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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77화 (177/207)

#177. 사황

이무기의 비늘로 제작된 방호구와 무기들까지 지급했다.

무기들은 물론이고 흉갑과 방패에도 사마공이 일융무애의 대법을 직접 새겨놓았다.

그러니 이제 저마다 일신의 무위만 상승의 경지로 높이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 마지막 준비를 위해서는 한 사람이 필요했다.

만류귀종 무해일연!

무해노인은 수백 년 전 천하무림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만류는 귀종이라, 천하에 산재하는 무공도 결국은 그와 같이 하나로 귀결된다고 주장한 무해노인.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까 봐 무해노인의 주장을 가당치도 않은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일축했다.

허나 무해노인은 코웃음 치던 그들의 무공을 꿰뚫어보았다.

그들 개개의 무공이 지향하는 바와 문제 그리고 발전 가능성까지, 마치 그 무공을 창안한 사람처럼 술술 풀어놓으니 모두가 크게 놀랐다.

무해노인은 십 년 만에 사라졌다.

그러나 무해노인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다.

무해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던 이들이 자신들의 무공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여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것이다.

남궁검가와 황보세가.

당시엔 십여 개의 무문이 더 있었으나 지금까지 명문으로 남아있는 곳은 그 둘뿐이었다.

‘무공에 대한 방대한 지식은 무해곡이 천하제일이라고 했어. 그러니 무해노인의 후인이라면 저마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줄 수 있을 거야. 다만 문제는 무해노인의 후인이 하필이면 사황이라는 건데······.’

화운은 사황을 떠올리며 고심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그만 생각하면 다된 일도 폭삭 망가져버릴 것 같았다.

사황의 가슴엔 천하를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오 년 동안 천하를 철저히 짓밟아 버린 전례도 있다.

당시엔 화운이 알던 사람도 모조리 죽었다.

해적도로 피신했던 이옥영까지 섬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 정도로 포악하고 잔인한 사람이 사황이었다.

그런 사황이 천하를 위해 무해곡의 비고를 연다?

천마가 부리는 마귀들을 상대하라고 무공을 가르쳐 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무공을 가르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약점 없는 사람은 없는 법, 다행이 사황에게도 약점이 있다.

‘계획대로 그 약점을 공략하는 수밖에!’

화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사황이 있는 운남성 애뇌산의 무해곡으로 갈 시간이었다.

스승 담대후와 무영투에겐 이미 말해두었다.

오늘 사황을 만나러 갈 것이라고.

그런데 거처를 나서는 화운의 앞을 한 사람이 막아섰다.

열네 살의 그녀, 백리연이었다.

“무슨 일이지?”

“생각을 했어요. 아주 많이. 스무 살 시절의 나와 그쪽은 틀림없이 서로······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 약속을 한 걸 거예요.”

“······!”

“매일매일 보슬비처럼 다가가겠다는 약속. 너무나 소중한 그 약속을 지켜주세요.”

열네 살의 백리연은 냉소적인 성격을 까칠함 대신 도도함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를 놓칠까봐 안절부절 하는 것 같았다.

말없이 응시하던 화운은 백리연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했던 이야기에 집착하지 마라. 그 이야기에 집착하게 되면 껍데기만 얻게 될 거다. 넌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나 역시 그런 껍데기만을 바라진 않는다.”

백리연은 혼란스러웠다.

열네 살 그녀의 여심에 큰 파문을 일으켜놓고는 집착하지 말라니.

자나 깨나 그 생각뿐인데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인가.

“전 어땠나요? 스무 살의 전 어떤 여인이었나요?”

스무 살 시절의 아름다웠던 백리연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화운만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말만으로는 모두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검무를 춘 적이 있느냐?”

“아뇨.”

열한 살에 대환단을 복용하고 환골탈태를 하면서 화운이 알던 백리연과는 조금 달라졌다.

검무조차 추지 않게 된 것이다.

“검무를 가르쳐 주마.”

검을 뽑은 화운은 백리연이 추던 검무를 펼쳐보였다.

스무 살 시절의 백리연이 늘 품고 있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검무였다.

백리연은 화운이 춘 검무에 흠뻑 빠졌다.

지금의 그녀도 알고 있는 난화십이검이어서일까, 아니면 이 나이 때쯤부터 시작했던 검무였기에 지금의 그녀도 통하는 뭔가가 있어서일까.

백리연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다.

한참 후 검무가 끝나자 백리연의 입에서 참고 참았던 탄성이 새어나왔다.

“아! 그 검무를 제가 췄다고요?”

“그래, 나 역시 처음 봤을 땐 넋을 잃었었지.”

잠시 그날을 회상한 화운은 검을 집어넣었다.

