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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80화 (180/207)

#180. 무해(武海)

이틀 후 정문에 현판이 걸렸다.

큼지막한 현판이었는데 강한 필체로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해(武海).

수백 년 만에 내걸린 이름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천하에 그 이름이 퍼졌다.

만류귀종 무해일연!

무공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는 무해노인의 전설과 함께.

화운은 무해에 남았다.

자신의 기반이랄 수도 있는 이곳에 탈이 나면 경천보패를 빼앗더라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천보패가 발동되면 즉각 알아차릴 수 있어서 경천보패를 빼앗는 것이 당장 급한 건 아니었다.

경천보패를 가졌다고 한들 단시일 만에 고수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경천보패에는 되돌리고 다시 되돌리면서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을 대폭 늘리는 묘용이 있을 뿐이다. 물론 죽으면 경천보패가 발동한 시점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기에 불사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지금 화운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예전에 화운이 사황에게 그러했듯이.

한편 사황은 무해의 현판을 내건 날부터 약속을 지켰다.

북궁설과 백리명을 비롯하여 담명, 백리연, 남궁현 그리고 선우유성을 한 자리에 모아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사황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각자가 익힌 무공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화운과 담대후도 자리했다.

무공을 배우기로 한 여섯 명은 사황 앞에서 각자가 익히고 있는 무학들을 펼쳤다.

모두들 명문가의 핏줄들답게 기초부터 탄탄했다.

게다가 대환단을 복용하여 환골탈태한 덕분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대단한 성취를 이룬 상태여서 고만고만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던 사황의 속내를 놀라게 만들었다.

“구룡제의 광검은 그 자체만으로도 천하일절이다. 무림사에 큰 획을 그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넌 구룡제가 될 수 없다. 네가 익힌 심공과 검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

근래에 들어 북궁설 자신도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더 묻지도 못하고 무거운 표정만 지었다.

이때 화운은 사황의 지적에 공감하고 있었다.

정무맹 시절에 비무를 했던 북궁설을 기억하고 있어서다.

당시에 북궁설의 검공은 지독한 열기를 앞세우고 성난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화운은 그때의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자신을 향해 휘몰아치고 있는 격렬한 검격을!

파괴적인 기운이 뿜어내고 있는 폭발적인 결을!

저돌적인 질주에 이어 거대한 격류 같은 검격을 파상적으로 퍼부어대던 북궁설의 모습을!

“설 누님은 화륜심공을 익혔습니다. 뜨겁고 강렬한 기운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둘이서 생사투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때의 검격이 광검보다 더 어울려 보입니다.”

화운이 사황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사황이 냉막한 표정 그대로 말했다.

“펼쳐봐라.”

“예.”

화운은 모두가 보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검을 뽑아들고는 그때 당시에 북궁설이 펼쳤던 검격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사나워 보이기만 하던 검격에 어느 순간부터 꽤 강렬한 열기가 넘실거렸고, 그때부터는 그때 당시의 북궁설이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격류 같은 검격을 쏟아냈다.

그 모습에 북궁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가슴 깊은 곳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두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이윽고 화운이 검을 거두고 물러나자 사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었거늘, 쯧쯧쯧!”

결국 구룡제의 욕심이란 소리다.

한차례 혀를 찬 사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운이 검을 뽑아 내밀자 사황의 손으로 빨려들어 갔다.

사황은 북궁설을 향해 섰다.

“넌 당분간 저 녀석에게 그 검을 배우도록 해라. 단 가슴속에 이 모습을 담아두는 걸 잊지 말고.”

말이 끝난 순간 사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한 번 본 것만으로도 화운이 펼쳐보였던 강렬한 검세를 똑같이 펼쳐 보였다.

하지만 화운이 펼칠 때와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화운은 격렬한 검세만큼 저돌적인 움직임으로 사방팔방을 휘젓고 다녔지만, 사황은 그렇지가 않았다.

격렬한 검세와는 달리 몸의 움직임은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검 스스로가 미쳐 날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어떤 무공이든 결국 가야 하는 길은 하나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

우뚝 멈춰 선 사황이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격렬한 기운이 눈앞의 공간을 좌우로 크게 갈라놓았다.

태산이 갈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모두의 머릿속을 뒤흔들어놓았다.

“이해했느냐?”

사황의 무심한 눈길이 북궁설에게 향하고 있었다.

북궁설은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입을 열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사황은 백리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익힌 검법은 계집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아마도 그 검법의 본모습은 조금 달랐을 게다. 사내 녀석들이 익히려고 손을 봤겠지.”

