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97화 (97/207)

#097. 마신의 혼돈

사황의 입장을 대변해 줄 생각은 없다.

그가 한 짓은 복수가 아니라 무차별적인 살인에 불과하니까.

어떤 이유로도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살인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럼에도 무해노인이 은거하게 된 진짜 이유를 꺼낸 건 안타까워서다.

무해노인이 겪었을 배신감과 좌절감이 너무나 안쓰럽다.

그렇다고 천하무림 초년생인 자신이 백날 떠들어 봐야 까마득한 과거의 역사를 천하가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사실임을 확인시켜 줄 증거도 없고, 조사할 시간도 없다.

그러니 하오문 같이 정보를 다루는 문파에 제공하는 게 낫다.

이들이라면 정확한 정보 확인을 위해서라도 상세히 조사해 볼 테니까.

그리고 사실임이 확인되면 그 정보를 구매하여 세상에 퍼뜨릴 생각이다.

천하는 낯부끄러운 역사라도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도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무해노인이 은거한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흠, 사실 유무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죠?”

“그건 귀문에서 하셔야지요.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정보에 관한한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는 거 아닙니까?”

천옥당은 할 말이 없었다.

“신풍대주라는 신분을 믿어달라는 거네요?”

“아니요. 귀문의 능력을 믿으셔야지요.”

천옥당의 미간에 패인 골이 깊어졌다.

생각이 그만큼 깊어진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거금 대신으로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고민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상대가 근자에 유명세를 크게 떨치고 있는 신검룡, 신풍대주인 데다 무해노인에 관한 정보라면 천마에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은거한 이유가 개인적인 것이라면 고급 등급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이 거래, 받아들이겠습니다.”

천옥당이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화운은 천옥당을 만난 곳 아래층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시면 원하시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직접 안내해 준 천옥당이 화운을 두고 사라졌다.

화운은 실내를 둘러봤다.

옥처럼 보이는 돌을 반질거리도록 만든 돌 탁자와 눈으로 보기만 해도 편해지는 것 같은 의자, 수려한 산수화가 걸린 벽 등 화려하게 꾸며진 집무실이었다.

화운은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탁자엔 그새 준비해 둔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있었다.

화운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반시진(1시간)이 지났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천옥당이 돌아왔다.

그녀의 뒤를 이어 다섯 명의 시비가 작은 다탁처럼 보이는 물건을 각각 들고 왔는데, 저마다 서책들이 몇 권씩 쌓여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두거라.”

천옥당의 명에 시비들이 서책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물러갔다.

“천마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분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유를 물어도 결례가 되지 않을까요?”

천옥당이 얼굴을 들이밀며 진한 향기를 풍겼다.

귓가를 파고드는 달콤한 음색에 뭔가를 갈망하듯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눈빛.

그러나 화운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그녀가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드리는 질문이에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여서입니다.”

화운이 대답했다.

화려한 색채의 옷차림과 붉게 칠한 입술이 고혹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왠지 피를 들끓게 만드는 것 같은 진한 향기.

사내의 가슴을 진탕시키기에 충분했지만 화운은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백전불태라면······ 천종천마교와 싸울 거라는 뜻입니까?”

천옥당이 방긋 웃는 얼굴로 물었다.

허나 그녀의 속내는 실망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참 잘난 체하는 사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부풀려 자신을 과신하곤 하던데 신검룡도 겨우 이 정도였나?’

화운은 천옥당이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화운은 천옥당이 말을 자꾸 걸어준 덕분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하오문은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던데,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천옥당의 태도가 살짝 시큰둥하게 변했다.

화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다.

“천종천마교는 명왕과 멸제의 다툼이 극에 달한 상태입니다. 정확히는 멸제가 행동에 나서기 직전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하오문은 멸제가 성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패할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까?”

“······!”

천옥당의 눈이 커졌다.

화운이 지금 말한 정보는 하오문 내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극비 중의 극비인 정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말했잖습니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천종천마교에 대해 많은 걸 알아보고 있고, 또 알고 있다는 뜻이다.

