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아미, 청성 그리고 당문
천종천마교의 사천침공.
화운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심했다.
‘거짓은 안 돼!’
물론 모든 걸 다 말할 순 없으나 거짓으로 꾸며댈 순 없었다.
하여 몇 년의 주기로 아이들이 많이 실종된 사건부터 이야기했다.
그 일에 천종천마교의 강시당이 배후로 연루되었고, 더 상세히 알아보고자 강시당에 침입하여 고루마군을 잡아 취조하던 중 천마와 맞닥트려 싸우게 되었고 자신이 일패도지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주하는 자신에게 천마가 사천으로 갈 것이니 그곳에서 다시 싸워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했다.
일부분은 경천보패를 이야기 할 수가 없어서 말을 꾸며야 했다.
화운의 설명을 들은 화산장문인 임장홍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네 말대로라면 시간이 촉박하겠군.”
“예.”
“허면 이리 하지. 자네는 곧장 사천으로 가게. 종남파는 내가 찾아가도록 하겠네.”
“마귀들에 관한 부분은 쉬이 믿기 어려운 부분인데 믿어 주시는 겁니까?”
“사제가 믿고 본파의 선령들께서 믿는 자네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을까?”
임장홍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선령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가 마귀에 관한 일이라고 믿지 못할까 싶다.
그래도 고마운 마음이다.
화산파 장문인이 믿어주니 사천에서의 일을 풀어가기가 수월해질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마인들의 숫자가 칠만이면 섬서무림과 사천무림 개개로는 상대가 안 될 것이네. 더군다나 정예들 일부가 정무맹으로 파견나간 상황이지 않은가. 열흘 후라고 못 박은 걸 보면 다른 곳에 지원을 요청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걸로 여겨지고······. 아! 무당산은 그리 멀지 않네. 그곳엔 내가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네.”
그렇게 빠르게 정리한 임장홍은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주었다.
정체 모를 청년이 상궁에서 부상당한 몸으로 운기조식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임장홍은 화운의 묵검을 보자마자 신풍대주인 것 같아 제자에게 금창약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여 미리 받아두었었다.
“경신은 할 수 있다고 하니 막지는 않겠지만, 이거라도 바르게. 그 몸으로는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네.”
“감사합니다.”
화운은 기꺼이 받아서 상처에 발랐다.
상의를 벗고 등 뒤쪽까지 바르는 모습에 임장홍은 화운의 상처가 앞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 괜찮은가?”
“팔 일이 남았습니다. 그때쯤엔 정상적으로 싸울 수 있을 겁니다.”
임장홍은 금창약을 바르고는 팔을 돌려보는 화운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전장을 오랫동안 떠돈 백전의 무장들이나 보여줄 만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범상치 않구나!’
감탄한 임장홍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미와 청성에는 내가 제자를 따로 보내겠네. 자네보다 늦게 도착하겠지만, 나중에라도 도움이 되겠지. 문제는 당문이네. 당문은 천사련 소속이라 쉽지 않을 것이네.”
“정파가 당한다고 해서 사천이 그들의 땅이 되는 것도 아니니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치상으로야 그렇지. 허나 무림의 일이라는 게 어디 그런 이치로만 움직이던가.”
“혹시 고견이 있으신지요?”
“그들이 도저히 따를 수밖에 없도록 납득을 시켜주던가, 아니면 강제로라도 끌어내야지.”
“······!”
강제로라도 끌어내야 한다는 말에 화운이 다소 놀란 눈치이자 임장홍이 덧붙여 말했다.
“당문의 암기와 독은 적은 숫자로 많은 숫자를 상대할 때 무척 용이하다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당문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 독과 암기들을 빼앗기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화운이 납득한 것 같아보이자 임장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바쁘게 되었으니 이만 내려가야겠네. 사천 청성파에서 보세.”
“청성에서 보시자는 연유가 있으신지요?”
“청성이 가장 북쪽이어서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임장홍이 먼저 돌아섰다.
화운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정중히 포권한 다음 공공무영비를 펼쳐 몸을 날렸다.
