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충분한 이유가 있다
다음 날 무룡대가 복귀했다.
그들은 독단적으로 움직였고 결과마저 최악이었다.
질책을 받아야 했고 심하면 누군가는 책임도 져야했다.
그러나 맹의 수뇌부들은 화운 덕분에 암울했던 상황에 서광이 비추는 것 같아 다시는 독단적인 행동을 말라는 엄중한 경고만 하는 걸로 넘어갔다.
백리명 덕분에 조금 기운을 차렸던 무룡대는 맹 내에 파다하게 퍼진 화운과 철봉황의 비무를 듣고는 다시 무력감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남궁현이 무룡대 숙소로 찾아왔다.
“무룡대주님이 어느 분이시오?”
남궁현은 화운이 시간을 돌리기 전과 상황이 달라져 적엽명이 무룡대주라는 걸 알지 못했다.
“안에 화산기룡을 찾아가게.”
무룡대원 중의 한 명이 숙소 건물을 힐끔 가리키며 말했다.
“아, 화산기룡이로군요. 근데 제가 외부인이라면 외부인인데 함부로 들어가서야 되겠습니까?”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네.”
무룡대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원래 하던 대로 먼 산만 쳐다봤다.
그 모습이 뭔가 실의에 젖은 듯 보여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남궁현은 건물 입구로 다가갔다.
그때 마침 백리명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 남궁현입니다.”
“오! 현이로구나. 여긴 어쩐 일이냐?”
오대세가 젊은이들의 회합 때 한두 번 본 게 전부인데도 백리명이 반갑게 아는 체를 해주었다.
“신풍대주님께서 무룡대주님께 전하라는 전갈이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 직접 전해야 해? 다들 상태가 좋지 않거든.”
“이거 괜히 긁어 부스럼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뭔데?”
“무룡대 전부 맹주전 옆에 있는 연무장에서 보았으면 한다고 전해달랍니다.”
“그래?”
백리명은 남궁현이 긁어 부스럼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알았다. 내가 전하도록 하마.”
“예. 제 생각에도 그게 좋겠습니다. 다만 제가 따로 말씀 드리자면 우리 대주님은 남한테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못마땅한 게 있으면 아예 모른 척하거나 찾아와서 난리를 치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흠······ 굳이 따로 보자는 건 나쁜 뜻이 아닐 거다?”
“예.”
“알겠다. 내가 잘 이야기 해보마. 그건 그렇고 우리 연이 잘 하고 있지?”
“누님이야 뭐, 너무 잘해서 탈이죠.”
“그래, 잘 할 거다. 원래 나보다도 나았던 녀석이니까. 근데 그거 말고, 니네 대주랑 잘 하고 있냐고.”
“대주님이랑요?”
“그래, 니네 대주님이랑 손잡고 입맞춤하고 그런 거 잘하고 있느냔 말이다. 연이 녀석 그런 쪽으로는 워낙 무관심하게 살아와서 마음이 있어도 그냥 바라보기만 할 건데.”
“두 분이 잘되길 바랍니까?”
“너 같음 안 그러겠냐?”
“하긴.”
“어떻든, 잘하고 있든?”
“입맞춤까지는 모르겠고, 손은 잡던데요. 대주님이 말로는 설명을 못하겠다며 검을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손잡고 그러던데요.”
“오홍! 진짜지?”
“예.”
“우훗훗! 매제라도 엉큼한 데가 있는 모양이라 다행이다.”
“엉큼한 게 다행이라구요?”
“그럼, 정상적인 사내새끼라면 이쁜 여자를 보면 만져보고 싶고, 안고 싶고 그러는 게 정상인 거다. 그리고 신체적 접촉도 있고 그래야 진척이 있을 거 아냐.”
“뭐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둘이 잘되도록 분위기 봐서 자리도 좀 비켜주고 그래라. 그러면 현이 니 짝은 이 형님께서 절세가인 뺨칠 만한 미인으로 소개시켜 주마.”
“오홋! 진짜요?”
“내가 그쪽으로는 발이 좀 넓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래, 그래. 이 형님만 믿고 어여 가봐.”
“예. 그럼 우리 대주님 전갈 좀 부탁합니다.”
“어.”
남궁현이 물러갔다.
“저 녀석도 참 밝아. 사람은 저래야 되는데······.”
백리명은 남궁현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돌아섰다.
“자기가 뭔데 우리보고 오라고 그래! 무공 좀 강하면 그렇게 막 나가도 돼? 그래봐야 자기도 신풍대주일 뿐이잖아! 안하무인해도 정도가 있지, 이건 월권이고 맹의 조직질서를 파괴하는 짓이야!”
탁자를 내리치며 성을 내는 이는 우문산이다.
