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지나간 시간 속으로
“오랜만에 오는 본파이건만 시간이 너무 없구려.”
교당 구석구석을 눈에 담으며 선우유성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이다.
그에 초백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간이 너무 없다니요, 스승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 가르쳐 준 기억이 있는데, 잊어버린 모양이구려. 양강의 무공을 익힌 무인은 초혼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었소.”
“죄송합니다. 무인들밖에 없는지라······.”
“선천의 음기를 지닌 여시주라면 양강의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상태일 터, 오히려 적합하다는 것도 가르쳐드렸소만.”
“아!”
이제야 생각이 난 듯 초백이 탄성을 터트렸다.
“선사, 어찌하여 초백이한테 강림하신지는 모르오나 빈도의 제자가 되어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면 부디 청하건데 본파의 명맥이나 잇게 해주시오.”
“스승님?”
“선사임을 아나 너무나 짧은 해후가 아쉬워 초백이라 불러보오. 초백아! 어질고 어진 너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거라. 훗날 다시 볼 날이 있을 것이니 아쉬워도······ 그리워도······ 너의 마음이······.”
점점 작아지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스승님! 스승님!”
초백이 당황하여 불러보지만 한번 돌아가 버린 혼백은 다시 응답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선우유성만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운은 선우유성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괜찮으냐?”
“예, 그냥 깊이 졸았다가 깬 것 같아요.”
“그럼 됐다. 이쪽에서 조용히 운기해라.”
선우유성은 화운이 가리키는 곳에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운기를 시작했고, 이때까지도 초백은 허탈감에 멍청히 서 있었다.
“스승님, 제자는 어쩌라고······.”
초백의 음성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화운 등은 초백의 상실감이 느껴져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긴 한숨과 함께 초백이 마음을 추슬렀다.
“늙은이가 못난 모습을 보였구먼.”
“아닙니다. 그 연세에까지 스승님을 생각하시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습니다. 저희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화운이 진심어린 모습으로 대꾸하자 초백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부모와 스승을 그리워하는 게 어찌 못난 모습이겠어. 자, 조금만 쉬었다가 자네가 원하는 육조 혜능선사를 모셔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화운이 감사를 표하며 허리를 조아리자 초백은 되었다고 한 후 의자로 가서 앉았다.
초혼의식은 극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것이어서 한 번 펼치고 나면 상당한 심력을 소모한다.
초백은 의자에 최대한 편하게 앉아 무인들의 호흡과 닮아 보이는 호흡을 하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화운 등은 초백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말도 걸지 않고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한 식경이 지났다.
“쉴 만큼 쉰 것 같으니 다시 해 볼까.”
초백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백리연이 스스로 걸어가 선우유성이 앉았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백리소저?”
화운이 의아하여 부르자 백리연이 미소를 지었다.
“화 소협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 너무 큰 것 같아요. 이렇게나마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해야지요. 늘 감사해요.”
“저도 살고자 하는 일이라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닌데······.”
“함께 평온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겠지요. 화 소협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찬사를 받아야 해요.”
“너무 띄워주십니다.”
“아뇨, 오히려 모자라요.”
“험험! 예서 기다릴 테니 맘껏 정분을 나누거라.”
초백이 도로 의자로 가서 앉았다.
“나도 여기 앉지요, 뭐.”
남궁현은 히죽 웃으며 바닥에 앉았다.
그 놀림에 백리연은 얼굴을 붉혔고 화운은 재빨리 초백에게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아쉽군. 초혼의식이 음기가 성하는 시각에 해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더 기다려 줄 수 있는데 말이야.”
초백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일어났다.
제단 뒤로 간 초백은 다시 경건한 마음을 잡고는 벼락 맞은 복숭아나무로 만든 장생검을 집어 들었다.
나직이 초혼의 시작을 알리는 진언을 왼 초백은 장생검으로 검은 닭의 피를 백리연의 주위로 뿌린 다음 부적을 태웠다.
그리고 육조 혜능선사를 청하는 진언을 외기 시작했다.
