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존재
대륙 최남단 광동성.
뢰주.
검마가 화운에게 말한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존재들 중 하나는 바다였다.
화운은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고 있으니 검마가 한 말이 이해되었다.
바다는 포용의 상징이다.
모든 걸 품는다.
인간도, 배도, 천하 각지에서 흘러든 강물들도 모조리 품는다.
“바다로 먼저 온 건 그 포용을 배우라는 뜻이다. 오면서 이야기했던 천지간의 그 모든 기운들을 포용해서 하나의 검력에 실을 수 있다면 네가 바라는 진정한 절대검력이 되지 않을까 싶다.”
화운은 검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고, 왜 자신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동감했다.
“방법은 나도 모른다. 그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더 높이 올라선 너이니 방법을 찾을 것이고, 너라면 해내리라 믿을 뿐이다.”
“해낼 것입니다.”
“네 말대로 일 년이 걸릴지 수십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조급함만 경계한다면 길은 반드시 열릴 것이다.”
“예.”
“난 기거할 곳을 찾아볼 테니, 첫 걸음부터 스스로 시작하거라.”
“감사합니다.”
“어두워지면 데리러 오겠다.”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화운은 신풍대주가 되고나서 맹주에게 지급받았던 전낭을 건네주었다.
장강의 임무만 마친 시점이라 꽤 많은 은자가 남아 있었다.
검마는 말없이 전낭을 받아갔다.
수중에 가진 돈이 얼마 없어서 거처를 어떻게 마련할지 고심 하던 차였기에 스승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검마가 멀어지자 화운은 바다로 몸을 날렸다.
수십 장 앞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밀물 때면 바다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암초였다.
화운은 바위 위에 서서 광활한 바다를 향해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가 익히고 있는 검학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천마와 싸우면서 재정립되어 보다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검학들이었다.
화운은 그 검학들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펼쳐본 후 하나씩 지워나갔다.
사혼구검은 물론이고 검멸에 건곤무상까지 전부 지우고 나자 단 하나의 검학만이 남았다.
절대검력!
절대검력은 일식으로 된 검초였다.
단 한 번의 휘두름이 끝이라는 뜻이다.
화운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간결하기 짝이 없는 일식의 검초를 펼쳤다.
촤-아아아!
절대를 지향하는 검력이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수십 장을 쪼개가던 검력이었으나 어느새 힘을 잃고 사라졌다.
바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흡사 거대한 존재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았다.
화운은 실망하지 않았다.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다만 응시한 채 검만 휘둘렀다.
하단전과 중단전의 내력이 스스로 응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산 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적인 선천의 기운, 그 기운 역시 스스로 검에 응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면서 바다와 하늘에 가득한 기운들이 반응하기를 기다렸다.
천지간에는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혹은 인지하지 못하는 온갖 기운들이 가득하다.
오행(五行)이라 일컫는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의 기운은 물론이고, 천지간의 기운 중 가장 강렬하다는 뇌기(雷氣), 가장 뜨겁다는 태양의 기운인 일기(日氣), 가장 차갑다는 빙기(氷氣), 가장 어두운 북명(北暝), 가장 밝고 성스러운 신기(神氣), 음습하고 포악한 마기(魔氣).
그뿐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나뉘기 전의 가장 거친 기운이라는 혼원(混元), 우주의 근원인 태극 상태의 가장 순수하고 단단한 힘이라는 무극(無極).
인간들의 증오, 원한, 분노가 만들어낸 귀기(鬼氣), 그것들이 더욱 파괴적으로 돌변한 악기(惡氣).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기운들이 천지간을 채우고 있다.
무인들의 공력이라 함은 천지간의 그 많은 기운들 중 비슷한 성질의 기운을 끌어 모아 단전에 융합하고 쌓은 것이다.
그것도 극히 일부만을.
바다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퍼낸 정도의 양만을 가지고 천하제일을 다투는 것이 무인이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화운은 그 가소로운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중이었다.
쉬지 않고 휘두르는 일식의 검초에 자신과 닿아 있는 모든 천지간의 기운을 담으려는 것이다.
그 가경할 파괴력만 놓고 보면 신들의 권능에 못지않을 것이거늘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난 바다가 되어야 해.’
