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무해곡
운남성 애뇌산.
험악한 산세와 사시사철 밤낮없이 봉우리를 휘감고 있는 구름과 안개로 유명하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로는 천길 절벽으로 이루어진 깊은 계곡이 지옥으로 향하는 입구처럼 쩍 갈라져 있고, 산줄기는 굽이굽이 백 리에 걸쳐 뻗어 있다.
애뇌산에 도착한 화운은 나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목으로 끝없이 뒤덮인 숲에 경탄을 금치 못했고, 여기저기 득시글거리는 독사와 맹수를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와우, 진짜 무서운 곳이네.”
거목 위에 잠깐 멈춰 사방을 둘러보고 있던 화운은 거목 아래에 몰려든 개와 비슷하게 생긴 맹수들을 보고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기운을 일부러 감추고 있지만, 그래도 맹수의 본능이라면 무인의 위험함 정도는 감지할 것인데도 여러 마리가 함께 몰려와 있었다.
화운은 일부러 자신의 기운을 한꺼번에 개방했다.
맹수들은 느닷없이 강력한 존재감이 폭발하듯 뿜어지자 기겁하여 사방으로 달아났다.
“잘 기억했다가 사람은 노리지 마라.”
중얼거린 화운은 다시 기운을 갈무리 했다.
자신의 등장으로 온 숲이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화운은 방향을 가늠한 후 다시 몸을 날렸다.
경신술의 경지 중 초상비라는 게 있다.
풀잎을 밟고 달리는 경지로 수상비와 비슷한 경지인데 따지고 보면 수상비보다 훨씬 더 어렵다.
풀잎보다는 수면이 더 반발력이 큰 법이니까.
화운은 숲의 위를 달렸다.
굵은 가지든 잔가지든 가리지 않고 밟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본다면 초상비의 경지라며 놀람을 금치 못할 광경이었다.
물론 경신술에 대한 화운의 경지는 초상비보다 훨씬 더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지만.
팟팟파-앗!
빠른 속도로 질주하던 화운이 돌연 우뚝 멈추더니 경신 수법을 부풍무영으로 바꿔 부유하는 티끌처럼 소리 없이 나아갔다.
잠시 후 커다란 거목의 가지 위로 조용히 내려선 화운은 자신의 발아래를 응시했다.
네 개의 가지 아래에 작은 체구가 보였다.
큼지막한 가지 위에 바짝 쪼그려 앉아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오른손에는 짤막한 길이의 칼을 쥐고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반바지와 살짝 여유가 느껴지는 조끼 형태의 얇은 무명옷.
복장을 보면 원시형태의 부락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구릿빛 피부에 아무렇게나 묶고 있는 머리를 보면 원시형태의 밀림에 어울려 보였다.
얼굴은 볼 수가 없지만, 체구와 피부를 보니 아이가 분명했다.
화운은 소리 없이 서서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이는 숨죽이고 자신의 아래를 주시했다.
호흡이 죽은 듯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노련한 사냥꾼 같았다.
한 식경(30분).
아이는 밥 한 끼를 먹을 시간 동안 꿈쩍도 않고 자신이 있는 가지 아래의 지상만을 주시했다.
참을성도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화운이 속으로 탄성을 터트리며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일다경이 더 흘렀다.
낙엽이 수북한 땅 위로 뭔가가 나타났다.
화운이 자세를 살짝 낮춰 살펴보니 황소만 한 크기의 맹수였다.
온통 먹을 칠한 듯 시커먼 묵빛의 털을 가진 맹수였다.
거대한 덩치임에도 낙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아주 작게 들릴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을 노리고 있는 건가?’
화운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이가 상대하기엔 맹수의 덩치가 너무 커 보였다.
앞발로 한 번 후려치면 저 작은 체구는 수십 장을 날아갈 것이고, 쩍 벌린 입으로는 한입에 씹어버릴 것 같았다.
화운은 다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든 끼어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윽고 시커먼 맹수가 아이의 바로 아래를 지나갈 때였다.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던 아이가 도약하는 개구리처럼 두 다리를 펴며 맹수를 덮쳐갔다.
바로 그 순간 내디디려던 걸음을 우뚝 멈춘 맹수가 측면으로 뛰었다.
팟!
절정의 고수처럼 기민한 반응이었다.
이때 아이 역시 놀라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기습이 실패인 것을 직감하자자마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더니 땅을 밟기도 전에 맹수를 향해 쏘아갔다.
‘저건 무공이다!’
깜짝 놀란 화운은 아이의 몸에 집중했다.
가지 위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땐 잠잠했던 기운이 지금은 아이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기운이었다.
대환단을 복용한 남궁현 등과 비슷한 수준의 내력이었다.
화운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와 맹수가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며 서로를 노렸다.
