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내가 수라도의 왕이다!
언제든 천상에 오를 수 있는 법보.
시간을 되돌리는 경천보패는 빼앗겨버렸으나 또 다른 법보가 굴러들어왔다.
이 무슨 신의 장난인가 싶지만, 한가하게 그런 생각이나 할 겨를이 없다.
인간들의 세상으로 가지 못하게 된 것에 화가 난 마귀들이 성난 기세 그대로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래, 와라, 와! 가둬놓기만 하는 것보다 싸그리 없애버리는 게 확실한 방법일 테니까!”
화운은 손에 쥐고 있던 법보를 품속에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검을 비껴들고 크게 심호흡하는 화운.
뭔 놈의 세상이 온통 혼탁한 기운과 삭막하고 음습한 마기들로만 가득한 것인지.
정기 발랄한 정파인도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오래지 않아 마인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하여 문제가 될 건 없다.
혼탁한 기운이든 마기든 단전에 적공할 것도 아니고, 그저 모으고 응축하여 강기로 발휘할 뿐이니까.
꽈앙!
흉측한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절대검력을 날린 후 빙글 돌아섰다.
유성처럼 덮쳐오는 놈이 보였다.
인간형 마귀랄까, 사람처럼 직립보행 하는 마귀가 길고 큼지막한 쇠뭉치를 휘두르며 허공에서 뚝 떨어지고 있었다.
꽝!
검강을 발휘하여 마주 휘두르니 놈이 쪼개진 장작처럼 날아갔다.
이때 화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 있어서다.
‘더 강해! 흑귀들의 몸을 빌어 인간 세상에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더 단단해!’
흑귀들의 몸을 통해 인간 세상으로 튀어나온 놈들과 사천땅에서 싸워봤다.
그때의 놈들은 검강으로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막 검강으로 상대해보니 힘에 밀려 날아갔을 뿐 놈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절대검력에 정통으로 맞은 놈들이나 박살이 났다.
이런 놈들이 지금 이곳에 수십만이다.
모조리 인간들의 세상으로 나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
“절대! 니들은 이곳을 절대 나가지 못한다!”
결의를 터트린 화운은 검을 휘둘러 절대검력을 펼쳤다.
콰앙!
정통으로 맞은 놈들의 육신이 박살이 나서 터졌지만, 당최 겁이라는 걸 모르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 하는 놈 하나 없이 줄기차게 몰려왔다.
화운은 묵검에 검멸의 검환을 잔뜩 일으켰다.
그리고 전신엔 강기의 막을 둘러친 다음 공공무영비 오단공 질풍무영을 펼쳤다.
퍼버버버벅!
화운의 경신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마귀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검강에는 버틴 놈들이지만, 보통의 검환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검멸에는 버티지 못해 육신이 터져버리거나 쪼개지고 갈라지기 일쑤였다.
화운의 움직임을 따라 폭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사방으로 날아가는 마귀들.
셀 수조차 없는 숫자의 마귀들이 나뒹굴었다.
하지만 수십만 중의 극히, 아주 극히 일부였다.
날아가는 숫자보다 수배는 더 많은 숫자가 사방팔방에서 달려들었다.
“와라! 와! 내가 먼저 멈추는지 니들이 모조리 죽는지 끝장을 보자!”
천둥같이 외치는 화운.
바로 이때 멀리 날아간 마귀들이 벌건 용암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녹아내리는 광경이 보였다.
강기에도 끄떡없던 놈들이 용암에 녹아내리는 걸 본 화운은 두 다리를 벌리고 우뚝 서서는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았다.
주위에 가득한 혼탁한 기운과 마기들을 있는 대로 끌어 모은 화운은 일시에 터트렸다.
콰-앙!
잔잔한 호수에 커다란 바윗덩이를 던진 것처럼 동심원을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나간 폭발력이 마귀들을 휩쓸었다.
하지만 용암 속으로 날아간 숫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용암에 빠지지 않은 놈들은 멀쩡히 일어서서는 다시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효과가 미미하자 화운은 묵검에 강기를 잔뜩 일으켜 수 장 길이의 채찍처럼 휘둘렀다.
퍼버버벅!
강기의 채찍에 강타당한 놈들이 벌건 용암으로 날아갔다.
화운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야말로 종횡무진하며 걸리는 족족 후려쳐 벌건 용암 속으로 날렸다.
강기만을 일으킨 것이라 공력의 소모가 적었다.