선우세가 쪽 사람인 신풍대주가 너무 강해서 무섭고, 경계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샘나고 질투가 나 죽을 지경인데 무룡대한테 오라고 하니 이때다 싶어 그를 욕했다.
선우세가를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칠대문파의 후기지수들과 그가 대립하게 만들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역성을 들어주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다.
우문산은 무룡대주인 적엽명을 돌아봤다.
“대주! 가면 안 돼! 우리도 자존심이 있지. 오란다고 가면 그 자식한테 무릎 꿇은 것밖에 더 돼?”
맞는 말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에 우문산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고 하자 백리명이 툭 내뱉으며 나섰다.
“참 못났다.”
“뭐요?”
“그렇잖아! 그렇게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쁘면 오히려 찾아가서 니가 뭔데 오라고 그러냐고 따져야지. 찾아갈 용기는 없으니 가지 않겠다는 거잖아!”
“용기가 없다니, 그 무슨 망발이요?”
“그럼 가봐. 가서 따져봐.”
“따지긴 뭘 따져요! 가면 그 자식한테 무릎 꿇은 거라니까!”
“거봐. 용기가 없는 거 맞잖아!”
“진짜 말이면 단 줄 아시오! 나이 좀 많다고 대접해 주니까!”
“너 죽을래?”
백리명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항상 웃기만 해서 만만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거대한 맹수로 둔갑한 것 같은 느낌이라 우문산이 깜짝 놀랐다.
백리세가의 소가주라는 게 이제야 피부로 와 닿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었다.
“가서 이렇게 해봐. 그럼 인정해 줄게.”
백리명이 기운을 거둬들이고 히죽 웃었다.
“그, 그럼 백리 형은 할 수 있다는 거요?”
“당연하지.”
“그럼 가서 하시던가.”
“좋아, 함께 가자. 가서 니 눈으로 직접 봐봐.”
“······!”
뭔가 백리명의 수작에 넘어간 것 같아 우문산이 인상을 쓸 때였다.
적엽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문산을 바라봤다.
“그는 우릴 구하기 위해 거기까지 달려갔는데, 우린 몇 걸음조차 가면 안 되는 거냐?”
적엽명의 물음에 우문산은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
화운은 북궁설과 비무를 벌였던 곳에서 무룡대를 기다렸다.
그가 그들을 부른 건 이심환과 우진궁주 등에게 받은 신뢰를 일부나마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예전엔 자신과 신풍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천종천마교에 다녀온 후로는 달라졌다.
결국 막아야 하는 건 사황과 천사련 그리고 천마와 천종천마교의 일만마도까지다.
혹시라도 천종천마교와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자신은 천마를 상대하느라 발이 묶일 터, 그렇다면 일만마도를 상대해야할 무인들이 필요하다.
칠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전부 나서게 되겠지만 화운이 겪어본 천종천마교의 힘에는 모자란 느낌이다.
그러니 신풍대와 무룡대, 지금보다 더 강한 그들이 필요하다.
늘 강하게 만들고 싶었던 신풍대만큼 무룡대도 강해져야 한다.
그것이 화운이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올까요?”
“오지 않으면 찾아가야지요.”
백리연은 화운의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그랬어요?”
“두들겨 패서 가르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예?”
“아직도 자존심이나 세우고 그런다면 마음상태가 글러먹은 거라고 생각해요. 철봉황이 하는 거 보셨지요? 자존심 세울 땐 세우고 굽힐 땐 또 굽히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싸울 땐 싸우고. 피가 끓는다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백리연은 이제야 화운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염려가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칠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은 특히 자존심 강하고 오만하기로 유명했으니까.
그런데 백리연의 그런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옵니다.”
선우유성이 말했다.
백리연이 얼른 돌아보니 적엽명을 선두로 한 무룡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오긴 오는데 어째 기세가 좀 살벌한데요.”
남궁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슬쩍 화운을 돌아봤다.
화운은 말없이 무룡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무룡대가 화운과 신풍대 앞에서 멈췄다.
우문산을 비롯한 일부는 격한 반발심을 내보였고, 일부는 여전히 의기소침한 모습이었고, 적엽명을 비롯한 일부는 애써 담담한 척하고 있었다.
“우릴 불렀다지?”
적엽명이 물었다.
“그래.”
“왜지?”
“무공 좀 가르쳐주려고.”
화운은 무룡대의 반응이 뻔해서 어떻게 돌려서 말할까, 고민해 봤다.
결국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고, 찾는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같은 반응일 게 뻔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했다.
“······!”
역시나 놀람과 성난 불길 같은 분노가 무룡대를 뒤흔들었다.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다 못해 마구 짓밟히고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오만하다! 누가 누굴 가르쳐! 본파가 그리 우습더냐!”
“지금 앞서고 있다고 내일도 앞설 것 같으냐!”
“당장 사과해라! 그렇지 않으면 본파가 그 죄를 선우세가에 물을 것이다!”
