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판단 착오였어
“지금 천종천마교의 무상 마백과 혈삭마를 죽였다고 한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사연홍이 놀란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실망감과 아쉬움 같은 감정이 묻어났다.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마백과 혈삭마가 당했을 거라고 직감했고, 그래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광마종을 대동하여 찾아왔다.
그러나 화운을 본 순간 자신의 그런 직감이 틀렸기를 빌었다.
그래야 화운과 가까이 지낼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사연홍의 가슴에 가득 차 있는 건 예쁘장하게 생긴 인형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다.
“안다.”
화운은 담담한 모습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천종천마교의 무상을 죽이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말 알고 그러는 것일까?
사연홍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알고 있다고?”
“그래.”
“알고도 죽였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되나? 이미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판단을 내리고 온 거 아닌가?”
“이미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뜻이야.”
“그게 무슨······ 죽이지 않았다는 거야?”
“더 말하고 싶지 않군. 싸울 거면 바로 시작하지.”
화운이 싸울 태세를 갖추자 무영투 역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 광경에 사연홍이 다급히 외쳤다.
“멈춰!”
“······?”
“엉뚱한 사람을 잡을 순 없어. 바른 대로 말해. 그들이 왔어?”
“그래.”
“죽였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니들이 원하는 대답은 우리가 그들을 죽였다는 거잖아! 그래, 맞아. 우리가 죽였어! 그러니까 더 짜증나게 하지 말고 와 봐!”
화운의 모습만 보면 싸울 생각이 확고했다.
그래서 다급해진 건 사연홍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싶은 인형이 망가지는 걸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라는 거야! 니들이 죽이지 않았다는 거, 그 대답이 듣고 싶어!”
사연홍이 빠르게 외치자 화운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굳은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가지고 놀려고 드는군.”
“그게 아니라······!”
“그래, 우리가 아니다. 됐지? 그럼 시작하지.”
화운이 검자루까지 잡아가며 싸울 준비를 했다.
순간 사연홍이 성큼 성큼 걸었다.
광마종의 마인들이 사연홍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거기 있어!”
사연홍이 외쳤다.
광마종의 수장인 광마가 손을 들어 올리며 멈췄다.
혈쇄, 혈우, 혈접, 혈검 그리고 사령이 광마의 수신호에 따라 걸음을 멈췄다.
사연홍은 무방비로 다가갔다.
검자루를 움켜쥐고 있는 화운을 향해.
화운은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휘두를 기세였으나 사연홍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순간 검자루를 놓았다.
“무슨 뜻이지?”
화운이 물었다.
“진짜 범인을 찾겠다는 뜻이야.”
“······!”
화운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사연홍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대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화운은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사연홍의 걸음을 따라 돌아섰다.
그리고 광마종의 마인들과 완전히 등을 지게 되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화운이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사연홍은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싸움의 흔적이라도 찾는 모습이었지만 대청 한복판에서 대충 둘러보기만 했다.
“아무것도 없네.”
“싸운 흔적을 찾는 거라면 꼼꼼히 살펴야 할 거야. 그럼 핏자국 정도는 있을 거야.”
“핏자국?”
“세 방파를 돈으로 사려고 했을까?”
비서둔, 흑서담, 암영총의 우두머리들을 잡아다가 족쳤다는 말이었다.
사연홍은 그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손속이 무른 모양이네.”
“판단 착오였어. 손발로 쓰려고 살려주었더니 천종천마교를 끌어들일 줄이야.”
“그런데 왜 놔두었어?”
“그 사람이 떠나라고 했으니까.”
“그 사람?”
“네가 찾고 있는 사람.”
“떠나라고 해서 그냥 떠날 참이었다고?”
“천종천마교니까 어쩔 수 없잖아.”
“훗! 본교가 두렵나보지? 반로환동까지 한 고수라며?”
“반로환동?”
“아니야?”
“그것까지 고해바쳤어?”
“살아남으려면 뭔들 말하지 않을까.”
“하긴.”
“반로환동 맞아?”
“맞긴 한데, 아니기도 해.”
“······?”
“열다섯 살이야. 영약 먹고 탈태환골 비슷한 걸 했는데, 이 모양이 되었어. 더 어려졌으니 반로환동이긴 하겠지. 세 방파에는 내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한 건데, 그걸 또 떠버릴 줄은 몰랐어.”
“다행이다.”
“뭐?”
“고리타분한 늙은이가 아니라는 거잖아.”
