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정리해야지요
-널 오랫동안 알고 있다. 누구보다 널 존중하고, 누구보다 너의 가까이에 있고 싶다. 매일매일 보슬비처럼 다가가겠다는 약속. 너무나 소중한 약속인데 아직은 지키지 못해서 늘 미안했다. 하지만 늦더라도 반드시 지킬 거다. 네가 더 성장해서 누구의 보살핌도 필요 없을 나이가 되면 그땐 항상 네 곁에 내가 있을 거다. 그러니 그때까지, 오늘 나한테 실망했던 마음을 그때까지만 미뤄다오.
열한 살의 백리연을 혼란스럽게 만든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영특한 백리연은 화운이 했던 그 말속에 담긴 진의를 알아들었다.
‘그는 날 알고 있어. 매일매일 보슬비처럼 다가가겠다는 약속······ 그건 나야. 내가 해달라고 한 게 틀림없어. 그 말은 엄마가 해준 말이니까. 나와 엄마만 알고 있는 말이니까 내가 해준 거야. 그렇게 해달라고. 근데······ 난 어려. 너무 어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지난 몇 년간 생각하고 생각했다.
해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했다.
도문, 불문의 교리는 물론이고 전생에 관한 서책도 읽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화운의 이야기를 통해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의 회귀.
‘그는 미래의 나에게 들었던 거야. 매일매일 보슬비처럼 다가가겠다는 약속을 미래의 나와 했던 거야. 그러니까 우린······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게 틀림없어!’
열네 살의 백리연은 확신했다.
그래서 모두가 충격에 빠져 있을 때 화운을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제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저랑 어떤 사이였나요?”
백리연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화운은 백리연이 두 사람의 사이를 짐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절로 미소가 나왔다.
하지만 백리연이 듣고 싶어 할 지도 모르는, 어쩌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일 지도 모르는 그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미리 만들어진 한 쌍을 맞추는 것 같아서였다.
‘그때는 하지 못했지만 이번엔 다를 겁니다. 내가 매일매일 보슬비처럼 다가가겠어요. 그래서 백리소저가 나만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때 내 마음을 말하겠어요.’
화운은 연모했던 스무 살 즈음의 백리연에게 다짐했다.
“우린 꽤 좋은 사이였다.”
“······!”
“스무 살 즈음의 넌 천하의 모든 사내들이 우러러보던 미인이었고, 나 역시 그들 틈에서 널 바라봤다.”
“저는요? 전 누굴 바라봤나요?”
“글쎄 그건 그때의 백리소저에게 물어봐야겠지.”
“그럼 그 약속은 뭐예요? 매일매일 보슬비처럼 다가가겠다는 그 약속이요.”
“백리연.”
“······?”
“넌 태중혼약한 사내가 있으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냥 사랑할 거냐? 그게 과연 사랑일까?”
“······!”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거라는데, 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 사랑은 계산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약속했잖아요.”
“그건 내가 한 거야.”
“나랑 했잖아요.”
“스무 살의 너야. 지금의 너가 아니라.”
백리연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아직 어려. 사랑 하나에만 매달리기엔 너한테 주어진 시간이 많아. 스무 살의 네가 그랬듯이 세상을 봐. 네 안에 천하를 담아봐. 그러고도 남은 빈자리가 있을 거야. 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그 사람이라면······.”
화운은 말을 맺지 않았다.
그 어떤 말로도 그 사람을 설명하기엔 모자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화운은 백리연을 향해 빙그레 웃어준 후 돌아섰다.
왠지 가슴이 아린 느낌이었다.
그냥 스무 살 즈음의 그녀였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그랬다면 이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을 건네줄 수 있을 테니까.
화운이 굳이 오대세가가 회합하는 날 나타난 건 황보세가와 우문검가를 처리함과 동시에 삼대세가에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영약을 복용하여 환골탈태를 한 백리명, 백리연, 남궁현 그리고 선우유성을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부탁이었다.
몇 년의 집중수련을 통해 극강의 고수로 만들 생각인 것이다.
삼대세가의 가주들은 적잖이 당황했고 고민했다.
다들 한참 세가의 무공에 매진할 때여서다.
그때 담대후가 나섰다.
“무공은 나와 또 한 분의 스승이 가르칠 것이오. 다들 각 세가의 무공을 기본부터 착실히 익히고 있을 터이니 미처 터득하지 못한 부분들은 수련을 마칠 때쯤 스스로 연마할 수 있을 것이오.”
