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낭왕 동패
“천자산 일대에서 노는 놈들인데, 그곳의 녹림산채조차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포악한 놈들입니다.”
“숫자는?”
“서른 명쯤 됩니다.”
“너무 적은 거 아냐?”
“맛만 보는 거잖습니까. 발이 빠른 놈들로 두 명을 끼워놓았으니 저들의 전력만 파악하고 빠져나올 겁니다.”
낭왕 동패는 심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해의 정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한복판.
동패는 그곳에 큰 의자를 가져다 두고 자릴 잡고 앉아 있었다.
두 눈은 멀리 무해의 정문을 응시한 채.
주변엔 이미 소문을 퍼트려 놓았다.
무해와는 오랜 혈채가 있어 그걸 갚기 위해 왔노라고.
물론 거짓말이다.
무해의 방대한 무학적 지식을 강탈하기 위해 나름 명분을 만든 것이다.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무해조차 알지 못하는 혈채였다.
무해!
천하의 무공을 아우른다는 그 방대한 지식과 그들의 무학들이 구전으로만 전해졌을 리가 없으니 무공비급들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누구보다 먼저 털어야 한다.
녹림산채와 장강의 수채가 손을 잡고 이곳 근방에 있는 동정호로 향했다고 한다.
태양존자의 귀에도 들어갔다고 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잽싸게 털고 빠져나가야 한다.
‘씨부럴 것들! 천사련을 일구는 데나 집중할 것이지 여긴 왜 와?’
한차례 투덜거린 동패는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은 구환도를 가볍게 두들겼다.
언제나 그랬듯이 손끝에 단단하고 묵직한 감촉이 전해졌다.
혈염도법과 함께 낭왕의 명성을 만들어준 칼이었다.
‘천사련이 사파천하를 이루면 성 하나는 주겠다고 했으니, 어디가 좋을까? 다른 작자들이랑 부딪칠 일이 적은 바닷가로 해야겠어. 절강성이나 강소성이 괜찮겠군.’
낭왕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피의 기다림을 즐겼다.
“두목, 그냥 쳐들어갑시다. 뭘 확인하고 기다리고 그럽니까. 들어가서 쓸어버리고 챙길 것만 챙겨서 나오면 그만인데.”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튀어나오자 동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거신랑, 이 미련한 새끼야! 우리가 도적떼냐? 차후 사파천하의 한자리를 차지할 낭혈이 바로 우리다. 좀 격조 있게 놀자.”
“격조가 뭡니까?”
동패의 뒤에서 철탑처럼 거구의 사내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동패는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여유 좀 가지자고! 강탈을 하더라도 개떼처럼 굴지 말고, 진짜 이리떼처럼 격조 있게 하잔 말이다!”
“개새끼나 이리새끼나······.”
“뭐?”
“아, 아닙니다.”
“주둥이 찢어버리기 전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다가 싸우라고 하면 그때나 나가서 싸워.”
“보고만 있으려니까 갑갑해서 그럽니다.”
“갑갑하지 않게 눈알을 뽑아줄까?”
동패의 목소리가 더욱 차가워지자 거구의 사내가 조개처럼 입을 합 다물었다.
동패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전방에 집중했다.
그런데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무해는 조용하기만 했다.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한 동패는 심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니가 직접 가봐.”
“옛!”
동패의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심복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무해 정문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동패가 지켜보는 가운데 정문 앞에서 안쪽을 기웃거리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반각이 지나기도 전에 다시 밖으로 나왔다.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모습이 어째 며칠 굶은 사람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더 의아한 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들어갔던 서른 명도 줄줄이 밖으로 나왔다.
멀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일단 팔다리가 모두 온전하게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동패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그가 기다리던 광경이 아니었다.
팔다리 한두 개 쯤은 잘려나갔어야 했다. 그래야 대노하여 폭풍처럼 몰아칠 수 있을 테니까.
탁! 탁! 탁!
동패는 손가락 끝으로 구환도를 두들기며 기다렸다.
아직까지는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거리 양쪽에 몰려와 있는 구경꾼들은 낭왕의 기도에 눌려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윽고 심복과 서른 명의 도적들이 동패의 앞에 멈추었다.
동패는 인상을 쓰며 쓱 쓸어봤다.