사연홍의 눈빛이 뜨겁게 변해가고 있었다.
화운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어 얼른 화제를 바꿨다.
“천종천마교는 내게 경외의 대상이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하거든! 그런 천종천마교가 안 된다고 하니 그냥 물러나야지.”
“그래도 그렇게 쉽게 물러나려고 했다니 실망인 걸?”
“실망할 정도로 날 알아?”
“이제부터 알아보면 돼. 근데 넌 내가 누군지 알아? 안 물어보네.”
“대단한 신분인 건 알겠어. 그리고······.”
“그리고 뭐?”
“듣기로 혈부용이 대단한 미인이라고 하더군.”
혈부용 사소천.
사연홍의 언니이고, 멸제의 첫 번째 양녀다.
화운의 입에서 언니에 관한 말이 튀어나오자 사연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기질투로 화가 날 일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을 대단한 미인이라고 본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미인이라고 생각해?”
“여자 얼굴에 관심 없다.”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
“실수했군.”
“속마음이 그렇다는 거겠지?”
“속마음 같은 건 없어.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결국 내가 미인이라는 뜻이잖아.”
“······.”
화운은 대꾸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사연홍은 승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싱긋 웃었다.
화운이 지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사연홍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날듯이 무척 경쾌한 걸음이었다.
“당분간 이곳에 있어야겠어.”
“알아서 해. 팔아봤자 얼마 하지도 않는 장원이니까 그냥 두겠다.”
“너도 못 가.”
“무슨 뜻이지?”
“사라진 사람들을 찾을 때까진 너도 이곳에 머물러야 해.”
화운은 잠시 의아하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보내 줄 리가 만무하겠지.”
“의심한다기보다는 명확히 하자는 거야.”
“맘대로 해. 천종천마교가 그래야 한다면 어쩔 수 없으니까.”
“본교가 아니라 내가 그러길 원해. 좀 더 알고 싶거든, 너에 대해서.”
싱긋 웃는 사연홍의 눈빛이 묘한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
마운.
열다섯 살이고, 영약을 복용한 후에 열두 살의 어린 몸이 됨.
마운이 나이에 비해 놀라운 건 맞지만, 무상 마백이 방심했다고 하더라도 이토록 흔적도 없이 죽일 순 없다.
사연홍은 그렇게 결론 내리고 더 이상 무상 마백과 혈삭마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
지금쯤 교에 돌아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다른 어디선가 죽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더 이상은 관심이 없다.
사연홍은 자신의 이름을 마운이라고 한 화운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광마가 이끄는 광마종이야 원래부터 마백과 혈삭마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사연홍이 움직이지 않자 그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곤혹스러운 건 화운과 무영투였다.
사연홍과 광마종이 함께 있다 보니 수련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반 시진을 무의미하게 보내게 되자 화운이 사연홍에게 물었다.
“야백을 밖으로 보내고 싶은데 될까?”
“야백?”
사연홍이 되묻자 화운은 무영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무영투를 돌아본 사연홍은 인상부터 썼다.
아까부터 대청과 앞마당을 왔다 갔다 하여 계속 신경에 거슬리던 늙은이였기 때문이다.
“왜 보내야 하는데?”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리가 머물 곳을 다시 찾아야하니까.”
“이곳에 계속 머물면 되잖아.”
“난주에 놀려고 온 거 아니야.”
“세력을 키워서 사천을 발아래 두려고?”
“그 인간들, 정말 입이 가볍군.”
“그래서 대가리들은 손발로 키우는 거 아니랬어. 그냥 처버렸어야지.”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말한 대로 그 일 때문이 맞아. 난주가 틀어졌으니 청해성 쪽에서 다시 알아봐야지.”
“그냥 여기서 하면 되잖아.”
“무상이라는 자가 말하길, 그 세 방파는 천종천마교에 상납하고 있으니 건들지 말고 꺼지라더군.”
“그 인간한테 상납하는 거겠지. 본교가 뒷골목의 너저분한 돈까지 쓸어가야 할 정도로 궁색하진 않아.”
“그럼 그 세 방파를 내가 거두어도 된다는 거야?”
화운이 살짝 반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표정에 사연홍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아니, 난 그렇게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야. 야백!”
“예!”
화운의 부름에 무영투가 대답했다.
화운은 밖에서 들을 수 있도록 충분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공녀가 허락했다. 당장 가서 비서둔을 비롯한 세 방파를 귀야방의 이름으로 복속시켜라.”
