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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52화 (152/207)

#152. 스승님을 찾아뵐 생각입니다

무해곡.

타는 듯 붉은 머리칼을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사황이었다.

절대의 경지를 넘어선 지 오래인 사황은 천지만물의 변화에 민감했다.

그런 사황이 운기행공을 멈추고 번쩍 눈을 떴다.

“어찌하여 시간의 축이 뒤틀린단 말이냐!”

***

천종천마교 천마탑.

반로환동하여 검은 머리에 젊은 육체를 가진 천마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달뜬 목소리로 희열에 찬 탄성을 터트렸다.

“마신의 권능이······! 만년의 대계! 그 마지막 안배가 비로소 시작되었구나!”

***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화운의 어머니 선우비연이 호되게 꾸짖었다.

화운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어서 말하지 못할까!”

선우비연은 선우세가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선우세가의 무공을 익힌 무인이다.

화운의 아버지 화중옥을 만난 후로는 무공을 멀리했지만, 당차던 성질까지 버린 건 아니었다.

‘하아! 이게 아닌데. 좀 더 부모님과 오붓한 시간을 가져도 되잖아!’

화운은 하루만 더 빠른 시점으로 왔으면 싶었다.

그랬다면 적어도 하루 정도는 부모님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테니까.

지금은 그런 시간을 가질 새도 없이 부친께서 장도에 오르시는 걸 막아야 한다.

그렇다고 어린 애의 생떼로 가지 말라고 할 순 없다.

그랬다간 어머니께 회초리만 맞을 테니까.

“잠시만요. 잠시만 정리할 시간 좀 주십시오.”

화운이 차분히 말했다.

암만 봐도 열 살 아이의 모습이 아니다.

선우비연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껴 날카로운 눈으로 화운을 살폈다.

화운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는 선우세가 출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어머니께 털어놓는 게 통할 수도 있겠다.’

아버진 글만 읽던 선비 출신이다.

서책을 벗어난 일에 대해선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반면 어머닌 선우세가의 무공을 익히셨던 분이다.

무학에 관한 이야기이니 이해하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어떻게 납득시키느냐다.

워낙 기이한 일이니까.

화운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지금 열 살 때의 내가 알 수 없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텐데·······.’

훗날 알게 되었으나 열 살의 나이에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

어머니를 쳐다보며 생각하다 보니 오래지 않아 적당한 것이 떠올랐다.

“어머니께선 제게 선우세가의 무공을 가르쳐주신 적이 없습니다.”

“맞다. 세가를 떠날 때 그리하겠노라고 약조했었다. 그래서 네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선우비연은 화운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궁금했고, 어버지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 이유도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하루아침에 남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궁금했다.

“선우세가의 천애십팔검을 펼쳐보겠습니다.”

“······!”

화운은 눈을 치뜨는 선우비연을 두고 주위를 둘러봤다.

텃밭이라 나뭇가지 하나 보이지가 않았다.

“검을 대신할 나뭇가지 하나만 주워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화운은 텃밭 밖으로 나가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담장이 싸리나무였다.

화운은 가늘고 길쭉한 싸릿대 하나를 잘라왔다.

처음엔 굵은 가지를 부러트리려고 했는데, 지금은 열 살 아이의 몸이라 힘이 모자랐다.

‘언제 힘을 키우냐? 너무 멀리 와버린 건가? 어? 이런 멍청이! 부모님을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뭔 헛소리냐!’

화운은 자신의 머리통을 스스로 쥐어박으며 어머니께 돌아갔다.

선우비연은 그때까지 텃밭에 서서는 화운을 기다렸다.

매와 같은 눈으로 화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천애십팔검을 펼치는 것을 시작으로 어머니께서 놀라워하실 이야기를 해드릴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화운이 맞고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순간 흔들리는 선우비연의 눈동자.

화운은 그 눈을 들여다보며 선우세가의 가전검공인 천애십팔검을 천천히 펼치기 시작했다.

화운이 천애십팔검을 배운 건 선우유성에게서였다.

아무도 몰래 조금씩 가르쳐 주던 것이라 자신이 아는 건 일부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한 후로 이옥영을 구하면서 그녀에게서 제대로 된 천애십팔검을 배운 적이 있었다.

화운은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천애십팔검을 천천히 제대로 펼쳤다.

내력이 받쳐주지 않아 기세까지 일으키지는 못했으나 동작 하나하나 완벽에 가깝게 펼쳤다.

화운이 마지막 초식까지 펼치고 나자 선우비연은 잔뜩 굳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누구한테 배운 것이냐?”

“진정하십시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놀라워하실 이야기를 해드리겠다고.”

