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165화 (165/207)

#165. 그들을 찾을 필요는 없을 거야

-다시 시작하거든 내게 알려주지 말거라.

-너무 힘들구나.

-가거라. 그만 쉬고 싶다.

-내 손자와 함께 묻어다오.

화운은 검마를 떠올렸다.

그토록 대단했던 검마조차 손자가 흑귀가 되었다는 사실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흑귀가 된 아이는 다시는 사람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화운은 그러한 일들을 화골장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화골장 입장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설사 지옥이라 하더라도 찾아내야만 했다.

“포기하라니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제발, 이렇게 엎드려 빌겠습니다. 뭔가 아는 게 있다면 말씀을 해주십시오!”

화골장이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화운은 그런 화골장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흑귀에 관한 말은 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만 가봐.”

“못 갑니다! 이대론 절대 물러날 수 없습니다!”

화골장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쳤다.

그 안타까움이 절절하여 무영투조차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홉 살에 불과한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제발, 이 늙은이를 딱하게 여기시어 뭐든 가르쳐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지?”

“사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럼 다른 아이들이 납치되어온 걸 알았겠군?”

“예.”

“왜 구하지 않았지?”

“예?”

“그 아이들을 딱하게 여겨 구해주었어야지.”

“그, 그건······.”

“고수들이 있어서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말은 하지 마. 어떻게든 한 명의 아이라도 구했어야 해.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그래야 다른 누군가도 그쪽의 아이를 보면 구해줄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

“사 년! 그 긴 시간 동안 다른 아이들이 납치되어 온 걸 알면서도 그쪽의 아이만 찾았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 다들 각자의 생각이 있기 마련이지만······ 나였다면 다른 아이들을 구했을 거야. 그게 인지상정일 테니까.”

화골장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굵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화운은 차갑게 몰아붙였으나 속내는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혈육을 잃어버린 고통이 얼마나 클지 능히 짐작하고 있어서다.

“조금만 더 버텨봐. 조만간 아이들을 납치해간 원흉이 누군지 정도는 알려줄 날이 올 테니까.”

화운의 말에 화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 어깨가 축 처진 모습으로 대전을 가로질렀다.

화운은 그가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미안함과 안쓰러움으로 가슴이 무거워 눈길을 떼지 못했다.

화골장이 밖으로 사라졌음에도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그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건 무영투였다.

“넌 왜 안 가냐?”

무영투의 눈길이 사갈마희에게 박혔다.

머쓱해진 사갈마희는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 그냥······ 방주께서 저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왜, 너한테 관심이라도 있을까 봐?”

“관심 있어요? 방주마저 그러면 고르기가 힘들어지는데.”

“뭘 골라?”

“난주 땅에 절 못 본 사내는 있어도, 보고도 탐내지 않는 사내는 없거든요.”

“미친년.”

“농담인데, 욕이 너무 심하네요.”

“지금 그런 농담이나 할 분위기냐?”

“아니긴 하죠.”

“알아들었으면 얼른 꺼져.”

“제 목숨을 틀어쥔 분들이 그렇게 차갑게 대하니까 발이 떨어지지 않잖아요.”

“네 목숨 따위에는 관심 없으니까, 얼른 가.”

“갈 테니까 그만 재촉하세요. 그리고 잘 알고 계시는 대로 전 언제든 사라질 준비가 되었으니까 한바탕 할 일이 생기면 꼭 불러주세요.”

씽긋 웃어 보인 사갈마희가 엉덩이를 흔들며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망할 년. 왜 웃고 지랄이야.”

무영투가 투덜거리며 빈 의자로 가서 앉았다.

“말해주어야 할까요?”

“흑귀?”

“예.”

“나중에라도 말해줘.”

“그게 맞을까요?”

“친 혈육이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그게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한 일이라 하더라도.”

“스승님께서는 너무 힘들다고 시간을 되돌리거든 당신께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하셨어요.”

“그거야 당사자이고 이미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 말할 수 있는 거고, 화골장은 알고 싶어 하잖아.”

화운은 혼란스러웠다.

검마의 일을 겪고 나서 흑귀에 관한 이야기는 그 혈육들에게 만큼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화골장의 간절한 모습과 힘없이 축 처져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나니 그 생각이 흔들렸다.

화운은 그 답답한 생각을 이어가던 끝에 강시당주인 고루마군을 떠올렸다.

‘고루마군 이 늙은이만큼은 세상에 다시없을 처참한 최후를 맞게 해 주겠어.’

***

이틀 후.

멸천부 사연홍의 거처.

“아, 따분해!”

사연홍은 하루만 가만히 있어도 좀이 쑤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틀 동안 강시당에서 흑귀들을 괴롭히면서 재미나게 놀았는데, 그것도 이젠 시들해졌다.

