 있다는 천사련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면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잘 알고 있는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얼떨결에 이화태양종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야 소림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무룡대 뿐이니 걱정되고, 염려되고 가슴이 답답했다.

“사황이나 천마의 수하들도 아닌데 이 정도에 벌벌 떨다니 안 되겠군.”

“누가 벌벌 떨었습니까.”

“내겐 그렇게 보여.”

“벌벌 떤 건 아닌지만, 이 상황에서 걱정하고 당황하고 그러는 게 정상이지요.”

“아니 내겐 비정상이야. 세 사람이 스스로를 너무 못 믿는 것 같아. 오늘 하루 죽었다고 생각해. 아주 제대로 수련시켜 줄 테니까.”

화운은 적어도 한 번은 시간을 되돌릴 생각이었다.

금강부동을 공개한 것을 없었던 일로 되돌리기 위해서다.

그러니 지금 신풍대가 지독하게 수련을 하고, 치열한 실전을 벌인다고 하여 그것이 경험으로 남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신풍대가 자신감을 가지고 생사가 오가는 실전을 벌이기를 바라는 건 화운이 눈으로 보아두기 위해서다.

세 사람이 실전에서 어떻게 싸우는지 자세히 보아두어야 시간을 되돌렸을 때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니까.

그리고 시간이 고통이라던 제천마존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매번의 삶에 최선을 다해 충실하기로 한 자신의 작심을 지키고 싶어서다.

“배부터 든든히 채우도록 해.”

잠시 후.

육포와 건량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신풍대는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우선 화운은 전날 통나무가 필요하여 거목들을 베어내면서 만들어둔 공터로 세 사람을 데려갔다.

“저 숲을 봐. 나무들이 빽빽한 것이 수련하기에 딱 좋다.”

화운이 가리킨 곳이 아니어도 사방이 온통 잡목들 천지였다.

“유성이랑 현이는 저 숲이 적진이라 생각하고 미친놈들처럼 돌파해봐. 중요한 건 너희들의 특기를 살리는 거다. 현이는 경신술을 팔 성의 속도로 발휘하면서 잡목들을 베어라. 이때 세 치(9cm) 깊이로 일정하게 베어야 한다. 그렇게 베지 못하거나 달리는 속도가 떨어지면 넌 죽은 거다.”

화운의 말에 남궁현이 한숨부터 내쉬었다.

지금 그가 낼 수 있는 절반의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해낼 수 있을까말까 한 걸 팔 성의 속도로 해내라하니 시작하기도 전에 두 발이 무거워졌다.

“유성이는 속도보다 힘이니까 네가 익힌 경신술을 삼 성의 속도로 발휘하면서 나무들을 베어라. 넌 나무의 두께와 상관없이 완전히 잘라야 한다. 너 역시 나무를 쓰러트리지 못하거나 걸음이 멈추면 죽은 거다. 둘 다 시작해.”

화운의 말에 두 사람은 숲이 시작되는 곳에 가서 섰다.

“좋아! 간다!”

먼저 시작한 건 선우유성이다.

화운에 대한 믿음이 워낙 두터워서 하라고 하니 고민할 것도 없이 검을 뽑더니 곧장 뛰어들었다.

쉬칵! 쉬카악!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나무가 동강이 나서 쓰러졌다.

하지만 네 번째 나무를 쓰러트리지 못했다.

너무 두껍기도 했지만, 빽빽한 잡목 사이를 빠져나가는 움직임에 신경 쓰느라 검에 대한 집중이 살짝 흐트러졌다.

“다시 해!”

화운이 외치자 잠깐 멈춘 선우유성이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넌 뭐해.”

화운의 말에 남궁현이 화들짝 놀라며 숲으로 뛰어들었다.

“간닷!”

확실히 남궁현이 움직이는 모습은 기민했다.

그 속도에 맞춰 검을 휘두르는 것도 대단히 뛰어났다. 대환단을 복용한 후로 공력이 심후해져 남궁검가의 소가주 이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화운이 기대하는 건 이 정도가 아니었다.

“다섯 번째, 얕았다! 넌 거기서 죽었다. 다시 해!”

“염려 마십시오! 죽어도 다시 일어나서 싹 다 쓸어버릴 테니까! 다시 간닷!”

남궁현이 다시 전광 같이 파고들었다.

그렇게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본 화운은 잠시 후에 백리연을 돌아봤다.