화운은 둘을 놓칠세라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이와 맹수가 한 덩이가 되어 땅바닥을 뒹굴더니 벌떡 일어선 맹수가 두 발로 아이의 몸을 눌렀다.
바동거리는 아이.
하필이면 빽빽한 잡목들 때문에 잠깐 화운의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깜짝 놀란 화운이 잡목들을 몸으로 부수고 쏘아갔다.
“물러나라!”
화운이 검을 뽑으며 소리친 순간.
맹수가 튕기듯 돌아서며 콧등에 잔주름을 일으키고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 으르렁거렸다.
“누구야!”
아이도 벌떡 일어나 화운을 향해 짤막한 칼을 겨눴다.
화운은 중간에 우뚝 멈춰서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란히 서서 자신을 경계하는 아이와 맹수.
놀랍게도 둘은 서로를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누구냐고? 말하면 묵비랑 향아가 가만 안 둘 거야!”
“너희 둘, 친구냐?”
“맞아. 우린 친구야. 그러니까 우리 둘한테 혼나고 싶지 않으면 누군지 말해.”
이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다.
동그란 눈에 오뚝한 코.
앙증맞게 작은 입술.
아주 귀여운 소녀였다.
그리고 내력은 남궁현 등과 비슷한 수준이고.
“어?”
황당한 얼굴로 검을 집어넣던 화운은 또 다른 사실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랐다.
시커먼 맹수의 몸에서 내력이 느껴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당한 내력을 가진 소녀를 속도와 힘으로 앞선 놈이었다.
“그거 뭐냐? 뭔데 내력을 다 가지고 있냐? 영물이냐? 내단을 가진 거냐?”
놀란 화운이 빠르게 물었다.
“묵비는 영물은 아니지만, 향아 친구야. 알려줬으니까 너도 대답해. 누구야?”
“난 화운이라고 해. 친구라서 다행이다. 네가 잡아먹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화운이 검을 집어놓으며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 있자 소녀가 칼을 쥔 손을 내렸다.
“향아를 구해주려고 달려온 거야?”
“응. 정말 많이 놀랐다. 근데 그 친구는 어떻게 내력을 가지게 된 거야?”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내력을 키워줬어. 향아랑 같이 친구하라고. 묵비야, 괜찮아. 날 구해주려고 그런 거래. 그니까 착한 사람이야.”
향아가 시커먼 맹수의 목덜미를 만져주며 말하자 으르렁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화운은 묵비라는 맹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력을 지닌 맹수라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향아의 할아버지라는 사람의 능력과 생각의 남다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와!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구나. 아주 똑똑한 친구네.”
“응! 묵비는 말도 알아듣고 향아랑 술래잡기 할 때도 아주 잘해. 매번 향아가 져.”
“방금 그게 술래잡기 한 거니?”
“응.”
“묵비가 정말 잘하는 것 같더라. 근데 향아도 금방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묵비 못지않게 잘하더라.”
화운의 칭찬에 향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화운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사실은 길을 잃었는데 하룻밤 묵을 만한 데가 없을까?”
화운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향아가 사는 마을로 따라갈 생각을 한 것이다.
거기가 무해곡일 수도 있고, 아니라면 인근에 악인촌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 작정인 것이다.
내력이 뛰어나도 아이는 아이다.
향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향아 집에 가. 향아 구해주려고 한 착한 사람이니까 할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할아버지도 계시는구나. 고마워, 가서 인사부터 드리자.”
화운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연리향.
그게 향아의 이름이었다.
열 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여덟 살이라고 했다.
향아는 맹수와 독사 그리고 독충이 우글거리는 밀림을 제집처럼 편하게 돌아다녔다.
화운 옆에서 쉴 새 없이 묻고 떠들면서도 독충이 보이면 앞서 치워주며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면서 말이다.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화운은 자신도 어지간한 독에는 끄덕도 않음을 알고 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밀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는 기회이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몇이나 되니?”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걸 들었는데 서른세 명이라고 했어. 근데 향아가 알기로는 한 명 더 있어. 큰할아버지가 계신 걸 향아가 본 적이 있어. 이건 비밀인데 향아가 무해동에 간 적이 있어. 거긴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데 너무 궁금해서 몰래 들어가 봤어. 그니까 절대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무해동?”
“응. 귀신이 살고 있다고 절대 들어가면 안 된댔어. 근데 귀신이 아니라 큰할아버지가 살아.”
화운은 무해동이라는 말에 제대로 찾았다는 걸 알고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무해동에 누군가 살고 있고, 향이는 그 사람을 큰할아버지라고 생각하나 보다. 누굴까? 무해동에 기거하고 있으니 무해노인의 후인이려나?’
화운은 그 노인에 대해 궁금했다.
“큰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겼는데?”