이때 잠깐 돌아본 임장홍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화운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경신만 봐도 그의 대단함을 알겠구나!”
***
사천성 아미파.
아미파는 여승들로 이루어진 문파라 금남의 땅이다.
허나 정무맹 신풍대주의 신분패를 보여주자 아미파 장문인을 만날 수 있었다.
금영신니.
아미파 장문인인 금영신니는 멸절신니의 사매의 제자였다.
온화한 미소 뒤로 냉정함을 감추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걸걸하면서도 꼬장꼬장해 보이나 속으로는 온화하기 짝이 없는 멸절신니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다 보니 물과 기름처럼 화합하지 못해 멸절신니가 늘 아미파 밖으로만 떠돈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신풍대주께서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셨군요.”
타초경사!
풀을 건드려 그 속에 있는 뱀을 놀라게 한다는 뜻이다.
원래는 한 사람을 벌하여 다른 사람을 경각시킨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공연한 짓을 해서 적을 화나게 만들었다며 추궁할 때 쓰이기도 한다.
지금 금영신니는 화운을 질책하는 뜻으로 사용했다.
그녀가 싫어하는 멸절신니가 극구 칭찬하는 화운이기에 어떻게든 흠집을 내서 멸절신니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이다.
천종천마교는 아직 멀리 있었고, 멸절신니를 깎아내릴 수 있는 기회는 바로 눈앞에 있으니 어찌 마다하겠는가.
게다가 멸절신니가 자신의 허물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보낸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살짝 들기도 했다.
화운의 말이 믿기지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금영신니의 속내를 알지 못한 화운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거나 핑계를 대지는 않았다.
“제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실수했습니다.”
화운은 사과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금영신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고개를 숙이는 화운을 내려다보았다.
“잘못은 신풍대주께서 저지르고 피는 사천사람들이 보게 되었어요. 이 일을 어찌 할까요?”
화운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금영신니를 똑바로 바라봤다.
금영신니는 온화한 얼굴 속에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 표정만으로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말 한마디가 차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기에 짚을 건 짚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수를 추궁하겠다면 얼마든지 듣겠습니다만 천마와 천종천마교가 사천으로 향하는 것까지 제 잘못으로 떠넘기는 것까진 감당할 생각이 없습니다.”
“괜히 그들을 건드려놓고는 발뺌을 하겠다는 건가?”
금영신니의 말투가 변했다.
화운도 그러한 사실을 알아챘다.
하여 더욱 분명한 태도로 말했다.
“적을 정찰하고 적을 공격하는 게 제 일입니다.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적들이 더 큰 공격을 감행한다고 하여 적을 정찰하고 공격한 일을 잘못이라고 한다면 저뿐만 아니라 정찰대와 돌격대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법입니다. 누가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겠습니까?”
“너의 실수로 인해 사천 사람들이 피를 보게 되었는데 참으로 뻔뻔하구나.”
금영신니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지지 않는 화운의 모습에서 무공과 배분만 믿고 자신을 가르치려 들던 멸절신니가 겹쳐 보인 것이다.
‘대체 뭐야? 내가 아미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어?’
화운은 더 대화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칠만의 마귀들이 쳐들어오는 판국에 이 따위 언쟁이나 벌여야 하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났다.
“제 실수에 대한 대가는 피로써 치르겠습니다. 아미에 우환을 불러들여 죄송합니다.”
화운은 정중히 포권하고는 당차게 돌아섰다.
하지만 금영신니는 이대로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멸절신니에게 당신이 그토록 칭찬한 이가 아미의 제자를 피 흘리게 했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금영신니는 장로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무엄하다!”
“아미의 경내에서 어찌 이리 무도하게 군단 말이냐!”
아미파의 장로들이 호통을 치며 검자루를 잡았다.
더불어 아미의 제자들 수십 명이 화운의 앞을 막았다.
차가운 기운이 대전 안을 가득 채웠으나 화운은 거침없이 걸었다.
이때 장로 중의 한 명이 금영신니를 쳐다봤다.
