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겠다
난주 북동부 외곽.
비살둔.
난주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세 방파 중의 한 곳인 이곳에 두 사람이 찾아온 건 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던 시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의 옷차림을 하여 어두운 분위기를 잔뜩 풍기고 있는 일노일소.
마도의 땅에 걸맞게 옷차림을 바꾼 화운과 무영투였다.
“뉘신지요?”
비살둔의 정문을 지키는 자들 중의 하나가 물은 순간 무영투의 모습이 번쩍 하며 사라지더니 둔중한 타격음이 이어졌다.
뻐버버벅!
네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펼칠 때마다 요란하던 무영비천이 조용해진 걸 보니 이젠 거의 극에 다다른 모양입니다.”
무영비천은 공공무영비 구단공으로 일섬의 속도를 자랑했다.
워낙 빠른 속도를 발휘하다보니 무작정 펼치다 보면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요란할 수밖에 없다.
헌데 그 소리가 무음에 가깝게 사라졌다는 건 대기의 결을 제대로 활용하게 되었다는 걸 뜻한다.
“우리 무영천주님의 가르침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미욱한 늙은이도 나날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무영투가 장난처럼 말했다.
허나 진심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이 년 동안 화운은 자신만 수련하지 않았다. 무영투가 간파하지 못한 공공무영비의 비결들을 세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 덕분에 공공무영비를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완숙의 경지까지 익힐 수 있었다.
물론 공공무영비의 궁극이랄 수 있는 마지막 십단공 무풍무영은 금단의 영역처럼 남아 있었지만.
두 사람은 비살둔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걸음을 따라 육중한 타격음이 쉴 새 없이 터졌다.
살수문파답게 은밀하면서도 갑작스럽고 악랄한 습격들이 쉬지 않고 이어졌지만, 두 사람의 단 한 걸음조차 막지 못했다.
그야말로 무인지경으로 비살둔의 심처까지 들어간 두 사람은 비살둔의 둔주인 모사충과 대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잠시 후.
밖으로 나오는 화운과 무영투의 뒤를 따라 얼굴이 곤죽처럼 짓이겨진 모사충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따라 나왔다.
난주 남부 외곽의 한 장원.
화운과 무영투는 그 장원 안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난주에 도착한지 열흘, 가장 먼저 한 일이 이 장원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모사충이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가 보니 네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
모사충은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자신처럼 얼굴이 잔뜩 짓이겨진 두 사람은 흑서담과 암영총의 주인들이었다.
비살둔과 난주의 뒷골목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모사충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그들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있는 두 명의 고수.
진득한 살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회의노인과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의 미부.
‘화골장! 사갈마희!’
화골장은 흑서담의 뒤를 봐주고 있는 고수였고, 사갈마희는 암영총의 뒤를 봐주는 고수로 둘 다 천종천마교의 일백전마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모사충의 기준에서 보면 말이다.
“끌끌끌! 기다리라고 했더니 조력자들을 데려왔구나!”
무영투가 기괴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늙은이! 우릴 이런 꼴로 만들어 놓고도······ 헉!”
흑서담주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치다 갑자기 다급성을 질렀다.
무영투가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림없다!”
화골장이 붉은 혈수를 뻗으며 소리쳤고, 사갈마희는 뒤로 몸을 뺐다.
빠각! 뻑!
두 번의 둔탁한 소리.
그것으로 끝이었다.
화골장은 땅에 쓰러져 있었고, 사갈마희는 뒷머리를 감싸 쥔 채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가 이리 싱거워? 주군, 이것들 쓸모없겠는데요?”
무영투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모두를 쓸어본 후 화운을 향해 말했다.
“손발로만 쓸 거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
화운은 무표정하게 말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화운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무영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영투가 얼마나 빠른지 겪어본 터라 달아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처분만 기다리는 모습들이었다.
무영투는 그런 모두를 둘러본 후 화운이 들어간 대청을 향해 턱짓했다.
“모가지 달아나고 싶지 않으면 전부 안으로 들어가.”