“음······ 그냥 할아버지 같애.”
“그냥 할아버지 같은데 왜 큰할아버지라고 그러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였으니까 큰할아버지지.”
“아, 글쿠나. 향아 할아버지께서 고개를 숙이셨으면 진짜 큰할아버지시겠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향아의 말에 동조해 주었다.
무해곡.
아무래도 찾은 것 같다.
무해노인의 후인 역시 존재하는 것 같고.
‘정말 전해지는 대로 천하 무학에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면 금강부동을 해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지도 몰라.’
사황과 천마.
그 둘은 어떤 형태로든 천하를 피로 짓밟을 것이다.
그나마 사황은 한 번 겪어본 데다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라도 있지만, 천마는 그렇지도 않다.
대체 그가 바라는 게 뭐고 천종천마교에서 보았던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은 뭐란 말인가?
‘그건 세상에 알려진 무공이 아니야. 무해노인의 후인한테 물어봐야겠어.’
화운은 큰 기대감을 가지고 향아와 함께 애뇌산 서쪽 계곡으로 향했다.
빽빽한 숲을 벗어나 서쪽 골짜기로 들어서자 풍광이 극도로 달라졌다.
향아가 그 위험한 숲에서 노는 게 이해가 될 정도로 삭막함 그 자체였다.
갈수록 건너편과의 간격이 점점 좁아졌다.
반각 정도 더 들어가 보니 천신이든 악마든, 신적인 존재가 거대한 도끼로 찍어놓은 것 같은 협곡이 기다리고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듯 음산한 잿빛과 거무튀튀한 암반천지였다.
짙게 깔린 안개마저 주위의 색에 영향을 받아 회색으로 보였다.
“저기야. 향아가 사는 덴 저 건너편에 있어.”
향아가 오십 장(150m)은 족히 떨어진 협곡 건너편을 가리켰다.
“저 다리로 건너는 거니?”
화운이 물었다.
회색 안개가 짙게 깔린 거대한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는 출렁다리가 보였다.
“응. 얼른 가.”
향아가 뛰어갔다.
화운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해노인은 은거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나 외진 곳에 자릴 잡은 건가? 이 정도면 은거나 은둔이랄 수 없겠는데, 뭔가 그렇게 할 만한 특별한 이유 같은 게 있었을까?’
화운은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며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향아의 뒤를 따라갔다.
생자불입 사자불회!
살아 있는 자는 들어올 수 없고, 죽은 자는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이니, 발을 들이면 죽어서도 돌아가지 못한다는 경고이리라.
굳이 경고가 필요한가 싶다.
어지간한 강심장도 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아찔해 보이는 출렁다리이거늘.
이런 다리를 서슴지 않고 건널 만한 강심장이라면 경고 따위는 코웃음 칠 것이다.
“얼른 와. 향아가 재밌게 해줄게.”
어느새 출렁다리 중간까지 달려간 향아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 다리를 출렁거리게 만들었다.
함께 있던 묵비마저 덩달아 뛰어대니 출렁다리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화운은 다리의 출렁거림에 몸을 맡기며 걸었다.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는 모습에 향아는 실망한 빛을 보였다.
“피이! 하나두 안 무서워하네.”
“미안. 나 같은 사람이 무서워하는 건 이런 다리가 아냐.”
“그럼 뭔데? 뭘 무서워 해?”
“음······ 향아처럼 예쁘고 착한 사람들이 다치는 거. 난 그런 게 젤 무섭고 걱정 돼.”
“진짜?”
“응.”
“진짜 향아가 예뻐?”
“그럼. 할아버지한테 그런 말 못 들었어? 진짜 예쁜데.”
“할아버진 맨날 천방지축이래. 그게 무슨 뜻이냐니까. 말 안 듣는 애가 여기저기 막 싸돌아다니는 거래. 씨! 향아는 묵비랑 노는 게 좋은데.”
입술이 불만으로 삐죽거리는 게 귀엽다.
화운은 웃으며 달래주었다.
“향아가 다칠까 봐 걱정하셔서 그런 거구만. 향아는 좀 더 커야겠다. 할아버지의 그런 맘도 몰라주다니.”
“그래?”
“묵비를 친구로 만들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향아가 지금 보다 더 어렸을 때 묵비가 항상 곁을 지켜주었을 걸.”
“음······ 그런 거 같아. 히이!”
아이 특유의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린 향아가 건너편을 향해 뛰어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손님이야! 손님! 착한 손님이 왔어! 할아버지!”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고 하는데,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특히 그렇다.
화운은 덩달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향아의 뒤를 따라갔다.
‘옷깃만 스쳐도 운명이라는데 드넓은 밀림에서 향아를 만난 건 운명이 무해곡으로 이끈 것일 수도 있어. 아주 잘 풀릴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