“백리 소저는 나와 검을 맞댈 겁니다. 수련을 위해 좀 매몰차게 대하겠으니 이해하십시오.”

“그래 주시면 오히려 고마워해야지요.”

백리연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막상 검을 맞대기 시작하자 화운이 진짜 매몰차게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악!”

일곱 합을 버티지 못하고 백리연이 나가떨어졌다.

“속도도 중요하고 변화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힘이 없으면 말짱 꽝입니다. 검에 더 많은 힘을 집중하십시오.”

몸을 일으킨 백리연이 검을 힘껏 쥐고 달려들었다.

백리세가의 난화십이검은 속도와 변화에 치중한 검법이었다.

그래서 하수들에게는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비슷한 경지만 되어도 밀리는 경향이 다분했다.

속도라는 건 절대적인 것 같아도 무공에서의 속도는 꼭 그렇지가 않다.

고수들일수록 자신만의 간격이 존재하고 그 간격 내에서는 어지간한 속도는 감당해내기 때문이다.

꽈앙!

다시 한번 백리연이 나가떨어졌다.

화운은 백리연이 딱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에서 인정사정이 없이 굴었다.

그럼에도 백리연은 거대한 철벽이나 대적불가의 상대를 대하는 것 같았다.

“목숨을 건 일합의 승부가 아니라면 모든 힘을 쏟아붓는 건 어리석은 겁니다. 다음을 위한 최소한의 힘은 남기라고 배웠을 텐데 벌써 잊어버린 겁니까?”

백리연이 입술을 깨물고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섯 합 만에 나가떨어졌다.

“피하더라도 날카로운 응수를 하면서 피해야 상대가 함부로 쫓지 못합니다.”

“피하려는 게 너무 눈에 보입니다.”

“방패는 장식입니까.”

“방패가 있으니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잖습니까.”

“방패도 공격수단입니다.”

“찌를 땐 주저 없이 찌르십시오. 한 치의 망설임 때문에 본인의 목이 잘리는 법입니다.”

남궁현과 선우유성의 수련도 그렇지만 백리연의 수련도 요란했다.

그 탓에 이따금씩 무룡대원들이 삼삼오오 몰려와 훔쳐보곤 했다.

오전 두 시진(4시간)이 그렇게 치열하게 지나갔다.

수백 번을 나가떨어진 백리연은 검을 움직일 힘조차 없어 땅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헝클어진 머리에 흙투성이인 옷,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

결코 백봉일 수가 없는 몰골이었다.

백리연이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돌아왔다.

자신들이 뻥 뚫어놓은 숲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도 백리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뭇가지들에 옷이 찢겨지고 살이 긁히고 아무데서나 쓰러져 숨을 돌렸는지 흙과 풀, 잎 등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주르륵 떨어졌다.

“아이고, 남궁검가 소가주가 이렇게 죽네.”

남궁현이 엄살을 부리며 백리연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

“난 이미 죽었다.”

선우유성도 나란히 누웠다.

“누님 괜찮습니까?”

선우유성이 물었다.

“아직은······ 살아 있는 것 같아.”

“열심히 숨만 쉬십시오. 그럼 살아 있는 겁니다. 크크큭!”

남궁현이 큭큭거렸다.

그 웃음이 묘하게 지금 상황과 어울렸다.

“큭큭큭!”

선우유성이 따라서 웃었고.

“크흐-큿큿큿!”

백리연이 웃음을 참으려다 오히려 괴상하게 웃었다.

그렇게 나란히 누워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깨끗하기만 했다.

백리연은 온몸의 근육과 신경들이 아프다고 호소하고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찌르는 것 같았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진짜 죽을 것 같은데······ 왠지 진짜 무인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어? 나도 그런 기분이데.”

“나도 그래요.”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동감을 표했다.

묘한 일이었다.

함께 수련해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영약들을 복용하고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강해지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몸이 힘든 만큼 기분이 좋았다.

“점심은 내가 준비해 줄 테니까 오후 수련을 위해서라도 푹 쉬도록 해.”

“옛! 충성!”

“고마워, 형!”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화운은 기분 좋은 얼굴로 누워 있는 세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웃는 걸 보니 악으로 부딪치고 몸으로 이겨낼 준비가 된 것 같군. 그 마음가짐이 피 튀기고 숨 가쁜 전장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작용하는지, 내일 스스로도 놀라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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