백리세가의 성명절학은 난화십이검(亂花十二劍)이다.

어지럽게 흩날리는 꽃잎을 보고 만들어진 검법으로 까마득한 시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고수가 만든 것이었다.

사황이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백리명이 펼쳤던 난화십이검이었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달랐다.

변화무쌍한 가운데 날카로운 공세를 펼칠 때마다 강렬한 기세가 폭발적으로 뿜어지곤 했다.

백리명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자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때 화운이 슬며시 다가가 백리연의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 거야. 보려고 하지 마.”

백리연은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바로 뒤에 서서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따뜻한 손길.

그리고 귓가에 닿은 숨결.

백리연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혹여 자신의 변화를 화운이 알아차릴까봐 신경쓰다보니 더욱 세차게 날뛰었다.

‘아, 이러다간 정말······!’

백리연이 숨까지 참아가며 두근거림을 억누르려고 애쓸 때였다.

사황의 무덤덤한 음성이 찬물을 끼얹어주듯이 들려왔다.

“네가 익힌 심법을 적어와라. 검공에 맞게 고쳐야 할 게다.”

백리세가 정도 되는 명문가의 심법을 누군가에게 개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백리명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가서 쓸까요?”

백리세가주가 보았다면 펄쩍 날뛸 일이었다.

하지만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백리명은 전혀 새로운, 아니 월등히 더 대단해 보이는 난화십이검을 보여준 사황에게 심공을 감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상성이 맞지 않은 무공을 보는 건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이지.”

사황이 화운과 백리연의 모습을 힐끔 보며 말했다.

화운이 잘했다는 뜻이었고, 백리명에게는 가도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잽싸게 다녀오겠습니다.”

백리명이 호들갑을 떨며 자리를 떠났다.

사황은 다시 시선을 돌려 담명을 향해 섰다.

“넌 네 할아버지랑 먼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예.”

담명은 공손히 대답했다.

뭔가 한 마디라도 직접 듣고 싶었던 모양인지 조금은 아쉬운 기색이 묻어났다.

사황은 담명에 이어 선우유성에게 시선을 두었다.

“넌 검학도 손봐야겠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건 심법이다. 너무 형편없다.”

선우세가의 가전무공은 천애십팔검과 무량심법이었다.

그런데 몇 세대 전에 무량심법이 유실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육합단양공으로 대체를 했지만 무량심법에 미치지 못해 천애십팔검의 검공을 완벽히 받쳐주지 못했다.

선우세가가 몰락하게 된 근본 원인이 된 것이다.

“네녀석이 창피할 일이냐!”

낯부끄러워 얼굴을 떨구고 있던 선우유성이 사황의 호통에 고개를 들었다.

사황은 더 말하지 않고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거기에 있느냐!”

갑작스런 바람과 함께 한 사람이 사황의 앞에 부복하며 나타났다.

혈존이었다.

“저 녀석을 데려가서 자령신공을 가르쳐주어라.”

“주군!”

혈존이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자령신공은 혈존이 익히고 있는 혈천멸살강기의 원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혈존이 익히고 있는 신공을 선우유성한테 가르쳐주라는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기초가 좋은 놈이다. 가르칠 맛이 날 게다.”

“하오나 주군······.”

“자령신공이 유출되면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될 것이 아니냐.”

“존명.”

혈존이 복명한 후 선우유성을 돌아봤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라 선우유성이 화운을 쳐다봤다.

“무서우면 스승으로 모셔라. 설마 제자를 죽이겠냐!”

화운이 빙그레 웃어 보이자 선우유성이 혈존을 향해 넙죽 절을 올렸다.

“제자 선우유성이 스승님을 뵙니다.”

“지랄 말고 따라오너라!”

선우유성을 향해 호통을 친 혈존은 사황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앞서 걸어갔다.

하지만 선우유성은 바로 쫓아가지 않고 계속 절했다.

처음으로 스승을 모실 때 하는 아홉 번의 절, 구배지례를 마저 하려는 것이다.

“뭐하는 짓이냐! 당장 죽여주랴!”

혈존이 돌아보고는 살벌하게 소리치자 화들짝 놀란 선우유성이 잽싸게 달려갔다.

하지만 혈존이 앞서 가기 시작하자 얼른 그 자리에 멈춰서고는 다시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혈존이 돌아보기 전에 잽싸게 달려가다 또 다시 멈춰서는 남은 절을 마저 했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두 사람.