“보슬비 이야기를 할 때의 백리소저는 무척 아름다웠다. 지금의 너처럼 도도해 보였지만 가슴 속엔 따스함으로 가득했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가 힘들어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힘이 될 말을 던져주곤 했다. 난 그 따스함이 좋았다. 홀로 검무를 추던 외로움을 늘 보듬어 주고 싶었다.”

“······!”

“그래, 난 스무 살 즈음의 너와 약속했다. 보슬비처럼 매일매일 다가가겠다고. 그건 늘 너만을 바라보고 너만을 생각하겠다는 뜻이었고, 내가 먼저 다가가겠다는 뜻이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상태이든······ 난 언제나 너에게로 향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집착도, 조급도 하지 마라.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며 너의 길을 가도록 해.”

화운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서 있는 백리연.

그녀의 두 눈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화운은 손을 뻗으려다 말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며칠 안 보일 거다. 갔다 오면 보자.”

***

운남성 무해곡으로 출발한지 반나절 만에 한 명의 여인이 화운의 앞에 나타났다.

퇴폐미가 물씬 풍기는 여인이었다.

지금은 사미희라 불리는 하오문의 사갈마희였다.

“몇 달 안 본 새에 더 예뻐졌네요.”

사미희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눈꼬리가 휘어져라 눈웃음을 치지만 화운은 눈빛 한 번 움직이지 않았다.

“쳇!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렇지. 그 나이에는 저처럼 매력적인 여인한테는 인생의 참교육도 당해보고 그러는 법이에요.”

사미희가 눈을 흘겼다.

그 모습마저 무척 고혹적이었지만, 화운의 반응은 감정 없는 나무토막 저리가라였다.

“무슨 일입니까?”

“너무 무심한 거 아니에요?”

“자꾸 아니면 말고 식으로 추파를 던지니까 그렇죠. 그런 거 싫어한다고 말했잖습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그나마 있던 정마저 떼겠다니 다신 안 그럴게요. 근데 섭 대협은 잘 있나요? 그분은 자꾸 신경이 쓰이네요.”

사미희가 묻고 있는 섭 대협은 추뢰수 섭일환이다.

그날 자식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오열하던 섭일환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던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아시잖습니까.”

“어디에 있는지만 알아요.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그런 건 알지 못하니까 그렇죠.”

“정 궁금하시면 직접 찾아가 보십시오. 본천의 문은 활짝 열려 있으니까요.”

“그냥 궁금한 것뿐이에요. 괜히 남들이 오해하면 어떡해요?”

“아이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가지고 천종천마교로 들어갈 방도만 찾을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 겁니다.”

“아! 역시 그렇겠지요.”

사미희의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

많이 염려가 된 모양이다.

잠깐이라도 알았던 사람이 크게 슬퍼하는 일이 있으면 걱정해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정(正)은 특별한 게 아니다.

보통의 사람이 가져야 하는 생각과 행동의 테두리가 바로 정이다.

그걸 벗어나면 사(邪)일 것이고, 벗어남을 즐기면 악(惡)이고 마(魔)일 것이다.

“알았어요. 내가 가보든지 할게요. 그보다 지켜보라던 자들이 움직였어요.”

“······!”

화운이 눈을 치떴다.

사미희가, 아니 하오문에게 특별히 지켜봐 달라고 부탁한 건 한 사람뿐이다.

“붉은 머리칼의 노인이랍니까?”

“예. 피처럼 붉은 적룡포를 입었는데 멀찍이서 지나치기만 했는데도 숨이 막히더라네요. 근데 그 노인의 정체가 뭐예요?”

화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 년 전의 인물이라 쉽게 믿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사황!

바로 그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고 있다.

‘역시 상황이 달라져서겠지.’

“절대 접근하지 말라고 해두었지요? 눈곱만큼이라도 그 사람을 지켜본다는 의심을 샀다간 하오문 전체가 날아갑니다.”

“······!”

화운의 엄포에 사미희의 얼굴이 굳었다.

“공자께서 염려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인가요?”

“천마만큼 무서운 사람입니다.”

“천, 천마만큼이요? 천마만큼······!”

놀라 중얼거리던 사미희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설마 사황······?”

“백 년 전의 인물이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용하네요.”

“흉명으로 천마만큼 무서운 사람이 사황 말고 또 있나요?”

“여튼 사황이 맞습니다. 어딥니까? 제가 직접 가볼 테니까 다들 물러나라고 하십시오.”

“엇?”

갑자기 사미희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왜요?”

“월영······.”

“월영이 뭡니까?”

“뒤를 따르라고······.”

“멍청한! 절대 쫒지 말고 사람들을 넓게 깔아두라고만 했잖습니까!”