금영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본파를 업신여기다니 팔을 놓고 가라!”
금영신니의 명을 받은 장로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스악!
매서운 검풍이 일 정도로 강한 검세였다.
하지만 화운을 베기는커녕 걸음조차 막지 못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검격이 그냥 화운을 지나쳐 버렸다는 것이다.
화운이 공간을 비틀어놓았던 것인데, 그러한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에겐 실로 괴이쩍은 일로 보였다.
“사술이다!”
“정파인이 사술을 익히다니!”
장로들이 더욱 화를 터트렸다.
화운은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사술이라고? 육조 혜능 선사께서 무덤에서 뛰쳐나오실 일이다!’
화운이 혀를 차는 사이에 아미의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고, 다른 장로들도 금영신니를 향해 어찌 할 것인지 명을 기다렸다.
“감히 사술 따위로 본파의 청정을 더럽히다니!”
금영신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을 친 순간이었다.
화운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깜짝 놀란 아미의 제자들이 화운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화운이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야 말로 신출귀몰하는 모습으로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미의 장로들조차 화운의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가운데 화운의 목소리가 대전을 크게 울렸다.
“멸절신니께서도 인정하시는 무공을 사술이라고 하다니, 무공을 폄하하는 거요, 아니면 멸절신니의 안계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이오?”
“감히 본파를 능멸한 죄, 정무맹에 따져 물을 것이다!”
금영신니가 소리쳤다.
“제발 그래주십시오. 누가 창피를 당하는지 보지요.”
화운의 말이 끝난 순간 그의 모습이 대전 입구에 나타났다.
화운은 대전을 가로질러 가장 안쪽의 금영신니를 직시하며 외쳐 말했다.
“천마가 오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당신들이 그림자조차 잡지 못한 나를 아이 다루듯 한 천마가 오고 있다고! 칠만에 달하는 마인들과 강시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그깟 시시비비를 물고 늘어지는 겁니까? 아미의 제자들이 모조리 죽어 가는데도 시시비비나 가리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화운은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더니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아미의 제자들은 쫓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장문인만 돌아봤다.
금영신니는 온화하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의자에 주저앉았다.
멸절신니에 대한 반감 때문에 화운의 실수를 물고 늘어졌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 되었다.
타초경사의 우를 저지른 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
화운은 청성파로 갔다.
다행히 청성파에서는 아미파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칠만의 마귀들에 대한 염려로 그간 잊어버리고 있었던 이들과 뜻밖의 조우를 했다.
아미파로 가기로 했던 신풍대와 무영투가 청성파에 있었던 것이다.
“사천에 들어설 즈음에 스승님께서 이곳 청성으로 가자고 하셨다.”
무영투의 말이다.
청성파 전대 장문인과 무영자는 막역지우였다.
무영자를 알아본 당대 청성파 장문인은 의원을 불러 상처를 돌보는 등 극진히 대해주고 있었다.
그에 화운은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마 스승님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남궁현이 물었다.
화운의 상처도 그렇고 뭔가 심상치 않아 보여 조심스런 모습이었다.
“돌아가셨다.”
“예에?”
“······!”
다들 크게 놀랐다.
화운이 부상당하고 혼자 온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설마 검마 스승님이 돌아가셨을 줄이야!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얼굴로 화운만 쳐다봤다.
반대로 화운은 세 사람을 둘러보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들이 그 마귀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상대한다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나 있을지······.’
화운의 표정이 급격이 어두워졌다.
세 사람은 화운이 검마를 생각하느라 그런 줄 알고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청성 장문인이 보낸 청성파 제자가 찾아왔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화운은 청성파에 도착하자마자 장문인에게 천마와 천종천마교가 사천 땅으로 쳐들어올 거라는 말을 했다.
그에 깜짝 놀란 청성파 장문인은 화급히 장로들을 소집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함께 하자며 일단 화운을 신풍대와 만나게 해주었다.
“함께 가자. 어차피 너희도 알아야 할 일이다.”