“우린 너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치 않다!”
무룡대 내에서 분노의 비난이 드세게 쏟아졌다.
화운도 예상했던 바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이들이니까.
그런데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글쎄, 사문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못 배울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
복호검후다.
아미파의 자랑이자 자존심이라 일컬어지는 그녀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복호검후 역시 인질로 사로잡히고 철봉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았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보고 그 속에서 길을 찾고자 했다.
“철봉황의 자존심이 우리만 못할까?”
청성의 도룡도 복호검후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철봉황은 사파지. 사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못할까.”
점창의 분광은 자존심을 세웠다.
차가운 눈으로 화운을 응시하면서.
화운은 그들의 말들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적엽명만 응시했다.
적엽명은 한참을 무겁게 침묵했다.
“내가 한심한 건 맞다. 가르쳐주겠다면 배울 수도 있다. 네가 그렇게 하려는 이유가 날 납득시키기에 충분하다면.”
적엽명이 한 말이다.
너무나 뜻밖인 대답이어서 무룡대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대주! 이건 아니야! 정말 무릎을 꿇겠다는 거야!”
우문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유불문! 난 대주가 하자는 대로 따를 거다!”
백리명이 큰소리로 적엽명과 함께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때 가장 중요한 무당명검이나 아미의 복호검후 등은 말없이 적엽명만 지켜보고 있었다.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끝난 후에 알려주겠다.”
적엽명의 물음에 대한 화운의 대답이다.
적엽명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화운이 자신들을 부른 충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을 구해주던 날 먼저 객잔 밖으로 나가면서 자신들이 마음을 추스를 시간까지 주며 배려해 주던 그였으니까.
그런데 왜 자꾸만 불화의 불씨를 남기는지 모르겠다.
‘내 바닥을 보이라는 거냐?’
적엽명은 기로에 섰다.
화산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다.
화산의 이름에 누가 된다면 자결을 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화산의 자존심에 누가 되는 것일까?
예전이라면 생각할 것도 없었다.
화산의 자존심에 누가 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혼란스러웠다.
철봉황과 신풍대주의 싸움을 들은 후부터다.
정확히는 철봉황이 보여준 행동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패배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싸웠다는 건 배우고 싶었던 걸 거다.
적지에 와서 적에게 패배를 인정하면서까지 무공을 배우는 그녀의 행동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철봉황 정도 되는 유명 고수라면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법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그렇게 했다는 건 그건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적엽명의 고민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게 정말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닌 걸까?
그렇게 적엽명의 고민이 길어질 때였다.
“화산의 검은 날카롭다.”
화운이 갑자기 말했다.
적엽명이 고민에서 헤어나와 화운을 쳐다봤다.
화운은 시선을 돌려 무당명검을 바라봤다.
“무당의 검은 부드럽고, 아미의 검은 매섭지.”
무당명검에게서 다시 아미검후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화운.
“소림의 권은 무겁고, 점창의 검은 빠르고, 청성의 도는 사납다.”
그렇게 차례로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한 화운은 다시 적엽명을 응시했다.
“너희들은 각파가 오랜 세월동안 누적해온 무학을 배웠을 테니 무학에 관한 넓이와 깊이가 상당할 거다. 아마도 내가 감히 넘보지 못할 수준이겠지.”
그렇게 말한 화운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한 사람이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당당함이 넘치는 붉은 무복의 여인.
바로 철봉황 북궁설이었다.
화운이 말없이 한쪽만 바라보자 무룡대와 신풍대 모두 그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북궁설을 확인했다.
신풍대는 이미 본적이 있는데다 숙소로 찾아온 그녀와 며칠을 보내기도 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무룡대원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눈에 띄는 복장에 그녀가 철봉황이라는 걸 알아보았고, 화운과의 비무로 보여주었다는 놀라운 투지와 신위를 상상하며 다들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북궁설의 미모에 시선을 빼앗겼다.
“다들 모아두고 뭐하고 있어?”
화운 앞에서 멈춘 북궁설이 무룡대를 쓱 둘러보며 물었다.
모두들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오히려 자신이 그들을 바라보는 듯한 태도였다.
“천사련을 무너트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럼 나도 들어야겠네.”
“극비입니다.”
“비밀은 지켜줄게.”
“사신의 용무가 아직 안 끝났습니까?”
“끝났지. 얘들 이렇게 돌아와 버렸잖아. 너 때문에 말이야.”
무룡대를 둘러본 후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북궁설.
화운은 무공만큼이나 성격도 저돌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대놓고 물었다.
“천사련으로 오늘 돌아가야 할 거 아닙니까?”
“아니, 안 가.”
“예?”
“맹주님이랑 한 내기에서 졌어, 그래서 열흘 동안 니들이랑 놀아야 해.”
북궁설이 하소연하듯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