“월영은 잠입과 추적술을 훈련받은······!”

“그래서 천마나 사황 같은 괴물들을 속일 수 있답니까! 됐고, 월영이 추적하기 시작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지부가 어딥니까?”

“귀주······!”

“아, 사 소저가 여기까지 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거기도 늦었겠습니다. 총단으로 바로 가야겠습니다. 늦지 않기를 바라십시오.”

내던지듯 말한 화운이 사미희를 옆구리에 끼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일섬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

호북성 무한.

하오문 총단.

화운이 정무맹 신풍대주 시절에 하오문주 천옥당을 만났던 칠 층 전각.

하오문의 최중심부인 그 전각이 무너져 있었다.

유성이 전각 꼭대기로 떨어진 것처럼 완전히 박살이 났다.

부상자들의 신음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가운데 천옥당을 비롯한 하오문의 수뇌부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짓밟아 버릴 것 같은 파괴적인 기운이 넘실거렸다.

바로 사황이었다.

“너희들의 불문율 따위는 본좌에게 통하지 않는다. 말하라. 본좌를 감시하라고 한 자가 누구냐?”

단지 묻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기도가 모두를 짓눌렀다.

하얗게 질린 천옥당은 전신을 덜덜 떨었고, 하오문의 호법이자 천옥당의 최측근인 풍백은 두려움에 짓눌린 가운데에도 말을 해도 좋을지 망설였다.

하지만 짧은 망설임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이 가득한 칠 층 전각을 송두리째 무너트려버린 것을 보았기에 길게 고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황은 그 짧은 망설임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버러지들이 감히!”

차가운 노성과 함께 사황이 오른손을 뻗었다.

순간 시뻘건 강기의 파도, 전륜멸천파가 그야말로 성난 파도처럼 밀려가며 무너진 전각의 잔해를 날려버리고 하오문이 자리를 잡고 있던 도심의 일대를 무참히 휩쓸기 시작했다.

“화, 화 공자입니다! 제발 손을 거두어주십시오!”

풍백이 소리쳤다.

하지만 늦었다.

전륜멸천파는 사납게 뻗어가며 걸리는 족족 쓸어버렸다.

“그-마-안!”

까마득히 먼 곳으로부터 한 줄기 음성이 뇌성 같이 길게 울렸다.

그런데 그 음성이 사람들의 귀청을 때린 순간 사황이 발휘한 전륜멸천파가 굉음을 일으키며 터져 버렸다.

콰-앙!

사황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 순간이었다.

“감히!”

사황의 분노가 폭발적으로 거세졌다.

천마와 검성 외에는 자신의 적수가 없다고 여기고 있던 사황이기에 자신의 손속을 방해한 존재의 등장에 놀람보다는 분노부터 터트렸다.

하지만 그도 은연중에 직감하고는 있었다.

느닷없이 허공을 가르며 전륜멸천파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가루로 만들어주마!”

정체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사황이 전륜멸천파를 펼쳤다.

시뻘건 강기의 파도가 좀 전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몰아쳤다.

남서쪽 허공을 향해서.

번-쩍!

새파란 청광이 남서쪽 저 멀리서 번뜩였다.

그 섬광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몰아쳐가던 전륜멸천파가 굉음과 함께 좌우로 갈라지더니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

사황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분노와 당황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접니다!”

좀 전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두 사람이 사황의 앞에 내려섰다.

화운과 사미희였다.

사미희는 딱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 후 하오문주 천옥당을 향해 달려갔고, 화운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본 후 사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황은 그때까지 분노와 궁금증 사이에서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로 화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니 말입니다.”

화운은 진심으로 자신을 탓했다.

사황은 사황인 것을.

그에게 천하를 구하는 일에 협조해 주기를 기대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었다.

“뭐라는 것이냐!”

사황이 서슬 푸른 기세를 드러냈다.

그러나 화운은 아랑곳 않고 엄포를 놓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의미 없는 살상을 중지하십시오. 또다시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것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 순간 애뇌산으로 달려갈 겁니다. 내가 마음먹으면 사황 당신이 제아무리 강해도 무해곡을 지키진 못합니다.”

“······!”

사황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사황인 것도 알고 애뇌산에 무해곡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무해곡에서 나온 것 역시 알고 있다.

자신은 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이건 맞지 않다.

이래선 안 된다.

농락당한 기분마저 든다.

“감히! 죽인 다음 알아보겠다. 네놈의 정체가 뭔지.”

사황이 한 걸음 내디뎠다.

순간 그의 주위로 폭풍 같은 기세가 일어나 옷자락이 찢어질듯 나풀거렸고 그가 딛고 선 공간이 황혼이 물 든 것처럼 붉게 변했다.

강렬한 살의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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