화운은 검을 휘두르면서도 검마가 바다로 데려온 까닭을 잊지 않았다.
바다처럼 화운 자신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포용의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걸 검을 휘두르는 매순간 인지하고 있었다.
검마는 멀리서 화운을 지켜보았다.
한 시진을 지켜보았는데도 화운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바라는 걸 해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바닥까지 추락한 자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딱 그 짝이었다.
‘네가 가려는 길은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전인미답의 경지다. 힘들 게다. 외로울 게다. 검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도 반백 년의 수련이 필요한 법이거늘 신들의 권능에 도전하는 길이 어찌 간단하겠느냐.’
검마는 돌아섰다.
지금 화운의 수련은 그 혼자서 해내야 할 일이지 스승이 도와줄 것이 없었다.
지금 스승으로서 해줄 수 있는 건 몸을 뉘일 수 있는 따스한 집과 든든히 배를 채울 수 있는 먹을 것을 준비해 주는 것뿐이었다.
검마는 가까운 어촌으로 향했다.
***
밤이 되었다.
바닷가라 파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화운이 돌아온 건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그런데 화운이 돌아와 보니 얼기설기 만든 판잣집이 지어져 있었다.
사실 집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그저 바람이나 조금 막을 정도로 작고 엉성한 거처였다.
검마가 부서진 선박들의 판자들을 주워와 만든 것이다.
“둘 다 무인들이니 누우면 그곳이 집이지 않겠느냐.”
검마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뭔가를 내밀었다.
은근하게 밝히고 있던 등잔불이 그것들의 정체를 비춰주었다.
돼지고기 볶음 한 접시와 소면 한 그릇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식어있었다.
“스승님은요?”
“이미 먹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화운은 게걸스럽게 먹었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해치운 화운은 그릇들을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수련은 잘 되느냐?”
“천지간의 모든 기운을 하나의 검력에 담는 것입니다. 쉬울 리가 없겠지요.”
“그래, 쉽다면 말이 안 되지. 어쩌면 지금 하는 수련 자체가 지독한 끈기를 요구하는 일이라 포기하고 싶다는 네 자신과의 싸움이 될 것 같구나.”
“예.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운이 이미 각오하고 있다는 투로 말하자 검마는 더 이상 그 부분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자는 것이야 대충 이곳에서 누우면 되겠다만, 먹는 게 문제구나.”
“하루에 한 번 이 시간에 돌아오겠습니다. 육포든 뭐든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됩니다.”
“흠······ 먹는 건 내가 생각해 보마.”
“스승님.”
“왜 그러느냐?”
“감사합니다.”
화운이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했다.
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마음을 받았다.
“고단할 터이니 그만 쉬거라.”
“잠시만 앉아 있다가 눕겠습니다.”
“그리하거라.”
검마가 먼저 누웠다.
바닥에도 판자를 깔아두어 등이 배기지는 않았으나, 둘이 간신히 누워 있을 정도로 협소한데다 여기저기서 바람이 줄기차게 불어들 정도로 엉성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거처였다.
화운은 누워 있는 검마의 모습을 보며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일 솜씨를 발휘해 봐야겠군.’
다음 날.
검마가 일어나 보니 화운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를 살펴봤으나 그곳에도 화운이 보이지 않자 검마는 바닷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를 했다.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며 반 시진 정도 운기를 하고 나자 화운이 돌아와 있었다.
“집을 지으려는 것이냐?”
검마가 물었다.
한쪽에 통나무들이 잔뜩 쌓여 있었던 것이다.
새벽에 일어난 화운이 산에 올라갔던 것이다.
“지독한 끈기를 요하는 싸움을 하려면 잠이라도 편히 자야지요.”
“내 솜씨가 미덥지 못했구나.”
“집 짓는 것만큼은 제가 나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좋다. 그 솜씨 한번 보자구나.”
“예.”
밝게 웃어준 화운은 신풍대원들을 위해 통나무 거처를 지었던 솜씨를 맘껏 발휘했다
그때와는 달리 바닥이 암반이어서 검에 강기를 주입하여 깊게 구멍을 판 후에 통나무를 끼워 세웠다.
그렇게 기둥을 단단히 세우고 나자 나머지는 쉬웠다.
통나무를 절반으로 쪼개 사방 벽과 지붕을 만들었다.