화운이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세 사람은 검마의 죽음 외에도 또 다른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는 말없이 화운의 뒤를 따라갔다.
청성파 장문인이 보낸 제자는 네 사람을 청성파 대전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청성파 장문인과 다섯 명의 장로들이 화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마가 쳐들어온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화운이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급하게 물어왔다.
그 물음에 신풍대원 세 사람조차 화들짝 놀라 쳐다봤다.
화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청성 장문인과 장로들에게 정중히 예를 취했다.
“정무맹 신풍대주 화운입니다. 먼저 신풍대 일행을 받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풍대와 무영자 어르신을 받아주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 고마워 할 일도 아니네. 그건 됐고, 얼른 천마 이야기나 해보시게.”
화운은 화산 장문인에게 했던 이야기 그대로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화산파에 들렸다 온 이야기와 화산 장문인이 섬서무림을 규합하여 사천으로 오겠다고 한 부분까지 말해주었다.
“그런 허무맹랑한 일이······!”
“화산 장문인께서 그 말을 믿었단 말인가? 아! 자네 말을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워낙 터무니없는 일이라······.”
청성 장로들이 술렁였다.
불신하는 기색들도 더러 보였다.
화운은 이해했다.
자신이 저들 입장이라도 쉬이 믿지 않았을 이야기였다.
“화산 장문인께서는 제 말을 믿으셨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감숙으로 보냈을 겁니다. 청성과 사천무림도 대비는 대비대로 하고, 사람들을 보내 확인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화운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화운의 말이 거짓이라면 손가락질 하고 욕하면 될 일이지만, 무시하고 내버려 두었다가 사실로 판명나면 훨씬 더 큰 화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들께서 이견이 없다면 사천무림을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청성 장문인이 장로들을 돌아봤다.
모두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준 청성 장문인은 화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천무림 역시 정과 사 둘로 나누어져 있네. 당문은 대대로 정사지간이었으나 사천무림에서만큼은 사파에 입김이 강하네. 그리고 그들의 암기와 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당문은 제가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방도가 있는 겐가?”
“섬서무림이 사천으로 향하고 있고, 사천의 정파가 한 자리로 모이면 그들도 어떻게든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거기에 천종천마교에 관한 이야기를 던져주면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겠지요.”
어떻게든 사파를 하나로 규합해두고 적당한 때에 정파와 합류하게끔 하면 되지 않을까?
화운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청성 장문인도 화운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지금 당장으로써는 썩 괜찮은 것 같았던 것이다.
화운은 천종천마교가 북쪽에서 내려올 것이니 청성파에다 거점을 만들어야 할 거라는 화산 장문인의 말을 끝으로 당문으로 향했다.
***
사천당문.
암기와 독으로 유명한 정사지간의 가문이다.
처음엔 암기로 시작했는데 암기로는 고수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 암기에 독을 바르기 시작했다.
갈수록 강한 암기와 더 독한 독을 만들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누구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대로 정파도 사파도 아닌 그 중간에서 외줄타기 하듯 홀로 존재하던 가문이었으나 당대에는 천사련에 가입하여 정사대전에 참전하고 있었다.
그런 당문에 정파의 선봉대 격인 화운이 찾아간 것이다.
“정무맹 신풍대주요. 천종천마교가 사천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 문주님께 아뢰주시오.”
화운의 말에 문지기들이 크게 놀랐다.
정무맹의 신풍대주라는 화운의 신분에 깜짝 놀랐다가 천종천마교가 쳐들어온다는 말에 한 사람이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갔다.
이후 화운은 정문을 향해 당당히 서 있었고 문지기들은 잔뜩 긴장한 채 화운을 경계했다.
그렇게 일다경 정도 지나자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이십여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선두에는 깡말라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사천독왕은 아니었다.
장강에서 싸워 본 적이 있기에 화운은 사천독왕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신풍대주가 맞느냐?”
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운은 신풍대주의 신분패를 던져주었다.
노인이 신분패를 받아 살펴보았다.
하지만 정무맹 소속도 아닌 당문 사람들이 신분패를 알아볼 리 만무했다.
