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혼자라도 싸울 겁니다
삼 일 후 화산파를 위시한 섬서무림인들이 도착했다.
섬서의 사파인들까지 상당수 포함된 삼천에 달하는 숫자였다.
사천의 무인들도 속속들이 집결했다.
하루만에 오천에 가까운 숫자가 모이더니 섬서무림인들이 도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다시 수천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일만에 가까운 숫자가 청성산 일대에 천막을 쳤다.
화운은 그러한 광경을 지켜보며 새삼 놀라는 중이었다.
정신없이 섬서로 달려가고 사천으로 달려와 상황을 전달할 때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이토록 많은 숫자가 모인 걸 보니 자신의 말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화운이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천하 각대문파에 퍼져 있는 신풍대주 화운에 대한 유명세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었다.
정무맹에 파견 나가 있는 각대문파의 고수들이 자파에 보고할 때 화운에 대해 나무랄 데 없이 빼어나다며 호감을 드러내 놓은 것이 호의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어째 놀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옆에서 당옥기가 말했다.
두 사람은 지금 청성파 경내에서 멀리 사천과 섬서의 무인들이 천막을 친 곳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 있었다.
“예. 사천과 섬서무림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사천과 섬서의 무림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건 화 대주님 말씀처럼 놀라운 일이 맞습니다. 허나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면 놀랍지도 않게 여겨지는군요.”
하긴 천종천마교의 칠만과 싸워야 하는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닌 일일 것이다. 그냥 마인도 아니고 마귀들이지 않은가.
칠만의 마귀!
그 실체와 맞닥트렸을 때 일만의 무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이 점점 더 염려스럽다.
“회의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 안하십니까?”
당옥기가 물었다.
지금 대전에서는 사천과 섬서 무림의 거두들이 모여서 하나의 안건을 가지고 논의 중이었다.
칠만의 숫자와 싸울 것인지 아니면 사천에서 물러날 것인지.
“진통이야 있겠지만, 싸우자고 결론이 날 겁니다.”
화운이 단언하듯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라도 있습니까?”
“무인들이니까요.”
“······!”
“무인들이 물러나면 남아 있는 일반 양민들이 어떻게 될지 뻔한 일인데 물러날 순 없지요.”
“물러나기로 의견이 모아지면 혼자라도 남을 것 같군요?”
“예. 혼자라도 싸울 겁니다.”
그냥 부려보는 호기가 아니다.
당옥기는 화운이 정말 그렇게 할 거라는 걸 알아보고는 새삼 놀랐다.
‘본문이 천사련과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친분을 쌓을 수도 있을 터인데, 아쉽구나.’
당옥기가 판단한 화운은 입만 살아있는 허풍쟁이 무인들과는 달랐다.
싸우겠다고 했으면 지옥이라도 쳐들어갈 사람이다.
스스로를 희생만 하려드는 어리석은 협의지심과는 분명히 다르다.
스스로가 정한 길을 당차게 가는 것이다.
무릇 무인이라면 그래야 한다.
자신의 앞길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당당하게 가야하는 법이다.
그것이 무인이라면 누구나 가야 할 무인지로일 것이다.
몸이 약해 당문의 절학을 익힐 순 없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무인 상을 세우고 있는 당옥기에겐 화운이야말로 그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무인이었다.
“혼자는 아닐 겁니다. 적어도 당문은 끝까지 남을 테니까요.”
싸움에 참여하지 않거나 무릎 꿇을 순 있지만, 싸워야 할 적이 무서워 사천을 떠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싸워야 할 적이라면 옥쇄를 각오하고서라도 싸울 것이다.
그것이 당문의 성향이었다.
“감사합니다.”
화운이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당옥기가 고개를 저었다.
“감사는 저와 사천사람들이 해야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화 대주님은 외지인이니까요.”
“아뇨.”
이번엔 화운이 고개를 저었다.
당옥기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화운은 그의 얼굴을 직시하며 말했다.
“엄밀히 말해 이번 싸움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싸움입니다. 지역을 따질 일이 아닌 것이지요.”
“아!”
당옥기는 화운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화운이 한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맞습니다. 인간과 마귀들의 싸움이지요.”