통나무를 고정시킬 땐 예전에 썼던 방식 그대로 손가락 굵기의 가지를 잘라다 못처럼 박았다.
그 광경엔 검마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력을 다스리는 경지가 실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다섯 사람이 누워도 될 정도로 충분히 크게 지은 화운은 내친김에 침상도 만들었다.
반나절만에 두 사람이 거처할 곳이 뚝딱 지어진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검마가 칭찬하자 화운은 씩 웃었다.
“이제 수련하러 가겠습니다.”
“그러거라. 나도 가볼 데가 있으니 밤에나 보자구나.”
“예.”
화운은 바다로 나갔고, 검마는 어촌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때부터 하루의 일과가 항상 같았다.
새벽 일찍 화운은 바다로 나갔고, 뒤늦게 일어난 검마는 어촌으로 향했다.
캄캄한 자정 무렵이 되면 화운이 돌아왔고, 검마는 따스한 국물을 내놓았다.
큼지막한 돌들을 쌓아 화덕을 만들고 미리 구입해 온 솥을 건 다음 식어버린 국물을 데운 것이다.
화운은 검마의 마음 씀씀이에 가슴 한쪽부터 차오르는 감동과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서 늘 남김없이 먹었고.
검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었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석 달이 된 후 일 년이 되었다.
그리고 일 년이 차곡차곡 쌓여 오 년이 되었다.
오 년이 되어도 화운의 일상은 똑같았다.
검마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검마의 얼굴에 수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검마가 천하를 떠돈 사연을 알고 있던 화운이기에 그 이유를 모를 수가 없었다.
손자를 찾아야 하는 일을 계속 멈출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수심 때문인지 검마의 얼굴이 근래 많이 늙어보였다.
태양이 한참 떠오른 시각.
검마를 걱정하느라 집중할 수가 없었던 화운은 수련을 멈추었다.
검마가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한 어촌을 찾아간 화운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천하의 검마가 선착장에서 하역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화운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화운이 검마에게 건네주었던 전낭에는 꽤 많은 은자가 들어있었지만, 일 년이나 버틸까 한 정도이지 무한한 건 아니었다.
검마는 어선이 어업을 하는 철이면 선착장에서 하역작업을 했고, 겨울철이면 그물 손질이나 어선 수리하는 곳에서 잡일을 도와주며 두 사람이 하루 한 끼 먹을 품삯을 벌곤 했다.
검마의 능력이면 사냥을 비롯하여 다른 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보통사람들의 삶에서 그런 기지를 발휘하기엔 너무 오랫동안 혼자 떠돌았다.
화운은 더 보지 못하고 통나무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검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해질 무렵이 되자 검마가 돌아왔다.
손에는 따끈한 어탕과 만두 한 접시가 들려 있었다.
“오늘은 어찌 이리 일찍 돌아온 것이냐? 혹여 성과가 있었던 것이냐?”
“조금 있었습니다. 그보다 그것 좀 주십시오. 오늘따라 유난히 배가 고픕니다.”
너스레를 떤 화운은 검마에게서 음식들을 받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잔뜩 배를 채운 화운은 검마를 바라봤다.
검마 역시 화운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굳어 있는 걸 보니 화운에게서 뭔가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스승님.”
“말 하거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째서냐?”
“제 생각만 하느라 스승님의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화운의 말에 검마는 침묵했다.
“그렇다고 스승님 없이 혼자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스승님께서 언제든 마음 편히 떠나실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
“제가 돈 많은 영감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 돈으로 객잔 하나를 사버릴 생각입니다.”
애써 웃어 보이는 화운의 머릿속에 무영투가 떠올라 있었다.
***
화운은 시간을 되돌렸다.
오 년이나 지나서야 시간을 되돌린 것임에도 사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알고 있었다.
화운이 천마를 이기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을.
발버둥으로 끝이 날지 정말 천마를 쓰러트려 버릴지는 훗날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린 화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영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공공무영비 십단공 무풍무영을 알려준 대가로 금 오만 냥을 받아냈다.
가까운 대륙전장 지부를 찾아가 무영투가 가지고 있던 대륙시로 금 천 냥짜리 전표 오십 장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고 나서 검마를 찾아가 그와 함께 광동성 뇌주로 향했다.