“장강에서 귀문의 문주님과 싸워보았습니다. 한데 문주님께서는 여태 장강에 계신 겁니까?”
사천독왕과 싸웠다는 말에 노인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그렇잖아도 신풍대주가 사천독왕과 장강수로왕의 합공을 물리쳤네, 어쩌네 하는 소문이 한참 떠돌았었기에 적개심이 크던 차였다.
태양존자를 죽였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당장 공격했을 정도였다.
노인은 분노를 억눌렀다.
그리고 장문인의 위치를 함부로 누설할 수 없어 그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으며 신분패를 던져서 돌려주었다.
“마교가 쳐들어온다는 건 무슨 말이냐?”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지라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해서 억지로 납득시켜드리진 않겠습니다. 다만 정파의 상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현명하게 움직이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운을 뗀 화운은 노인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감숙에 갔다가 천마교가 사천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섬서성의 화산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하고 곧장 사천으로 넘어와 아미와 청성에 알린 후 이곳으로 오는 길입니다. 화산파의 장문인께서는 섬서 무림인들을 규합하여 청성으로 향하겠다고 하시면서 사람을 보내 무당에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대략 닷새 정도 남은 실정이라 그 외에 도움을 청할 곳은 없습니다.”
화운의 말에 노인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당문 무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정파가 사천으로 집결한다는 말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섬서무림인들까지 몰려오는 게 본문을 치기위한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믿는단 말이냐?”
노인이 성난 얼굴로 물었다.
적대적 관계이니 당연히 할 수 있는, 아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심이리라.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한 화운은 금강부동신법을 발휘하여 느닷없이 노인의 코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노인이 반사적으로 대처하기도 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 모습에 당문의 무인들이 암기들을 끄집어내며 금방이라도 한바탕 할 기세였다.
그런데 노인이 손을 들어 막았다.
화운은 침착한 노인의 모습에 어쩌면 자신의 생각대로 되겠다는 기대를 하며 검을 뽑았다.
당문의 무인들이 움찔 거리며 손에 쥔 암기들을 뿌려댈 기세였다.
그러나 노인이 들어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막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감각을 능가하는 화운의 움직임에 크게 놀란 상태였고, 그런 움직임을 가지고도 전혀 살기를 보여주지 않고 있어 뭔가 있다고만 짐작했다.
화운은 그런 노인의 얼굴만 바라보며 검신에 새파란 강기를 오 장 길이로 길게 발휘한 다음 머리 위 허공에다 채찍처럼 휘둘러댔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검강을 거둬들였다.
“당문을 공격할 생각이라면 이렇게 했을 거요.”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화운은 노인을 직시하며 계속 말했다.
“화산파 장문인과 청성의 장문인께서 말씀하시길 천종천마교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 당문의 독과 암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셨소.”
거기까지 말한 화운이 입을 다물고 바라보기만 하자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곧 화운의 말에서 뭔가를 감지 한 듯 눈을 번뜩이면서 물었다.
“숫자가 얼마나 된다는 것이냐?”
“칠만이오. 아울러 천마가 직접······ 올지도 모릅니다.”
말하면서 드는 생각이 ‘천마가 직접 올까?’였다.
돌이켜보니 그가 직접 오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서다.
“알았다. 당문은 알아서 하겠으니 그만 돌아가라.”
화운이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에 노인이 말했다.
화운은 이 자리에서 함께 싸우겠다고 하지 않은 건 조금 아쉬웠으나 당문 입장에서는 선뜻 합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당문의 문주가 부재중이라 그런 결정을 내리기가 더더욱 쉽지 않을 터.
화운은 고개를 끄덕인 후 포권했다.
“생존에 관한 일입니다. 부디 함께 생존할 수 있는 선택을 하셨으면 합니다. 그럼.”
화운은 허공으로 천천히 부상했다가 공공무영비를 펼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인 당화천은 화운이 그렇게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며 사라지자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첩첩이 산중이라더니 당문의 앞길이 바로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