“······그래, 해 보거라.”

선우비연은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대체 어찌된 노릇인지 어서 알아야겠다는 얼굴이었다.

화운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더욱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입에 담아서도 안 되는 해괴망측한 말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제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들어주십시오.”

“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듣기만 하겠다. 하나도 빠짐없이 할 말을 다 해보거라.”

선우비연은 텃밭 한복판에 털썩 앉았다.

열 살 아들의 말을 열 살짜리의 말로 치부할 수가 없을 정도로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고 받아들인 그녀는, 우선 아들이 하려고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화운도 선우비연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어머니 선우비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줄 무학을 구하기 위해 떠나셨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십니다. 오 년쯤 지나면 어머니께서도 시름시름 앓으시다 저만 혼자 남게 됩니다.”

“······!”

“전 선우세가를 찾아갔습니다. 어린아이 혼자 그 먼 길을 찾아가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화운은 과거의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낭군도 죽고 자신도 죽어 아들만 혼자 남게 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지만 선우비연은 놀람을 꾹 눌러 참으며 화운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그런데 화운이 제천마존의 비동에서 경천보패를 처음으로 발동시키려던 그 죽음 직전의 순간을 이야기할 때 방해꾼이 다가왔다.

“둘이서 뭔 이야기를 그렇게 오붓하게 하는 거요? 나도 함께하십시다.”

화운의 부친이 다가왔다.

“아버지께선 받아들이지 못하실 이야기입니다.”

화운이 이야기를 중단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선우비연은 고개를 돌려 다가오고 있는 화운의 부친 화중옥에게 말했다.

“부자지간에는 부자지간만의 일이 있듯이 모자지간에도 둘만의 일이 있는 법입니다.”

“아, 알겠소.”

선우비연의 얼굴이 무척 심각해보였다.

화중옥은 아무래도 화운이 단단히 잘못을 저지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돌아갔다.

“회초리는 들지 마시오. 당신 손속이 좀 매워야지 말이오.”

저만큼 가다가 멈추고는 염려의 말을 던졌다.

선우비연이 돌아보지도 않자 한숨만 남기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화중옥.

화운은 그런 부친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 선우비연의 눈길이 느껴져 얼른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경천보패를 발동시킨 일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반 시진(1시간).

간추려서 이야기한 것임에도 반 시진이 지나서야 이야기를 마칠 수가 있었다.

놀라움의 연속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선우비연은 차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로······ 믿기지가 않는구나.”

“예.”

“네 말투도 그렇고 열 살짜리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 방대한 내용이고 아귀까지 맞아떨어지니······.”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다는 말을 도로 삼킨 선우비연은 복잡한 시선으로 화운을 응시했다.

화운은 그런 선우비연의 반응을 이해했다.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사람들이 으레 보이던 반응이 그랬으니까.

화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검가의 검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만, 현이 녀석이 펼치던 것을 하도 많이 봐서 대충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습니다.”

화운은 싸릿대로 남궁검가의 검을 펼쳤다.

초식이 완벽하지 않았고 내력도 없었지만 남궁검 특유의 기쾌하고 날카로운 검세가 엿보였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에 절강성 천목산 일대에 마적들이 발호한 적이 있다.

선우세가가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자 만만히 본 마적들이 그 일대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다녔다.

그때 당시에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가주가 되었던 선우비연의 오라버니가 세가의 무인들과 인근 문파의 젊은이들을 규합하여 마적 소탕을 나선 적이 있다.

그때 선우비연은 오라버니의 친구였던 남궁검가의 소가주를 보았고, 그가 펼치던 남궁검가의 검학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그 검학의 기쾌함이 지금 화운의 손에서 엿보이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이건 백봉 백리연 소저가 자주 펼치던 백리세가의 난화십이검입니다.”

화운은 난화십이검을 펼쳐 보이고 나서는 백리연이 운연검이라고 이름 지은 검술까지 펼쳤다.

하지만 선우비연은 백리세가의 검술을 본 적이 없었다.

“검술이 경지에 오르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각 검학이 지향하는 것들이 보이더군요. 이건 화산의 매화검입니다.”

화운은 매화검에 이어 무당의 태극검까지 펼쳐보였다.

열 살짜리 아이가 정파의 유명 검학들을 잇달아 펼치자 선우비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건 검마 스승님께 배운 사혼구검입니다.”

“그만.”

“예?”

“그만하면 되었다. 충분히 알아들었다. 네가 내 아들이고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믿겠다.”

“어머니······.”

화운이 싸릿대를 쥔 손을 내렸다.

선우비연은 그런 화운을 바라보았다.