수련하던 바닷가와 가장 가까운 객잔을 찾아간 화운은 객잔을 사고자 했으나 객잔 주인이 거부했다.
하여 한 가지 거래를 했다.
방 두 개를 십 년 기한으로 임대를 한 것이다.
그리고 먹든 먹지 않던 매끼 식사를 객방에 차려주는 조건이었다.
대금은 금 천 냥을 지급했다.
객잔 주인으로써는 재신을 만난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삶에서 화운에게는 돈이 무의미한 것이었다.
화운은 이전처럼 매일 수련을 나갔고, 검마는 수련하는 화운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매일 지켜보았다.
이전과 달리 새벽에 일어나 함께 나갔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함께 돌아왔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자 검마가 떠났다.
손자를 찾는 여정을 다시 떠난 것이다.
혼자 남은 화운은 수련에 집중했다.
새벽에 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지간의 기운들을 느꼈고, 해가 한참 떠오르고 나면 자신이 느꼈던 기운들을 검으로 이끌고자 했다.
화운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태풍이 몰아쳐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화운의 가장 큰 장점은 지독할 정도의 끈기였다.
여느 사람 같으면 진작 포기해 버렸을 수련이지만, 단 한 순간도 집중을 잃지 않으며 홀로 남아 삼 년의 시간을 더 해내고 있었다.
***
무림천하가 급변했다.
정무맹이 천사련과의 정사대전에서 크게 패한 것이다.
화운이 뇌주로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대륙전장의 보옥인 화수련을 납치한 이화태양종은 같은 날 소림을 봉문시키고 섬서로 향했다.
대륙전장은 화수련을 돌려받는 대가로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고, 화산과 종남을 지키고자 섬서로 달려가던 정무맹의 정예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천사련의 급습에 지리멸렬했다.
하지만 정파의 뿌리가 워낙 깊어 각대문파와 천하 정파인들이 똘똘 뭉쳐 호북성으로 집결하여 반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장기전에서 대륙전장의 막대한 지원금을 앞세운 천사련의 힘을 막아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바야흐로 사파천하가 열린 것이다.
그 여파는 머나먼 대륙 최남단에까지 미쳤다.
득세한 사파인들이 뇌주까지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오륙 년 전에 금 천 냥을 일시불로 지급한 놈이 있는데, 전표가 수십 장이었다 이거지?”
“예, 예. 소인이 확실히 보았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전표는 처음 본 것이라 절대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흑마갱의 미친개라 불리는 두억이 물었고, 객잔의 점소이가 연신 허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구레나룻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고민하던 두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점소이, 그 작자가 있다는 곳으로 안내해.”
점소이를 앞세운 두억은 전표를 수십 장이나 가지고 있다는 자를 만나기 위해 바닷가로 향했다.
물론 입이 아니라 도끼로 대화할 생각이었다.
“저깁니다!”
점소이가 손으로 가리켰다.
두억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닷가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진짜 저자야? 거짓이면 니 주둥이가 문제가 아냐. 목 위 전체가 시궁창에 처박힐 거야. 저자 맞아?”
“맞습니다. 매일 저 곳에서 검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검을 휘둘러? 검객이라고? 그 이야기를 왜 이제 해?”
“몇 년 휘두르다가 몇 달 전부터는 포기했는지 저렇게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한다고 합니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검객이란 소리잖아. 야, 너 얼른 뛰어가서 석 당주님을 모시고 와.”
두억의 수하 하나가 냉큼 달려갔다.
그리고 한 식경 정도가 지나자 독사눈을 한 중년인이 수하들을 잔뜩 이끌고 나타났다.
“재신이 강림하셨다고?”
“이 새끼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습니다.”
두억이 점소이의 머리를 손에 쥔 도끼로 툭 치며 말했다.
“저자야?”
“그런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이면 뭐해? 얼른 모시러 가야지.”
석 당주가 고갯짓하며 명할 때였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
두억은 물론이고 석 당주를 비롯하여 삼십여 명에 달하는 모두들 이토록 커다란 굉음은 생전 처음 들어봤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면 이런 소리일까?
모두들 기함하여 한 곳을 보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으헉, 저거 뭐야!”
저도 모르게 괴성을 내뱉은 두억의 눈에 두 쪽으로 갈라지고 있는 바다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