모두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몸 어디에도 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뭐냐?”
동패가 스산하게 물을 때였다.
그의 심복과 서른 명의 도적들이 좌우로 비켜서며 길을 열었다.
동패는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맨 뒤에 웃는 얼굴로 서 있는 절세미장부를.
푸른색과 하얀색이 잘 어우러져 있는 정갈한 무복을 갖춰 입고, 왼손에는 시커먼 검을 들고 있는 미장부.
바로 화운이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손님이 이토록 반가운 얼굴일 줄이야.”
화운은 정말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패는 무슨 뜻인지 몰라 인상만 썼다.
“어째 몰라볼까. 자신의 비밀을 지키겠답시고 수하들까지 도륙하더니 그날의 기억마저 없애버린 거냐?”
화운이 이죽거렸다.
순간 동패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니놈은······!”
“오호, 완전히 잊어먹은 건 아닌 모양이네.”
“신내림을 받았다며 사기를 치던 놈이로구나!”
동패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살기를 뿜었다.
“맞아. 사기는 아무나 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지.”
화운이 모친 선우비연과 함께 장도에 올랐을 때 하필이면 동패의 일에 엮이고 말았다.
노점에서 만났던 낭인이 마음에 들어 동패를 상대할 비책을 알려주었다가 동패의 추격을 받게 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당시에 동패에게 패한 낭인의 형제들이 달려와 구해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길가에 주검으로 나뒹굴 뻔했다.
“결국 내 손에 죽을 운명이었던 게로구나.”
동패가 구환도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불그스름한 광채가 구환도의 칼날을 휘감기 시작했다. 하수들에겐 공포일 수밖에 없는 강기의 발현이었다. 포악한 살기마저 넘실거렸다.
단칼에 끝장을 내겠다는 심산이 엿보였다.
“하여간 잔인하기는······!”
“쥐새끼! 죽어라!”
화운이 입을 연 순간 강기를 머금은 동패의 구환도가 거침없이 공간을 갈랐다.
번쩍!
붉은 섬광이 화운을 향해 뻗었다.
화운 역시 검을 뽑아 그었다.
새파란 빛이 붉은 섬광을 받아쳤다.
꽈앙!
아찔한 격돌음이 터졌다.
동패는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두 눈을 부릅뜨며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츠아아악!
동패의 구환도가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혈염도의 마지막 초식 용권도참을 펼친 것이다.
화운은 웃으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꽈앙!
귀청을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낭왕이 왼손을 불쑥 뻗었다.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는 회심의 일격이었다.
푸욱!
살을 가르고 파고드는 파육음.
“······!”
동패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큼지막한 돌덩이조차 단박에 부숴버릴 강한 힘을 머금은 그의 손바닥을 뚫고 들어온 검.
“이 치졸한 수법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알 텐데, 쯧쯧!”
알고도 막을 수 없는 수법이기에 회심의 일격으로 삼고 있는 수법이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간단히 당했다는 건 상대가 월등히 강하다는 뜻.
동패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 순간 화운이 검을 뽑았다.
피잇!
검이 빠져나간 손바닥에서 핏물이 뿜어진 순간.
화운의 묵검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찰나 간에 갈랐다.
“·····!”
동패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곧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개를 떨구고 아랫배를 내려다보는 동패.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하단전을 베어버리는 느낌을.
“단, 단전이······!”
“당신과 난 악연이야. 참 많이도 싸웠어. 그러니 이제 그만 끝을 내야지.”
동패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해 줄 마음이 없는 화운은 검을 갈무리 하고는 낭인들을 둘러봤다.
다들 두려운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살려줄 때 그만 가.”
화운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동패는 악의 가득한 얼굴로 노려보며 등을 돌리고 무방비로 걸어가는 화운을 기습할지 말지 망설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뒤에서 우렁찬 일갈이 터져 나왔다.
“지금부터 낭혈의 수장은 나 거신랑이다!”
“뭐?”
동패가 황당하여 돌아본 순간이었다.
거구의 사내가 동패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왜? 불만 있어?”
동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
화운이 돌아오자 사황이 화를 냈다.
“누가 내 일에 끼어들어도 좋다고 했더냐?”
“죄송합니다만, 낭왕은 저와도 악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르신이 기다리는 이들은 저쪽 부류가 아니잖습니까.”