화운은 대청 안쪽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작은 아이의 모습이었으나 일파의 종사처럼 강렬한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대청 안으로 들어간 다섯 사람은 본능적으로 살 방도를 찾아 화운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화운은 그런 다섯 사람을 쓸어본 후에 말했다.
“이곳에 귀야방을 세울 생각이다. 비살둔, 흑서담, 암영총은 본방의 삼당이 될 것이다. 삼당은 본방의 재원 담당이다.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당분간은 늘 하던 대로 하면 된다. 거기 두 사람은 순찰이다. 순찰들은 난주 무림의 조직들에 대해 낱낱이 조사하여 내일까지 보고한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가봐.”
화운이 물러가라고 했지만 한 사람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며 뭔가를 망설였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사갈마희가 화운과 무영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계집, 아갈통이 찢기기 싫으면······.”
무영투가 엄포를 놓다가 화운이 손을 들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모두들 화운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말하라.”
화운이 냉엄하게 말하자 사갈마희가 무영투를 힐끔 살펴본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난주엔 단 한 번도 대문파가 들어서본 적이 없어요. 그 이유는······.”
“천종천마교 때문이겠지.”
“맞아요.”
“염려 마라. 천종천마교를 자극하려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그들의 눈에 들 생각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테고, 그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사천 땅으로 진출할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사천 땅이 목적이라는 건가요?”
“그래, 사천 땅을 내 발아래 둘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곳에서 귀야방을 키울 생각이다.”
거기까지 말한 화운은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너희들은 날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럼 내 발아래에서 사천 땅을 맘껏 활보할 수 있을 것이다.”
냉엄한 화운의 태도에 사갈마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다섯 사람은 화운의 허락 하에 그곳을 떠났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무영투가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앉았다.
“너무 엉성한 거 아니냐?”
“엉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한테서 벗어나려고 수작을 벌일 테니까요.”
“글쎄다. 애초 계획대로 세 방파들을 손에 쥐고 강시당이 찾아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싶은데, 괜히 일을 키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흑서담과 암영총이 그 두 사람을 데려온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난주 무림은 알게 모르게 천종천마교와 줄이 이어져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 줄을 잡아당기다보면 천마의 수족 중 하나 쯤은 딸려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길 기대하는 건 아니고?”
“그럴 지도요.”
대답하는 화운의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
장원을 빠져나온 다섯 사람은 한자리에 모였다.
같은 상황과 위기에 처했으니 평소 어울리지 않던 사이였음에도 머리를 맞대볼 수밖에.
“어떻게 생각해?”
화골장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사갈마희에게 향하고 있었다.
세 사람과는 달리 두 사람은 잃을 게 없다는 점에서 같았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그녀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갈마희가 되물어왔다.
“화골장께선 나이가 어떻게 되요?”
“무슨 의미로 묻는 거지?”
“흑서담의 뒤나 봐주면서 사는 걸 보면 돈에는 크게 욕심이 없는 것 같아서 묻는 거예요.”
“그러는 넌 무엇 때문에 암영총의 뒤나 봐주고 있지?”
“쓸 만한 사내들을 구해주니까요.”
“······!”
“내가 살아 있는 걸 느끼게 해주는 건 사내와의 쾌락뿐이거든요.”
사갈마희가 빙그레 웃었다.
무척이나 요염한 미소였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것이냐?”
“우선 여기 세 사람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화골장은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갈마희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고 싶었으나 도리가 없어 시선을 세 사람에게로 돌렸다.
누구든 말해보라는 얼굴로.
서로 눈치를 보느라 잠깐의 침묵이 유지되던 끝에 암영총주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내가 가진 걸 빼앗길 순 없소.”
“싸우겠다는 거요?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겪어보았잖소.”
흑서담주가 염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허면 흑서담을 그대로 바치겠다는 거요?”
“그건 아니오.”
“총주께서는 무슨 고견이 있으신 것이오?”
비서둔주가 슬며시 끼어들어 물었다.
“그들이 강하니 더 강한 고수를 데려오는 수 외에 또 뭐가 있겠소?”
“혹여 생각해 둔 분이라도 있소?”
“그걸 말하기 전에 확실히 해 둡시다. 두 분께서도 나와 함께할 것이오?”