천옥당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화운을 바라보다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본문은······.”

천옥당은 말하다 말고 고민했다.

말해도 되는 것인지.

그러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말을 바꿔 물었다.

“정무맹에서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인가요?”

“아닙니다. 현재로서는 저 혼자만 알고 있습니다.”

화운을 바라보는 천옥당의 눈이 더 커졌다.

화운의 정보망이 정무맹을 웃돌고 있거나 정무맹의 정보망을 화운이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이 남자······ 위험한 걸까?’

천옥당은 화운을 빤히 바라보며 그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고 싶었던 건 알아들었으니까요.”

“예?”

“천 소저의 반응을 보니 천종천마교 내에도 하오문 사람이 있군요.”

화운이 급소를 찌르듯 말했다.

천옥당은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천 소저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방금의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하고, 이제 이것들을 살펴보았으면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천옥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몇 번을 망설이다 밖으로 사라졌다.

화운은 그 같은 모습에 속으로 웃었다.

‘무영자 어르신을 구하러 갈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천종천마교에도 하오문 사람이 있다.

그러니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함께 가는 무영투와 몸이 정상이 아닐 무영자가 덜 위험하게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고 무영투가 준비가 된 후의 일이다.

지금은 천마와 마신 아수라에 대해 알아볼 때였다.

화운은 탁자 위의 책자들을 한 권씩 살펴봤다.

“흠, 이쪽은 천마에 관한 것이고, 이쪽은 아수라에 관한 거로군.”

천마에 관한 책자가 대부분이었고, 마신 아수라에 관한 책자는 세 권뿐이었다.

화운은 천마에 관한 책자들을 먼저 살펴보기 시작했다.

***

화운에게서 물러난 천옥당은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신검룡 신풍대주에 관한 것들을 가져다주세요.”

그녀가 의자에 앉기도 전에 말하자 옆방에서 인기척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풍채 좋은 중년인이 들어왔다.

“문주님, 신검룡에게 관심이 생기셨나 봅니다.”

“풍백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종류의 관심이 아니라서 실망이겠어요.”

천옥당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까?”

풍백이 얇은 책자를 내밀었다.

“알아볼 게 있어서예요.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입 닫고 기다리겠습니다.”

풍백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천옥당은 그가 가져다준 화운에 대한 정보를 세심히 읽었다.

그리고 한 식경 후 책자를 덮었다.

“확실히 그는 뭔가가 있어요.”

“검마에게 검을 사사했을 수도 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어떤 기연이 있었다는 거 말입니까? 그게 뭐 새삼스럽다고 그러십니까?”

“아니요. 그거 말고, 그는 본문이 극비로 다루는 정보들을 꽤 많이 알고 있어요. 황보세가의 소패룡이 금단의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구룡태자가 백리세가를 급습하려던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정말입니까?”

“그래요. 그가 백봉에게 관심이 있어 몰래 따르다가 구룡태자를 막게 되었을 거라는 우리들의 예측이 잘못 된 것 같아요.”

“어째섭니까?”

“그가 백리세가가 이동한 경로를 따라갈 이유가 없다는 게 우리들의 판단이었고, 그래서 그가 백봉 때문에 그 경로를 따라 간 거라고 판단했잖아요.”

“백봉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곳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구룡태자를 막기 위해서 그곳에 나타났던 거다?”

“예. 바로 그거예요.”

“너무 억측 아닐까요?”

“그는 천종천마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자세히 알고 있어요.”

“예?”

“멸제가 일을 벌이기 직전이라는 걸 알고 있더란 말입니다.”

“······!”

“무해노인에 대한 정보도 그렇고, 그는 세상이 모르는 정보를 손에 쥐고 있고 앞서 움직인 거예요. 이건 하오문주로서의 감이에요. 확실해요.”

하오문주 천옥당은 화운의 얼굴을 떠올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가진 정보망을 알아야 해.’