“존명.”
무영투가 성큼성큼 밖으로 사라졌다.
화운은 그 모습을 지켜본 후 사연홍을 돌아봤다.
“도움을 받았다. 가자, 식사 정도는 대접해야겠다.”
원래 음침한 곳에서 사악한 짓을 일삼는 게 사연홍의 취미다.
하지만 화운이 원하고 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정하게 구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사연홍은 웃으며 일어났다.
***
다음 날.
사연홍은 돌아가야 했다.
“정말 안 갈 거야? 아빠한테 말하면 당장이라도 사천을 발아래 둘 수 있어.”
“지금의 내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니야. 누구에게든 진짜 내 모습으로 인정받아야겠어.”
화운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연홍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적당히 굽실거렸다면 금방 싫증이 났을 텐데, 감히 자신 앞에서 끝 모를 오만함을 보이고 있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얼굴도 성격도 자신과 잘 맞는 것 같았다.
“좋아. 이틀 후에 다시 올 때는 며칠 묵을 거야. 그땐 좀 더 재밌게 놀 거야. 알았어?”
“이틀 후에 보지.”
“내가 올 때까지 어디 가지 마. 그러면 천하를 뒤져서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내가 갈 곳은 사천뿐이야.”
“사천도 가지 마. 계획한 대로 세력을 키운 다음에 가.”
“그러지.”
“좋아. 그럼 이만 갈게.”
사연홍이 안도한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광마종의 마인들 중 그녀와 함께 돌아간 이는 광마뿐이었다.
나머지 혈쇄, 혈우, 혈접, 혈검 그리고 사령은 화운을 감시하기 위해 장원에 남았다.
사연홍이 탄 마차가 떠나자 화운은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무영투는 장원의 문을 닫은 후 광마종의 마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화운이 들어간 대청으로 들어갔다.
“아, 진짜 미치겠네.”
“뭐가?”
“걔랑 함께 있는 거 진짜 싫거든요.”
“누굴 탓하리, 그 얼굴을 탓해야지.”
“얼굴이 어쨌든 이 몸을 보세요. 아직 한참 아이란 말이에요. 어찌 된 계집이 이런 애한테 그렇게 치근덕거리냐고요.”
“왜, 간밤에 무슨 짓이라도 하던?”
“술을 먹이려들지를 안나, 조금만 방심하면 안으려고 들지를 안나, 진짜 목을 꺾어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야, 열두 살짜리 애가 목을 꺾어버린다고 하는 게 더 비정상으로 보인다.”
“아, 진짜!”
“언성 낮춰라. 밖에 있는 것들이 듣겠다.”
화운이 강기의 막을 쳐 놓았기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한 건 화운이 화를 가라앉히길 바라서였다.
“하아!”
화운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무영투가 의자를 가져와 앉으라고 권했다.
화운은 그 의자에 앉으며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냐. 피할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으니 그냥 버티는 수밖에.”
“계획을 바꿔야겠어요.”
“바꿔?”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죠.”
“사람? 누구? 설마 난 아니겠지? 마교에 가는 건 정말······.”
“암영총주에게 일러 강시당으로 찾아가라고 하세요. 세 방파가 귀야방으로 복속되었고, 방주인 제가 아이들을 납치하는 사업에 대해서 두 당 받는 금액이 너무 적어 못마땅해한다고 전하라고 하세요.”
“그럼 올까?”
“오지 않으면 찾아가야지요.”
“찾아가는 건 위험해서 안 된다며?”
“걔가 더 위험해서 안 되겠어요.”
“설마 잡아먹기야 하겠느냐? 그리고 이쁘기만 하더만.”
“걔 본 모습을 몰라서 그래요.”
“본 모습이 어떤데?”
“음침하고, 포악하고, 탐욕스러워요. 이제 열다섯 살 정도 되었을 건데 어떻게 벌써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건지, 진짜 마교는 마교인가 봅니다.”
“하기야 사람 죽는 걸 예사로 아는 곳이니 무슨 짓인들 못할까. 그래서 강시당주가 오지 않으면 찾아갈 방도는 있고?”
“걔가 강시당주랑 친해요.”
“그래?”
“강시당에서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고 그랬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네요.”
화운이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싫었나 보네. 알았다. 지금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되지?”
“예. 서둘러 주십시오.”
이윽고 무영투가 밖으로 나갔다.
난주에서의 계획은 이렇게 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야 했다.
‘고루마군, 당신은 반드시 없어져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