사황이 기다리는 이들은 무해노인을 공격했던 이들과 은혜를 저버리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자들이다.
당시에 무해노인을 공격했던 이들은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칠대문파이고, 수수방관한 이들은 남궁검가와 황보세가였다.
“말 나온 김에 말씀 드리죠. 하오문에 의하면 장강을 타고 이쪽으로 오는 자들도 있고, 이화태양종도 움직이고 있다는데 그자들은 제가 돌려보내겠습니다.”
“터럭만큼이라도 내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곳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참견할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일이 잘못 엮여서 조금 방해가 되었다고 뭘 쓸어버립니까. 그냥 제게 한 소리 하시면 되지.”
“닥쳐라! 수백 년의 업보를 포기하게 만들려면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이다.”
“쓸어버리든 말든 맘대로 하십시오. 다만 이것만 명심하십시오. 제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제 친인들과 평화롭게 사는 거라는 걸. 누구 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생기게 되면 인간 세상이고 뭐고 나도 맘대로 날뛸 겁니다. 그럼 다 죽는 겁니다.”
화운은 신경질적으로 쏟아내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이이!”
사황이 얼굴을 구기며 역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끝내 화운을 불러 세우거나 역정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온 화운은 곧장 몸을 날렸다.
공공무영비를 펼쳐 섬전처럼 쏘아간 화운은 동정호를 지나 장강에 도착했다.
“저들이로군!”
장강 한복판에 세 척의 대형선박과 다섯 척의 중형선박들이 보였다.
화운은 비조처럼 날아가 대형선박의 갑판위로 내려섰다.
정무맹 신풍대주시절에 장강수로왕과 사천독왕을 상대로 한바탕 싸웠던 곳이었다.
지금은 장강수로왕과 녹림왕이 있었다.
“낭왕의 단전을 폐하고 오는 길인데, 두 사람도 그렇게 해 드릴까요?”
장강수로왕과 녹림왕 정도 되는 이들이 말 한 마디에 꼬리를 말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수하들이 잔뜩 보고 있는 곳에서.
그럴 줄 알았는지 화운이 검을 뽑아 들었다.
화-아아악!
선명한 푸른빛의 강환이 검신에 발현되었다.
화운은 검을 옆으로 뻗었다.
쑤아아악!
검환이 날아갔다.
장강의 물을 반쪽으로 가르며 수십 장을 날아가더니 허공으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까마득한 높이로 솟구쳐 사라지더니 어느새 유성처럼 내리꽂혔다.
대형선박은 물론이고 장강까지 뒤집어놓으려던 강환은 화운의 머리위에서 우뚝 멈췄다.
“선박들을 모조리 수장시켜드릴까요?”
장강수로왕과 녹림왕의 얼굴은 검환이 발현된 순간부터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싸울 준비를 했던 병기들은 어느새 허리 뒤로 슬그머니 감춰진 후였다.
자존심이나 체면을 따질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구룡제의 얼굴을 봐서 손을 쓰지 않는 거니까 그냥 돌아가요. 그리고 정파와 함부로 싸우지 말고, 나도 정파니까.”
그렇게 말한 화운은 다시 몸을 날려 섬전처럼 사라졌다.
장강수로왕과 녹림왕은 말 한 마디 해보지도 못하고 선단을 돌려야 했다.
호남성 형산 인근.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아주 커다란 깃발을 선두로 이백 가량의 숫자가 이동하고 있었다.
이화태양종이었다.
쿠-웅!
이화태양종의 행렬 앞으로 뭔가가 유성처럼 떨어졌다.
대지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에 땅거죽이 파도처럼 뒤집혀 이화태양종의 대열을 덮쳤다.
“막아라!”
이화태양종의 십이장로들이 전방으로 튀어나와 거대한 충격파를 막았다.
모두들 힘을 합치고서야 간신히 충격파를 막을 수 있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십이장로 중의 하나가 전방을 향해 외쳤다.
“구룡제께 당신이 함부로 욕심을 부리지 못하도록 막아달라고 했는데, 못 들은 겁니까?”
화운이 태양존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 말에 가마 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태양존자가 두 눈에 이채를 발했다.
“너로구나! 무당검성의 제자라는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