암영총주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잠깐 머뭇거리던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흑서담주가 먼저 말했다.
“나도 이대로 빼앗길 순 없소.”
“두 분이 함께 하겠다면 나 역시 끝까지 함께 할 것이오.”
비서둔주 역시 동참하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좋소.”
고개를 끄덕인 암영총주는 화골장과 사갈마희를 돌아봤다.
두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지 쳐다본 것이다.
“난 총주와 함께할 거야. 그동안 나한테 구해준 사내가 얼만데 배신하겠어?”
사갈마희가 요염하게 웃으며 화골장을 쳐다봤다.
세 사람 역시 화골장에게 눈길을 돌렸다.
“내 결정은 반반이다. 너희들이 제대로 하겠다면 동참해 줄 거고, 한심하게 군다면 그냥 도망칠 생각이다. 그래서 묻겠다. 그들을 제거하려면 어느 정도의 고수가 필요할 거라고 보는 거지?”
화골장의 시선이 암영총주에게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바라봤다.
“대마전입니다.”
“설마?”
“······!”
“천종천마교의 삼십육대마를 청하자는 것이오?”
비서둔주와 흑서담주가 깜짝 놀랐다.
그러나 화골장과 사갈마희의 반응은 달랐다.
“역시 암영총주는 영리해.”
“제대로 봤어. 삼십육대마 정도는 되어야 장원의 그 두 사람을 없애거나 그들이 어느 정도의 고수인지 파악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삼십육대마 중의 한 사람을 청했는데도 그들을 당해내지 못했을 때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저 두 사람이 우릴 가만 두지 않으려할 테니까.”
“그거라면 염려 마세요.”
“무슨 수가 있다는 것인가?”
“수는 항상 있는 법이에요. 그걸 해내는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지.”
사갈마희가 빙그레 웃었다.
***
사갈마희가 날렵한 동작으로 장원의 담을 넘었다.
그녀는 밤고양이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앞마당을 가로지른 후 대청의 출입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경첩이 울며 문이 열렸다.
사갈마희는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라고 봐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화운의 목소리가 대청을 가로질러 사갈마희의 귀청을 때렸다.
“돌아올 줄 알고 있었나요? 아니면 제가 공자님의 사색을 방해한 건가요?”
“똑똑하다면 한 사람 쯤은 되돌아올 거라고 여겼지.”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내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수하가 필요하다는 뜻이겠지요?”
“맞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사갈마희가 웃으며 대전을 가로질러 화운에게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리는 게 무척이나 뇌쇄적이었다.
하지만 화운은 눈빛 한번 흔들리지 않았다.
“아직 어려서 남녀 간의 일을 모르시나봐요?”
사갈마희가 요염하게 웃었다.
순간 화운의 신형이 십여 장을 찰나에 가로질렀다.
“컥?”
사갈마희의 입에서 숨 막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운의 손이 그녀의 목을 잡아 번쩍 들어 올렸던 것이다.
“다 맞아. 난 수하가 필요하고, 세력을 일굴 자금도 필요해. 남녀 간의 일도 모른다. 그래서 귀찮지만 니들을 살려주고 내 손발이 되어줄 것인지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한 가지 니들이 잘못 판단한 게 있어.”
“·······?”
숨통이 막히기 직전임에도 사갈마희는 그게 뭔지 궁금했다.
“내 기분이 틀어지면 니들은 죽는다는 거다.”
화운의 표정이 극도로 차갑게 변했다.
두 눈에서는 날카로운 살기가 쏟아져 나와 사갈마희의 간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죽는다는 두려움이 사갈마희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사갈마희가 죽음의 한계에까지 내몰릴 때까지 화운의 눈빛은 추호도 달라지지 않았다.
‘잘, 잘못 건드렸어!’
끝났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갈마희의 육신이 축 늘어진 순간이었다.
털썩!
사갈마희의 육신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커헉?”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화운을 쳐다보는 사갈마희.
화운은 그런 사갈마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누군지, 아니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겠다.”
“······!”
“하오문. 넌 하오문에서 온 간자다!”
사갈마희의 얼굴이 당혹과 공포로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