***

화운은 천마에 관한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건진 게 없군.’

천마에 관한 제법 많은 정보들이 있었다.

그러나 화운에게 필요한 정보는 없었다.

그저 사황에 버금가거나 더 강해보이는 천마의 마공들에 대한 정보를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좀 더 상세히 알게 된 게 전부였다.

‘지금 천마는 자신의 천마지존공에 마신의 혼돈을 융합했다고 했으니까 천마지존공 정도로 생각하면 안 돼. 그렇다면 결국 마신의 혼돈이 뭔지 알아야 하고, 결국 마신 아수라에게 어떤 능력들이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해.’

화운은 마신 아수라에 관한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세 권의 책자를 한 시진에 걸쳐 꼼꼼히 읽은 후에야 책자를 덮었다.

“마신 아수라······.”

화운은 눈을 감고 자신이 읽은 내용을 정리했다.

아수라(阿修羅).

스스로 악신이 되어 천신들과 싸움을 벌인 존재.

천축(天竺 인도)의 신화에 인간과 신의 혼혈인 반신으로 등장하며 인드라(신들의 왕, 제석천)와 같은 절대 천신에 대항하는 존재이다.

인드라가 딸을 취한 것에 분노한 아수라는 절대신 인드라를 공격했으나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수라도에 떨어졌다고 한다.

수라도는 중생이 자신의 업에 따라 윤회하게 되는 육도(六道)의 하나로 삼악도라 불리는 지옥, 아귀, 축생 바로 위에 존재하는 삼선도 중의 가장 밑이다.

삼선도.

천도, 인간도 그리고 수라도.

수라도는 아집이 강하고 사나워 언제나 싸움만 일삼는 중생들이 자신의 업에 따라 떨어지는 곳으로 끊임없이 싸움만 벌여야 하는 곳이다.

인간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아수라장이라는 말은 아수라가 떨어진 수라도에서 생겨난 말이다.

싸움이 끝없이 벌어지는 수라도.

아수라는 인드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수라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말살한다.

그 와중에 인드라에 대항할 힘을 얻게 되었다.

수라도를 벗어나 언제든 천상에 오를 수 있는 힘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것을 되돌려버리는 힘이었다.

그러나 그 힘을 가지고도 결국은 인드라를 쓰러트리지 못했다고 한다.

‘아수라는 결국 실패했어. 하지만 인드라에 대항할 힘을 얻었다고 했어. 수라도를 벗어나 언제든 천상에 오를 수 있는 힘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것을 되돌려버리는 힘. 소멸하는 것을 되돌리는 힘은······ 경천보패야. 경천보패가 틀림없어!’

천마가 그랬다.

경천보패는 원래 마신 아수라의 권능이었다고.

그렇다면 언제든 천상에 오를 수 있는 힘이라는 건 뭘까?

그 힘이 천마가 말한 마신의 혼돈일까?

아니면 그 힘과 경천보패의 힘을 합친 것이 마신의 혼돈이라는 걸까?

화운은 천종천마교에서 봤던 천마의 신위를 떠올렸다.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던 거대한 악마의 손과 발.

‘그건 분명 사람의 무학이 아니었어. 마신, 그래 마신 아수라의 힘일 거야. 인드라에 대항할 수 있다는 그 힘.’

화운은 눈을 번쩍 떴다.

“천마보다 아수라에 대해 알아보아야겠어.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해.”

화운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로 이때 천옥당이 들어왔다.

그녀가 문밖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는 걸 화운은 뻔히 알고 있었다.

문밖에서 기다릴 정도로 궁금한 것이 있다는 것이리라.

화운은 천옥당을 보자마자 말했다.

“궁금한 걸 물으십시오, 대답해 주겠습니다. 그 대신 마신 아수라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곳을 알려주십시오.”

“······!”

마신 아수라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곳?

어렵지 않다.

신화시대와 밀접한 문파가 있으니까 그곳을 알려주면 된다.

천옥당은 자신의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 같아 반색하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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