달마조사를 청하는 초혼의식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초백은 그 기록을 참고하였다.
일다경이 경건한 분위기 속에 차근차근 흘러갔다.
화운은 잔뜩 기대하고 있던 터라 혹여 실패할까봐 아연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혜능선사께 금강부동을 배울 수만 있다면······!’
답답할 정도로 반각이라는 시간이 더 더디게 흘러간 순간이었다.
“······!”
이전의 초혼과 달리 돌연한 일이 벌어졌다.
진언을 외던 초백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진 것이다.
“어르신!”
깜짝 놀란 남궁현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건들지 마라!”
화운이 다급히 소리치자 남궁현이 초백을 일으키려 손을 뻗은 채로 화운을 돌아봤다.
“······?”
“물러나. 어서!
화운의 말에 남궁현을 잽싸게 물러났다.
언제 어느 때든 화운의 말을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이때 화운은 초백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분명 그는 느꼈다.
초백의 머리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이 있음을.
화운은 천천히 손짓하여 백리연으로 하여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남궁현에게 선우유성을 챙기라고 손짓하였다.
남궁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 운기중인 선우유성의 곁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돌발적인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되었을 때 초백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전에 선우유성이 그랬던 것처럼 검붉게 물든 눈으로 화운을 바라봤다.
마치 처음부터 화운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다른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화운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언제든 발검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춘 채 입을 열었다.
“뉘신지요?”
“오랫동안 시주를 기다렸다오.”
“예?”
“시주께서 만나길 바라던 혜능이라오.”
“예에?”
화운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질 정도로 크게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잔뜩 치뜨고 있었다.
“삼라만상이 한 번의 부침을 거듭하기 전에 인세는 피에 잠기고 윤회의 법도가 깨어지니 온통 마의 어둠만이 창궐하게 된다오.”
“······!”
“다행히 과거 인세에 버려진 마신 아수라의 힘이 부처의 안배에 따라 시주를 만나게 되었으니 등불 하나가 켜진 것일 터, 빈승은 시주에게 심지가 되어줄 금강부동을 전하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렸다오.”
“아!”
화운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토록 바라던 금강부동을 혜능선사께 직접 배우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안타까운 건 빈승이 이 땅의 법도에서 벗어난 존재라 직접 가르치는 건 불허되었다오. 하여 달마조사께서 어리석은 빈승에게 가르침을 내리듯 시주께도 그분의 가르침대로 행할까 하오.”
화운은 눈을 치떴다.
지금 혜능선사는 까마득한 과거 그가 달마조사의 인도를 받아 보게 되었던 금강신의 싸움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화운은 경계심을 풀고 공손히 예를 올렸다.
혜능선사는 웃으며 반장한 후 제단으로 가서 닭피가 남아 있는 사발을 가져와 좀 전까지 백리연이 앉아 있던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앞에 앉으시오.”
화운은 혜능선사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금부터 우리가 갈 곳은 과거의 한 자락일 뿐이라 육신은 가지 못한다오. 하여 시주께 육초의 법도를 행하리다.”
화운은 공손히 허리를 숙여 그렇게 하라는 뜻을 보였다.
혜능선사는 초백이 그의 스승에게 배웠던 초탈육신행의 법도를 떠올리며 사발에 든 닭피를 손가락에 찍었다.
그리고는 화운의 얼굴에 부적에서나 볼만한 문양을 그렸다.
부적이라 함은 본시 하늘 혹은 신적인 존재와 소통하는 법식 같은 것이다.
시전자의 법기가 부적에 그려진 법식을 발동시켜 원하는 신성한 기운을 끌어당기고 증폭시켜 현실에 발휘하는 것이 바로 부적술이다.
그러나 초탈육신행의 법도는 조금 다르다.
혜능선사가 화운의 얼굴에 그린 것은 육신에서 혼백을 분리하는 법식이었다.
“준비되셨습니까?”
“예.”
혜능선사가 물었고, 화운이 대답했다.
혜능선사는 검결지를 맺은 손가락을 뻗어 화운의 미간을 짚었다.