혼란으로 복잡했던 시선이 안쓰러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비온 뒤의 땅처럼 단단하게 굳어갔다.

“그래서 그렇게 어미 품에 안긴 것이었구나.”

“예.”

“징그럽구나.”

“예?”

“다 큰놈이 어미 젖가슴이나 찾다니.”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그 말투도 징그럽다. 이제 열 살짜리인 놈이 그런 말투라니.”

“그건 죄송합니다. 그래도 열 살짜리 말투는 쓰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겠지.”

알겠다, 이해한다.

선우비연이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하지만 받아들이긴 쉽지가 않은 모양인지,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화운이 한 말을 생각해 보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릴 찾아와 주어 고맙다. 잘했다. 우리가 널 잘못 가르치진 않았던 모양이다.”

단 한 번의 기회.

그걸 놓치지 않고 이렇게 죽은 부모를 찾아와 주었으니 어찌 대견하지 않을까.

“······.”

“부모의 정을 잊고 산다면 그게 어찌 사람새끼라고 할 수 있겠느냐.”

“예.”

“부모의 정 못지않게 스승님의 정도 잊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렇잖아도 가장 먼저 스승님을 찾아뵐 생각입니다. 스승님께서 겪으셨던 아픔을 막아드려야지요. 그리고 스승님과 제천마존의 비동으로 가야 합니다.”

“그 법보가 있을 것 같으냐?”

“아뇨, 법보는 아수라의 손에 있을 겁니다. 그의 권능으로 다시 귀속되었으니 시간이 되돌아가도 법보만은 그에게 그대로 있을 겁니다. 제가 비동으로 가려는 이유는, 이무기가 있는 곳에 있는 영약 때문입니다.”

“영약들을 복용하려고?”

“예.”

“그럼 아버지와 함께 길을 떠나면 되겠다.”

“안 됩니다.”

“안 돼?”

“제가 시간을 무수히 반복하면서 알 게 된 것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근본을 제거하지 않으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해쳤던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반드시 같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 혼자 보낼 순 없지 않으냐!”

“보기에만 이렇지 스물이 넘었습니다. 세상 물정에도 밝구요.”

“그건 너의 생각이고, 지나가는 들개 하나 감당 못할 몸뚱이로 얼마나 갈 수 있겠느냐?”

“······!”

화운은 생각지도 못했던 바라 아무 말도 못하고 어머니만 쳐다봤다.

선우비연은 그런 화운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렇게 하자.”

“······?”

“네 아버지는 집에 계시라고 하고, 너랑 이 어미랑 둘이서 스승님을 찾아가도록 하자.”

화운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속에 스무 살짜리가 들어 있다 하여도 열 살짜리 아이의 몸으로 혼자 대륙을 가로지르는 건 무리다.

선우비연의 말대로 들개 한 마리만 만나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다.

화운은 자신의 작은 손을 들어보며 현실을 인지했다.

“예. 그게 좋겠습니다.”

화운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선우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네 아버지 목 빠지겠다.”

화운이 돌아보니 아버지께서는 집 앞마당에서 싸리 담장 위로 이쪽을 바라보고 계셨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문제네요.”

“그건 내게 맡기거라.”

선우비연이 어려울 거 없다는 태도로 앞서 갔다.

화운은 얼른 일어나 따라갔다.

“자식이 하고 싶은 공부를 가르쳐주는 건 부모의 도리일 것이에요. 가가께선 그 도리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훌륭하세요. 하지만 모르는 공부를 가르쳐 줄 수는 없는 법이에요. 가가께서도 그걸 아실 거라 생각해요.”

선우비연의 말에 화중옥은 한숨만 내쉬었다.

얼굴에 복잡한 마음과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자식이 부모와는 다른 길을 걷고 싶어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니 그렇게 한숨 내쉴 일은 아니에요. 그리고 마침 제가 훌륭한 스승님이 되어줄 분을 알고 있으니, 그분께 이 녀석을 의탁할까 해요.”

“그런 분이 계시다면 아비로서 마땅히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소?”

“여인들이 세운 문파라 가가께서는 가실 수 없어요.”

“허면 근처까지라도 함께 가겠소.”

“가가, 우리 세 식구의 터전인 이 집을 버리고 갈 순 없잖아요.”

“하지만······.”

“무얼 걱정하는지 알아요.”

선우비연은 검 한 자루를 앞에 내놓았다.

다시 뽑을 일이 없을 거라며 감춰놓았던 검이었다.

“제 한 몸과 이 녀석 하나쯤은 지킬 수 있어요. 하지만 가가까지 지켜주지는 못해요.”

화중옥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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