이런 방법이라면 수십만이 아니라 수백만이라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번쩍!
일섬의 속도라는 공공무영비 구단공 무영비천을 펼쳐 까마득한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유성처럼 일시에 내리 꽂혔다.
쿠-웅!
마귀들의 한복판이 푹 꺼지며 후폭풍이 놈들을 사방으로 튕겨놓았다.
빙글 돈 화운이 건곤무상검을 펼쳤다.
콰콰콰콰콰콰콱!
지기와 마기가 잔뜩 몰려들었다가 날카로운 송곳 같은 기운이 되어 전방을 휩쓸었다.
태풍에 휘말린 갈대처럼 와르르 쓰러진 놈들과 그런 놈들을 짓밟으며 달려드는 놈들.
화운이 마주 튀어나가며 검강을 채찍처럼 휘둘러대자 난타당한 놈들이 속수무책으로 날아갔다.
벌건 용암의 강줄기를 향해.
캬아아아아!
크아아아앙!
괴성을 질러대며 끝도 없이 꾸역꾸역 몰려오는 놈들.
이대로 석 달 열흘을 싸워야 끝이 나려는 것인가.
“와라, 와! 아수라의 개들!”
화운이 다시 질풍이 되고 광풍이 되어 마귀들을 휩쓸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촤아아아아아!
벌건 용암 속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순간 사방에서 달려들던 마귀들이 우뚝 멈췄다.
화운은 자신의 뒤에서 거대한 동체를 일으키고 있는 정체모를 무언가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
벌건 용암 덩이를 마치 물방울처럼 쏟아내며 일어선 무언가가 거대한 동체를 과시하며 화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의 머리에 네 개의 발이 달린 몸뚱이.
머리에서 목으로 이어진 갈기와 긴 꼬리 끝에 달린 털은 흡사 불덩이 같았고, 거대한 몸뚱이는 용처럼 단단한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기린?”
화운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기린은 신화에나 등장하는 신령스러운 짐승으로 오색의 털에 용의 머리, 사슴의 몸 그리고 말의 발굽과 소의 꼬리를 가졌다.
지금 용암 속에서 일어난 놈은 형상이 그와 비슷했다.
하지만 오색의 털은 보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면 벌건 불덩이 같다.
쿵!
놈이 앞발을 땅에 올렸다.
그 동작 하나에 멈춰 서 있던 수십만의 마귀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쿵!
놈이 또 하나의 앞발을 땅에 올렸다.
화운은 놈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며 검을 힘주어 잡았다.
물러서지 않는 화운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일까?
놈이 커다란 아가리를 쩍 벌렸다.
순간 시뻘건 불길이 와락 뿜어졌다.
한참 떨어져 있음에도 마귀들이 기겁하여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화운은 물러나기는커녕 냅다 검을 휘둘렀다.
콰앙!
절대검력이 불길을 밀어내고 놈의 아가리를 강타하자 머리통이 홱 돌아갔다.
하지만 곧 성난 놈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한 번 불길을 토했다.
“시끄러!”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버럭 외친 화운은 연거푸 절대검력을 펼쳤다.
마귀들도 정통으로 맞으면 몸뚱이가 박살이 나버리는 절대검력을 수차례 격중 당하고도 이리저리 머리통만 홱홱 돌아갈 뿐이자 오기가 치민 화운은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쉬지 않고 절대검력을 뿌려댔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절대검력이 놈의 머리통에 격중 할 때마다 불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고통스러운지 놈이 괴성을 마구 질러대며 몸부림을 치다 땅 위로 불쑥 솟아올라왔다.
화운은 금강부동신법을 펼쳐 놈의 위쪽 허공으로 자리를 이동한 후 절대검력을 다시 펼치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머리통이고 몸뚱이고 보이는 대로 갈겨댔다.
미친개를 때려잡듯이 무차별적으로 갈겨대자 불길을 사방으로 쏟아내고 기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반격했다.
하지만 금강부동신법을 펼치며 간단히 피해버리는 화운에게는 그저 발악을 하는 것일 뿐이었다.
절대검력이 이십여 번 넘게 격중당하자 발악이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십여 번을 더 갈겨대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쿠후우-! 쿠후우-!
놈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거친 숨만 내뱉었다.
화운은 그제야 검을 멈췄다.
사방을 둘러보니 수십만의 마귀들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자신과 용암에서 나온 괴물만 번갈아보고 있었다.