그리고 초백의 몸에 깃들어 있는 법기를 흘려보내 초탈육신행의 법식을 발동시켰다.
화운의 얼굴에 그려진 법식의 문양을 따라 새하얀 광채가 빛나더니 화운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듯 푹 숙여졌다.
“혀엉?”
마침 운기행공을 마치고 눈을 뜬 선우유성이 놀라 부르짖었다.
“잠시 육체와 혼백이 분리된 것뿐이니 놀라지 않으셔도 되오.”
초백이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자 선우유성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만 끔벅거렸다.
“무인들의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누구보다 부처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인데, 윤회의 길에 놓인 운명이란 때로는 이토록 냉정한 모양이오.”
혜능선사는 선우유성을 향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가 보는 선우유성은 선함이 하늘에 닿은 존재였다.
다만 윤회의 길이 그를 무인들의 세상으로 인도하여 누군가의 목숨을 취하도록 하였기에 대자대비하신 부처의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한 발 물러나면 모두가 부질없는 것임을 잊지 마시어 항시 손끝에 자비심을 두시길 바라오.”
선우유성은 초백이 자신을 향해 불가의 대사 같은 말을 건네며 반장까지 하자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혜능선사는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곧 화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앞에는 화운의 혼백이 육체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제 이 몸에 지나간 시간을 열고 육초의 법도를 행할 것이오.”
백리연과 선우유성 그리고 남궁현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화운의 혼백에게 그리 말한 혜능선사는 지나간 시간을 여는 진언을 외었다.
그의 진언이 몸에 새겨져 있는 개문의 법식을 발동시키자 백리연 등에게는 그저 갑작스런 돌풍이 이는 것 같은 현상을 보여주며 지나간 시공간이 열렸다.
혜능선사는 손을 뻗어 검은 닭의 피를 찍어 스스로의 얼굴에 초탈육신행의 법식을 그린 다음 발동시켰다.
화운이 그랬던 것처럼 초백의 고개가 떨어지듯 푹 숙여졌다.
혼백이 육체를 벗어난 것이다.
육신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세 개의 혼백이 함께 있었다.
혜능선사와 화운 그리고 초백의 혼백이었다.
혜능선사는 소림사 특유의 승복을 걸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새하얀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포근하고 인자해 보이는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 누구신지요?”
초백이 당황하여 물었다.
“자네의 육신에 강림한 혜능이라네.”
“혜능? 혜······ 허억?”
초백이 크게 놀란 얼굴로 화운을 쳐다봤다.
“소림의 육조 혜능선사가 맞습니다.”
화운이 가볍게 웃으며 말해주자 초백이 놀란 얼굴로 혜능을 향해 화급히 합장했다.
“미거한 중생은 초백이라 합니다.”
“자네와는 따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을 것이니, 지금은 서운타 말고 혹여 지나간 시간의 문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이 있으면 막아주시게.”
“어느 분의 말씀이시라고 마다하겠습니까. 염려 붙들어 매시고 이놈이랑 불일을 먼저 보십시오.”
“고맙네.”
빙그레 웃어준 혜능선사는 화운을 바라봤다.
“이제 달마조사께서 불민한 제자에게 보여주셨던 과거의 시간을 보러 가시지요.”
“감사히 따르겠습니다.”
화운이 공손이 허리를 숙이자 인자한 미소를 지은 혜능선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초백의 몸속으로 스며들 듯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화운은 혜능선사의 뒤를 따라 초백의 몸속으로 자신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무런 반발력 없이 잠겨들었다.
그리고 곧 빛과 어둠이 부딪치고 있는 처절한 전장 속으로 걸음하게 되었다.
“금강신!”
황금빛 찬란한 육신을 가진 거대한 존재들이 금강신들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본 화운은 그들이 싸우고 있는 존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상을 새까맣게 채우고 있는 악마와 마귀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있는 금강신에 못지않은 거대한 육신을 가진 존재.
놀랍게도 세 개의 얼굴에 여섯 개의 팔을 가지고 있었다.
“마신 아수라!”
단박에 알아본 화운이 놀라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