당옥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원래 천마와 천종천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적잖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에 화운의 말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어린아이를 흑귀로 만들고 지옥에나 존재할 마귀들이 흑귀들의 몸을 매개체로 삼아 이 땅에 강림한다? 그것도 칠만이나 되는 숫자가.
화운처럼 유명하지 않은 이가 말했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치부할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니까.
그러고 보면 화운의 말만 믿고 섬서무림을 규합하여 사천으로 달려와 준 화산파 장문인이 대단한 것이고, 사천무림을 하나로 모은 당문과 청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정사를 하나로 규합했다.
“이제 끝났나 봅니다.”
대전 쪽을 바라본 당옥기가 말했다.
화운이 돌아보니 한 사람이 두 사람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결단을 내렸으니 화 대주님을 불러오라고 한 모양입니다.”
“함께 가시지요.”
“제가 감히 그런 자리에 낄 수나 있겠습니까.”
“지금 제 말에 힘을 실어줄 분은 당 형뿐입니다.”
“······!”
화운이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 당옥기가 살짝 놀랐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당옥기가 당차게 말했다.
그때 대전에서 보낸 사람이 두 사람 앞에 당도했다.
“안으로 모시랍니다.”
대전 안에는 이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화산 장문인과 종남 장문인을 비롯한 섬서성의 고수들과 청성파의 장문인과 당문의 당화천 그리고 아미의 장문인을 비롯한 사천의 고수들이었다.
아미파의 장문인은 청성에 도착한 순간부터 화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우리 모두는 사천에서 결사항전을 준비하기로 중지를 모았네.”
화산파 장문인 임장홍이 말했다.
화운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로군?”
“예.”
“어째선가? 칠만이라는 숫자라면 그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어째서 싸울 거라고 내다봤는가?”
“인간이고 무인이기 때문입니다.”
임장홍은 화운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맞네. 우린 인간이고 무인이네. 그래서 우리만 살자고 도망칠 수가 없다고 의견을 모았네.”
임장홍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자신들의 결정에 흐뭇해하는 모습들이었다.
화운은 이들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허나 결과가 뻔한 싸움에 목숨을 내다버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네. 처음부터 자네의 말을 믿고 사천 사람들을 피신시켰다면 굳이 결사항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을 것인데, 우린 그럴 수가 없었고, 그러지 않았네. 정찰대의 보고를 기다렸고 그 시간만큼 늦어졌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불가피하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결과가 뻔한 싸움이네.”
“······!”
“싸움이 시작되고 우리가 밀리는 게 확실시 되거나 애초 상대가 안 될 것이 확실해지면 각파의 일대제자들은 전부 뒤로 뺄 거네.”
“······!”
화운은 납득이 안 되니 설명을 바란다는 얼굴로 계속 쳐다봤다.
“사천에서의 싸움은 전초전이 될 것이네. 정무맹과 천사련에 적들의 무력을 파악하고 알려주는 싸움이 될 거라는 뜻이네. 하여 이 자리의 협웅들께선 그 싸움에 피를 뿌리겠지만, 각파의 일대제자들은 그럴 수 없네. 천사련과 정무맹으로 보내 후일을 도모하도록 할 생각이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무당파에 사람을 보내 지원군을 보내지 말라고 해두었네.”
화운은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다들 옥쇄할 각오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다 죽을 필요는 없지.’
화운은 이해했다.
충분히 납득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상황이 되면 각파의 제자들이 물러날 수 있도록 적들을 막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게.”
“예?”
“자네도 함께 물러가게.”
“그럴 수 없습니다.”
“자네마저 이곳에서 쓰러지면 천하의 피해가 너무 크네. 전초전으로써의 의미도 퇴색하게 되고.”
“저만 도망칠 수 없습니다.”
“자네라서가 아니야. 내가 자네만큼 강했다면 내가 도망칠 것이네. 청성 문주님께서 자네만큼 강했다면 청성문주님께 도망치라고 했을 것이고, 여기 당 대협이 자네만큼 강하다면 당 대협께 도망치라고 했을 것이네.”
“하지만······.”
“도망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지. 그 정도 용기는 있으리라 믿겠네.”
더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투로 말하는 임장홍의 앞에서 화운은 더는 거부의 말을 할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자, 이제 칠만이라는 숫자에 대해 이야기해 보세. 칠만이라는 숫자 중에 천마교 마인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나?”