“뭐 재미난 일 없을까?”

침상에서 뒹굴 거리길 일다경.

사연홍이 벌떡 일어났다.

“맞다. 반로환동!”

사연홍은 이틀 전에 무상 마백의 거처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는 자신의 거처를 박차고 나갔다.

“뭐? 아직 안 돌아왔다고?”

사연홍은 무상 마백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에 혈삭마의 거처로 향했다.

그런데 거기서 들은 대답도 같았다.

혈삭마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 다 돌아오지 않았다고? 이틀이나 지났는데?”

고개를 갸웃하던 사연홍은 금세 빙그레 웃었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흠, 누굴 데려가야 할까? 무상 마백이 당한 것이라면 십이무상만으로는 안 될 거고, 구호법 중에 한 분을 모셔가야 할 텐데, 확인도 안 된 일에 함께 가 주시려나?”

암만 생각해 봐도 호법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이는 강시당의 고루마군뿐이다.

“그 늙은인 강시당 밖으로 잘 나오질 않는데? 내 말이라면 들어주려나? 아, 씨! 안 된다고 하면 나도 기분 나쁠 것 같고 그러다 사이가 틀어져서 흑귀들 가지고 노는 것도 못하게 되면 어쩌지?”

그렇다고 북명전에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간 그들이 알아보고 처리한다고 할 테니까.

재미가 없어지는 거다.

“아, 씨! 누가 있을까?”

사연홍은 자신의 지위로 만날 수 있는 교의 인물들을 빠짐없이 떠올렸다.

그러다 곧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은 이들을 찾아냈다.

“좋아! 그들도 날 통해서 아빠한테 줄을 댈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들어줄 지도 몰라.”

사연홍은 어딘가로 향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

천종천마교의 무상 마백과 혈삭마를 죽인 후로 화운과 무영투의 일상은 수련의 연속이었다.

화운에게 건곤무상을 배운 무영투는 대자연의 기운에 반응하는 건곤응신의 경지에 막 발을 디딘 상태였고, 화운은 그 단계를 넘어 건곤입신에 들어선 상태였다.

건곤응신과 건곤입신은 건곤무상에서 말하는 경지들이고, 그것과는 별개로 이기제기라는 경지가 있다.

체외로 발출한 공력을 뜻대로 여의하는 게 이기제기인데 이 경지가 되어야 비로소 검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지금 화운은 혼원여의공을 완성하여 중단전까지 연 상태였다.

혼원여의공을 완성하면 기경팔맥은 물론이고 전신의 팔만사천 세맥까지 일기관통하여 이기제기의 경지에 올라서게 된다.

이전의 삶일 때 그 덕분에 검환을 발휘할 수 있었고, 결국 자신만의 검환이랄 수 있는 검멸까지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의 화운은 검멸은커녕 검환조차 발휘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환골탈태를 하고 혼원여의공을 완성한 덕분에 하단전과 중단전은 물론이고 기경팔맥에 전신세맥까지 막힘없이 뚫렸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삶일 때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단단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워낙 작은 몸뚱이에 자리를 잡은 단전이라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내력의 양이 워낙 적었다.

그래서 화운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검환은 뒤로 미루고 절대검력부터 수련을 감행했다.

무상 마백과 혈삭마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건 절대검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절대검력은 완성경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기에 걸리는 모든 걸 베어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지 못했다.

무상 마백과 혈삭마가 인간의 몸뚱이인데다 절대검력과 같은 절묘한 검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쓰러트릴 수 있었지만, 강시당에 있는 금강마인처럼 몸뚱이가 금강불괴처럼 단단한 괴물들은 결코 벨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화운이 고루마군을 죽이고자 강시당으로 쳐들어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고루마군을 죽일 수는 있지만, 자신도 살아나오기 힘든 것이다.

이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고루마군을 죽이고자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절대검력을 완성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검환을 익혀볼까.’

검환과 절대검력.

둘 다 검공의 궁극에 가깝지만 둘의 효용이 달랐다.

검환은 강기의 집약이라 격돌하는 모든 걸 부수고 터트려버린다. 반면 절대검력은 공간까지 모조리 갈라버린다.

터트리고, 갈라버리고.

검환은 공간의 모든 걸 터트릴 순 있으나 공간까지 그러지는 못한다.

절대검력은 공간까지 가르고 쪼개버릴 순 있으나 터트려 박살을 낼 순 없다.

검환은 공력의 소모가 크고, 절대검력은 뇌력의 소모가 크다.

검환은 공력의 한계에 지대한 영향을 받지만, 절대검력은 그렇지가 않아 중단전까지 연 화운이라면 끝없이 펼칠 수가 있다.