맞는 말이었다.
다들 다섯 살 전후를 시작으로 세가의 무학들을 착실히 익혀온 터라 그 중심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게다가 담대후와 같은 고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였다.
결국 삼대세가의 가주들은 한 달 후에 백리세가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
화운은 선우세가로 향했다.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담대후, 무영투, 담명 그리고 선우세가의 부자가 세가의 무인 이십여 명과 함께 절강성 항주로 향한 것이다.
남궁검가에서부터 며칠 걸리는 여정이라 그 시간 동안 선우유성과 많이 친해졌다.
담명의 성격이 쾌활하여 화운보다 더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두 명의 형이 생긴 선우유성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모친이 주화입마 하여 쓰러질 때만 해도 마음의 한쪽이 무너진 기분이었는데, 고모와 고모부가 찾아와 영약으로 모친을 구해주었고, 그 일을 계기로 오랜 시간동안 담을 쌓았던 부친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 후로는 나날이 즐거웠다.
게다가 이젠 듬직한 형들까지 생겨 더욱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은 며칠 후 선우세가에 도착한 순간 끝나고 말았다.
선우세가의 정문이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화운 일행이 도착한 시간에 맞춘 것인지 수십 명의 무인들이 선우세가의 사람들을 정문 앞에 무릎 꿇려놓고 있었다.
그 사람들 속에는 선우세가의 가모인 이옥영은 물론이고 화운의 부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놈들!”
선우세가주가 분노하여 달려들려고 했다.
순간 화운이 벼락처럼 혈도를 짚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해지셔야지요.”
화운은 선우유성에게도 시선을 돌려 함부로 굴지 말라고 했다.
담대후와 담명 그리고 무영투는 화운이 있기에 지켜보기만 했다.
화운이 앞으로 나섰다.
“최악의 선택을 했군.”
“닥쳐라! 감히 해적도와 짜고 본가를 능멸한 죄! 오늘 이 자리에서 단죄할 것이니 그리 알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친 자는 다름 아닌 우문검가주였다.
그의 옆에는 그의 동생인 장천검 우문낙성도 있었다.
화운은 한차례 쓱 훑어봤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부모님과 숙모님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제법 강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연줄을 최대한 동원하여 초빙한 자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일백에 가까워 보이는 숫자가 선우세가의 사람들을 결박하고 금방이라도 칼부림할 것처럼 위협하고 있었다.
화운은 다시 우문검가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놈들이 선우가와 작당하여 본가를 해적들과 내통했다고 꾸몄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낱낱이 고하고 스스로 무공을 폐한다면 단 한 사람도 피를 흘리는 일 없이 끝날 것이다. 본가는 정파의 명문으로써 패악한 너희들에게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고자 함이니 어리석은 판단으로 피를 흘리지 마라!”
우문검가주가 근엄한 태도로 말했다.
마지막 한 방으로 모든 상황을 뒤집을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화운이 물었다.
그 물음이 뜬금없었던 모양이다.
우문검가주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뭐?”
“죽기 전에 남길 말은?”
“이놈! 닥치고 꿇어라! 아니면 이곳에 있는 자들부터 모조리 참수할 것이다!”
우문검가주가 맹수처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피식 웃은 화운은 자신의 부모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불효자식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그간의 공부를 이렇게나마 보여드리게 되었으니 잘 봐 주십시오.”
화운의 말에 선우비연이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지켜보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화중옥 역시 덩달아 가슴을 활짝 폈다.
그에 우문검가주가 차갑게 외쳤다.
“놈! 손가락 하나만 까딱 해봐라. 네 어미의 목부터 날아갈 것이다! 엽 형! 저놈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면 그 여자의 목을 베어버리시오!”
“염려 놓으시오!”
선우비연의 목에 박도를 대고 있는 자가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바로 그 순간 화운이 검을 뽑아 그었다.
순간 한줄기 미풍이 우문검가주를 스쳐지나갔다.
우문검가주가 느낀 건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돌연 오른팔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
우문검가주가 흠칫 자신의 팔을 들어본 순간 그의 팔이 툭 떨어지며 피가 쏟아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끄악!”
“아악! 내 팔!”
“크아아아악!”