임장홍이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고루마군이 말하길 확보된 흑귀들의 숫자가 칠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마는 흑귀들의 몸을 강탈한 마귀들을 사천으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마인들이 얼마나 합류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로군.”
“예.”
“어쩔 수 없지. 감숙으로 보낸 정찰대의 보고가 도착하기를 기다려보지.”
임장홍이 아쉬움을 드러냈을 때 당옥기가 끼어들어 말했다.
“십만마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태반이 일반교도들이긴 합니다만, 광명전, 북명전, 구천각, 명부전, 대마전, 염마전, 잠마천, 광마종 그리고 일반교도들 사이에 뒤섞여 있는 마인들까지. 적어도 일만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옥기의 말에 장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원래 일만의 마인들 자체만으로도 대적불가였다.
하물며 칠만에 달하는 금강마인 같은 마귀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싸울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선택이었다.
아직 확인되지도 않은 일로 사천성 각 도시의 사람들을 피난하도록 이끌 것인가?
아니면 오늘이나 내일쯤 당도할 예정인 정찰대의 보고에 따라 결정할 것인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후자를 선택함으로써 한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된다.
만일 화운의 말이 사실이었을 경우 각 도시의 사람들이 사천성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누군가가 남아서 시간을 벌어줘야만 한다는 것이다.
화산 장문인 임장홍이 전초전이라는 말로 미화했지만 결국은 피난민들을 위한 시간 벌기용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정찰대의 보고는 언제 도착합니까?”
“오늘 밤쯤엔 내가 보낸 아이들이 돌아올 것이네. 거짓이 탄로날까 봐 걱정되는가?”
화운의 물음에 임장홍이 웃으며 되물었다.
“제가 한 말이지만 거짓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다들 절 욕하겠지만, 전 기꺼이 웃을 수 있습니다.”
“나도 자네 말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네. 그렇다면 나 역시 맘껏 웃어줄 수 있네.”
임장홍이 화운의 심정을 받아주었다.
화운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궁금한 게 있네.”
당문의 당화천이 물었다.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본 마귀들의 지능은 어떤 것 같았는가?”
화운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능까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상대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진격해 올 방향에 땅을 팔 생각이네.”
“그런 거라면 소용없을 겁니다. 수백 장 단애도 기어오르던 놈들입니다.”
화운은 날개가 달린 놈들도 있더라는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땅을 파고 기름을 채워 둘 것이네. 그들이 빠지기만 하면 불구덩이 속에 빠진 꼴이 될 텐데. 어떨 것 같은가?”
“미친 개떼처럼 달리던 놈들이니 충분히 먹힐 것 같습니다.”
화운이 반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화천이 말한 화공이라면 한꺼번에 수백 어쩌면 수천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반가운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옆에 있던 당옥기가 끼어들었다.
“무영사로 발목 덫을 만들어둔다면 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무영사라면 제아무리 단단한 놈들이라도 발목쯤은 날아갈 게다. 거기에······ 침통들은 소용없을 것 같고, 쇠뇌(석궁)는 도움이 되겠다.”
당화천이 당옥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뚱이가 제아무리 단단해도 눈까지 단단할 순 없습니다. 가느다란 침들이라도 눈에 대고 발사해 버리면 꽤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코앞에서 달려드는 놈의 눈에 대고 발사할 정도로 뛰어나거나 강심장인 사람들만 있다면야 상당한 도움이 되겠다.”
“다행히 사천과 섬서무림에는 그런 용자들이 많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당문이 침통들과 쇠뇌를 대거 내놓을 거라는 걸 알아듣고는 다들 반색하며 당문의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허면 가장 먼저 땅부터 파야겠구려. 놈들을 태워 버릴 불구덩이 말이오.”
종남 장문인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러자 청성 장문인이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한 곳을 찍었다.
“여기는 송반이라는 곳인데 마교가 곧장 남하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오. 인근에 강줄기가 흐르고 있어 수천으로 수만을 상대하기엔 썩 괜찮을 거외다.”
청성 장문인의 말에 모두들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장소까지 물색되었으니 한바탕 피 흘릴 일만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