“제대로 못 익혀도 죽여 버릴 테니까 목숨을 걸어라.”

“옛, 사부님!”

“누가 사부라는 것이냐! 네깟 놈이 내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지랄 말고 죽을 각오나 해라!”

“염려 마십시오, 사부님!”

“이 찢어죽일 놈이!”

“제자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사부님!”

열두 살의 선우유성은 화운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혈존을 계속 사부라고 불렀다.

혈존은 사황에게 받은 명이 있어 감히 거스르지는 못하고 반사적으로 쳐들었던 손을 부들부들 떨기만 하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렇게 두어도 괜찮아요?”

백리연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화운은 괜찮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이는 뚝심이 있어. 잘 버텨낼 거야.”

화운은 선우유성과 혈존의 모습이 눈에서 서라지자 사황을 형해 시선을 돌렸다.

이때 사황은 남궁현을 보고 있었다.

“남궁검가의 남궁현입니다.”

남궁현이 씩씩하게 말했다.

어서 자신에게도 가르쳐 달라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사황의 입에서 몹시도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남궁검가, 배은망덕한 가문이지.”

“······!”

남궁현이 당황하여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서다.

까마득한 과거 남궁검가는 무해노인의 가르침을 받아 자신들의 무학이 가진 결점을 극복하고 우뚝 선 무가였다.

그럼에도 무해노인이 기득권들의 공격을 받을 때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사황이 배은망덕이라고 한 것이었다.

“이제 열두 살에 불과한 아이입니다! 말씀을 가려주십시오!”

화운이 얼른 소리쳤다.

하지만 사황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리니까 제대로 배워야지.”

“어르신!”

“남궁검가가 나쁜 짓을 했다. 넌 어쩔 테냐?”

사황이 묻자 남궁현은 눈을 끔벅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허리를 넙죽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알려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혈채는 목숨으로만 갚을 수 있다.”

사황이 어린 남궁현을 구석으로 몰아갔다.

차가운 기운을 내뿜은 채.

어린 남궁현이 감당하기엔 살벌한 기운이었다.

보다 못한 화운은 남궁현에게로 다가갔다. 그를 데리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남궁현이 검을 뽑았다.

“전 본가를 믿습니다!”

표정이 더욱 싸늘해지는 사황.

입가에 진득한 살소가 피어올랐다.

“현아 무슨 짓이냐!”

화운이 소리치고.

“그래, 그래야 맞겠지. 배은망덕한 것들은······!”

사황이 차갑게 내뱉은 순간.

남궁현이 갑자기 허리를 숙이며 검자루를 사황을 향해 내밀었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자가 장부라고 배웠습니다.”

“······!”

화운은 걸음을 멈추었고, 사황은 말을 맺지 못했다.

사황은 더러운 핏줄답게 어린놈이 얍삽하게 군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살펴보니 작은 몸이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도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흥!”

코웃음을 친 사황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내가 가볼 터이니, 현이를 다독여주거라.”

담대후가 사황의 뒤를 따라가자 화운은 남궁현에게 다가가 그의 검을 잡아 검집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남궁현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괜찮다. 저 노인네가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거다.”

“형.”

“응?”

“본가가 정말 잘못했어?”

“누구든 실수를 한다. 남궁검가의 선대도 그런 실수 하나 쯤은 했겠지. 그러니 넌 걱정하지 말고 숙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뭐든 당당하게 하면 된다. 알았지?”

“나야 늘 당당하지. 근데 나한테는 무공을 안 가르쳐 줄 건가봐. 나도 배우고 싶은데······.”

두려움을 떨쳐낸 남궁현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화운은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걱정 마라. 안 가르쳐주면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정말이지?”

“어.”

“약속한 거다.”

“그래, 약속했다.”

화운이 일부러 웃어주며 약속할 때였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리연이 화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도 무공을 배우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내게도 그 약속을 해주세요.”

예쁜 얼굴에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

화운은 절로 기분이 좋아져 그저 웃음만 나왔다.

***

한여름의 바람이 후끈하게 불어 닥치듯 삼백은 될 것 같은 숫자가 악양 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천사련의 깃발을 앞세우고 있는 무리들이었는데, 선두에는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탄탄한 체구의 노인이 보였다.

요 근래 일만 낭인들을 끌어 모아 낭혈을 결성하여 스스로를 낭왕이라 칭한 동패였다.

“무해곡이 나타났단 말이지?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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