우문검가주의 뒤에서 숨넘어가는 비명이 마구 쏟아졌다.
팔이 잘린 고통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뒤를 돌아본 우문검가주.
그의 두 눈이 경악과 절망을 담고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크기로 치켜떠졌다.
인질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자들의 팔이 모조리 잘려버린 것이다.
“형, 형님······ 끄윽!”
우문낙성이 잘린 팔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우문검가주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아연실색했다.
“남을 짓밟을 땐 당신도 당할 수 있다는 것쯤은 생각했어야지.”
우문검가주는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화운이 막 그의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 이렇게······.”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 억울해하지 마.”
화운은 그 말을 끝으로 가버렸다.
이때 선우유성이 함께 돌아왔던 선우세가의 이십여 명의 무인들과 달려가 포박당해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화운은 부모님을 포박하고 있는 줄을 손수 풀어주었다.
“저 때문에 몹쓸 일을 당하셨습니다.”
“수련은 끝난 것이냐?”
선우비연이 물었다.
“수련에 끝이 있겠습니까. 다만 억지로 수련할 단계는 끝났습니다.”
화운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자 선우비연은 두 팔을 벌려 껴안았다.
“장한 내 새끼, 수고 많았다.”
“어머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녀석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러느냐.”
“절 믿어주셨잖습니까.”
“어미가 자식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는단 말이냐.”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워낙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을 거 아닙니까.”
“그래, 그랬다.”
화운이 겪어온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선우비연은 살짝 눈시울을 붉히며 더욱 꽉 껴안았다.
“험험! 부인, 나도 아들놈 얼굴 좀 봅시다.”
화중옥이 선우비연의 뒤에서 헛기침했다.
그제야 선우비연이 화운을 놓아주었다.
“이야, 이 녀석, 사내 낯짝이 그게 뭐냐?”
“많이 놀라지 않으셨나 봅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녀석의 아비인데 이 정도에 놀라서야 쓰겠느냐. 끄떡없다.”
화중옥이 당당히 가슴을 펴며 화운의 위아래를 마구 살펴보는 사이에 담대후 등이 다가왔다.
“아, 담 사부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선우비연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화중옥 역시 얼른 다가가 예를 차렸다.
“못난 자식을 맡긴 화중옥이라 합니다. 이제야 인사드리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선우 부인,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화 선생, 과례는 오히려 결례라지요? 좋은 인연이니 웃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담대후가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인사했다.
얼굴에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있음이 묻어나 두 사람도 맘껏 웃을 수 있었다.
“하하하! 내자한테 운이 놈이 최고의 스승님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한 마디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과례는 접어두고 술이나 올리겠습니다. 처남! 거기서 뭐하십니까! 어서 술 상 좀 내주십시오!”
화중옥이 선우세가주를 향해 소리쳤다.
순간 화운이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그때까지 선우세가주의 혈도를 풀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인석아! 담부터는 말로 해라. 말로.”
“예. 죄송합니다.”
“나만 빠졌잖느냐. 부인, 괜찮으시오?”
선우세가주가 이옥영을 향해 총총히 뛰어갔다.
화운은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봤다.
행복이 두 눈으로 들어와 가슴을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쟤들은 어쩔 거냐?”
무영투가 물었다.
그때까지 일백여 명에 가까운 우문검가의 무인들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정리해야지요.”
“깨끗이?”
“예.”
“상황을 보니 내가 해야겠구나?”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감사냐. 가서 함께 어울리거라. 정리가 끝나는 대로 찾아가마.”
“예.”
화운이 감사를 표한 후 가족들에게로 돌아가자 무영투는 우문검가의 무인들에게로 향했다.
“어쭈, 아직도 무기를 들고 있다 이거지!”
무영투의 일갈에 우문검가의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 병기를 내던졌다.
“지금부터 우문검가로 향한다. 실시!”
무영투의 일갈에 우문검가의 무인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절망한 기색으로 걸어갔다.
그날 밤.
우문검가를 깨끗이 정리하고 돌아온 무영투를 화운이 맞았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부러 기다릴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냐?”
“예.”
“그래, 말해 보거라.”
“그간 죄송했습니다.”
“뭐가?”
“말씀 드리지 못한 거요.”
“뭘······?”
“무영자 어르신께서 살아계십니다.”
“······!”
무영투의 두 눈이 놀람으로 휘둥그렇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