“범이 없으면 늑대가 주인이 되는 법! 이제부터 내가 수라도의 왕이다! 푸하하하하!”
화운은 하늘을 쳐다보며 미친놈처럼 광소를 터트렸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수라도.
이놈의 세상엔 태양이 없어 밤과 낮의 구별이 없다.
싸움이 끝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마귀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 놈도 보이지 않고 용암에서 나온 놈만 꺼져가는 불씨처럼 거친 숨을 내뱉고 주저앉아 있었다.
“야! 불기린! 용암 속으로 들어가면 살 수 있는 거 아니냐?”
화운이 소리치자 놈이 눈알만 굴려 화운을 봤다.
하지만 그뿐이다.
거친 숨만 내쉴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힘이 없어? 내가 돌려보내줄까?”
신령스런 영수라는 기린을 닮아서인지 놈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봤는데 이상한 부분이 보였다.
용의 비늘처럼 놈의 몸뚱이도 비늘로 뒤덮인 것으로 보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비늘처럼 만들어진 커다란 갑옷 같은 게 놈의 동체에 둘러져 있었다.
“크기도 그렇고······ 너 혹시 아수라가 타고 다녔던 거냐?”
화운이 물으며 바라보자 놈이 힘겹게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마치 듣기 싫다는 듯.
“맞구나!”
놈이 고개를 더 돌렸다.
화운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놈의 몸뚱이에 둘러져 있는 갑옷을 살펴보다 손을 뻗어 잡았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손을 녹이려고 들었다.
화운은 내력을 집중시켜 열기를 막아내며 잡고 있던 갑옷을 힘껏 잡아당겼다.
투둑! 투두두둑!
뭔가가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갑옷이 놈의 몸에서 마치 껍질처럼 벗겨졌다.
순간 화운의 눈에 오색영롱한 빛이 가득 차올랐다.
“너 진짜 기린이었구나!”
화운이 감탄을 터트렸다.
갑옷이 벗겨지자 놈의 몸이 달라졌다.
벌건 불덩이 같던 몸이 오색의 털을 가진 몸뚱이로 변한 것이다.
열기도 사라지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놈이 벌떡 일어나 사방팔방을 힘차게 뛰어다녔다.
자유를 찾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와! 하마터면 신령스런 신수를 죽일 뻔 했네.”
화운은 안도하며 손에 쥐고 있던 불덩이 같은 갑옷을 용암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너트린 석탑의 잔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기린을 지켜보다 서서히 고개를 떨궜다.
장시간의 싸움으로 육체의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였던 터라 졸음이 밀려온 것이다.
화운은 금세 잠에 빠졌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참이냐!”
비몽사몽간에 들려온 목소리였다.
하지만 만사가 귀찮은 화운은 그냥 계속 자고만 싶었다.
“녀석 못 본 사이에 게으름만 늘었구나!”
말 때문이 아니다.
목소리 때문이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화운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
허허롭게 풍겨오는 기운과 새하얀 수염을 가지런하게 기르고 있는 외양.
그야말로 선풍도골의 노인이 눈앞에 있었다.
무당검성 자허도장.
바로 그였다.
“검성 어르신!”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무당검성이 자애롭게 웃었다.
하지만 화운은 웃을 수가 없었다.
무당검성은 오래전에 등선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혹여 제가 죽은 것입니까?”
“너에게 주어진 소임이 끝나지 않았거늘 그럴 리가 있겠느냐. 현몽을 빌어 잠시 널 만나로 온 것이니라.”
현몽은 죽은 조상이나 신령스런 존재를 만나는 꿈을 말한다.
그렇다는 건 지금의 만남은 화운의 꿈속이라는 뜻이다.
화운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과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안도했고 기뻤다.
하지만 무당검성을 보고 있자니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아수라를 풀어놓아 인간세상을 끝장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울컥했다.
“제가······ 제가······.”
화운이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본좌를 억겁의 시간에서 풀어준 놈이 이런 울보였던 것이냐?”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함께 은빛의 수염을 가슴께까지 늘어트린 노인이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화운은 노인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제천마존!”
“딱 한 번 본 것이거늘 용케 알아보는구나.”
제천마존이 웃었다.
손자 혹은 제자를 보듯 인자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두 분께서 어떻게······?”
화운은 무당검성과 제천마존을 번갈아보며 자신의 꿈속에 두 분이 함께 나타난 이유를 몰라 눈만 끔벅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