‘절대검력으로 검환처럼 터트릴 순 없을까?’

검환과 절대검력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이었다.

하지만 의문은 의문으로만 남겨두었다.

절대검력을 완성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화운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절대검력의 완성에 박차를 가해 더욱 수련에 집중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삼 일이 지나 결실을 맺어갈 무렵에 뜻밖의 방해자가 나타났다.

사연홍이 나타난 것이다.

화운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정말 뜻밖의 등장이었다.

“와우!”

화운의 외모를 본 사연홍은 감탄사부터 내뱉었다.

사연홍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남자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아이가 말이다.

“하아, 이러면 상황이 달라지는데······.”

사연홍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화운은 그녀가 데리고 온 이들의 면면을 빠르게 훑었다.

‘저들은······!’

화운은 단박에 알아보았다.

사연홍의 뒤에서 진득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여섯 명이 이전의 삶일 때 강시당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적이 있던 이들이라는 걸.

광마종.

마인들 중에서도 유독 피를 탐하고 살인을 즐기는 한 마디로 미친 자들.

마경 역시 광마종의 일원이었으나 함께 오지 않은 것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거기까지 살펴본 화운은 팔짱을 꼈다.

그건 무영투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혹여 일이 터지면 무조건 달아나라는 뜻이었다.

광마종의 마인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마공을 익혔다.

화운은 강시당에서 이들과 싸웠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워낙 기괴했기 때문이다.

그때 사령은 화운에게 맹폭을 당해 축 늘어진 자신의 오른팔을 왼손으로 붙잡아 스스로 뽑아버리더니 죽음의 기운 같은 시커먼 기운을 뭉클뭉클 쏟아냈고, 혈쇄는 지독한 불길 같은 기운을 전신에서 일으켰고, 채대가 망가진 혈접에게선 아홉 가닥의 피처럼 붉은 강기가 채대처럼 튀어나왔다.

혈우는 피부가 스스로 쩍쩍 갈라져 혈인 같은 모습이 되더니 자신의 몸속으로 손을 푹 찔러 넣어 핏물이 뭉친 구슬 같은 걸 끄집어내 검으로 형상화시켰다.

광마는 더 놀라웠다.

마치 자신의 몸 안에 덩치괴물을 품고 다니는 것 같았다.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샘솟듯 흘러나오더니 놀랍게도 몸뚱이가 부풀었다. 살가죽이 쭉쭉 갈라지고 그 안에서 단단한 근육이 튀어나와 단단히 뭉치더니, 피와 죽음을 탐하는 파괴적이고 잔혹한 존재가 되었었다.

그때 당시엔 검멸이 있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멸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절대검력은 완성하지 못해 파괴력이 모자랐다.

지금의 화운에게는 맞닥트리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존재들인 것이다.

‘검멸을 먼저 익혀둘 걸 그랬나?’

화운이 살짝 후회하는 사이에 무영투가 앞으로 나섰다.

“아름다우신 소저께서는 어디에서 오신 분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연홍은 무영투가 자신과 화운의 사이에 끼어드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무영투가 아름답다고 말한 데다 화운의 수하인 것 같아서 일단 참았다.

“천종천마교 멸천부에서 왔어. 이 작자가 말하길, 무상 마백이랑 혈삭마가 이리로 갔다는데, 그 후로 연락두절이라서 확인 차 왔어.”

사연홍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피투성이 몰골의 암영총주가 보였다.

어지간히도 두들겨 팬 모양이었다.

“무상 마백과 혈삭마라면······.”

무영투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화운이 불쑥 내뱉었다.

“삼 일 전에 왔던 자들 말이로군.”

화운이 나서자 무영투가 노복처럼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왔었어?”

사연홍이 물었다.

두 눈은 재밌다는 듯 이채로 반짝거렸다.

“맞아. 무상 어쩌고 그랬던 자가 왔었다.”

“재밌네. 그런 사람은 온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할 줄 알았는데.”

“왜 발뺌을 해야 하지?”

“그러네. 발뺌 할 필요가 없겠네. 그들을 찾을 때까진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테니까.”

“그들을 찾을 필요는 없을 거야.”

“왜지? 어디로 갔는지 알아?”

사연홍의 물음에 화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

“어디로 갔는데?”

“지금 네가 밟고 서 있는 곳 아래.”

“······!”

사연홍이 고개를 숙여 땅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곧 흠칫 고개를 쳐들었다.

“설마 죽였다는 거야?”

“맞아. 죽였다.”

대답하는 화운의 모습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사연홍은 일순간 할 말을 잃고 멍청히 화운을 쳐다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