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경천보패
감숙성 천종천마교.
짙은 어둠이 무겁게 깔린 시각.
한 사내가 천종천마교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 위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우뚝 서 있었다.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어 보이는 아주 평범한 용모의 사내였다.
사내가 바라보는 천종천마교는 고즈넉했다.
안락함이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여 이곳이 정녕 악마들의 소굴인 천종천마교인가 싶을 정도였다.
어둠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졌고, 바람마저 점점 잦아들었다.
깊은 밤 평화로운 천종천마교의 정경을 바라보기만 하던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난 니들 때문에 이렇게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니들은 아주 편안하게 자고 있는 것이냐?’
그랬다.
평온해 보이는 천종천마교의 정경에 부아가 치민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화운이었다.
천옥당에게 배운 역용술로 얼굴을 바꾸고, 어떻게 하면 천종천마교에 잠입할 수 있을까 하고 사전답사 차 왔다가 기분이 확 상한 것이다.
“좋아! 어차피 하나씩 죽이다보면 시간이 되돌아가게 만드는 자가 있겠지!”
화운은 성곽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명왕부.
화운이 생각하기에 경천보패를 가졌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명왕이었다.
천마 다음으로 강한 고수는 명왕과 멸제였다.
그러니 그들 두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더 빨리 사황의 경지만큼 강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멸제는 반란을 일으킬 자이니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다.
‘저기로군.’
화운은 명왕부의 위쪽 어둠 속에서 멈춰 섰다.
명왕과는 이미 두 번이나 싸워본 적이 있어서 그의 기도를 알고 있었다.
지금 화운의 발아래 거대한 전각 안쪽에서 명왕의 기도가 느껴졌다.
지금 명왕의 기도는 마치 거대한 악마가 휴식을 취하듯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 세상을 마신한테 바치지 못해 안달하느라 피곤한 모양이지?”
화운의 얼굴에 짜증이 솟구쳤다.
화운은 그 짜증 그대로 검을 뽑아 발아래를 향해 그었다.
새파란 청광이 번뜩이고 나자 거대한 전각이 굉음을 토하며 둘로 쪼개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경할 마기가 벼락같이 솟구쳤다.
화운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콰-앙!
천종천마교를 송두리째 깨우는 굉음이 웅장하게 울려 펴졌다.
그리고 묵빛 장포의 노인이 밤하늘로 솟구쳐 올라왔다.
명왕이었다.
“웬 놈이냐!”
“인간으로 태어나 마신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도 모자라 인간들의 세상을 마신에게 바치려고 한 죄, 목숨으로 사죄해라!”
화운이 검을 휘둘렀다.
상대는 천마파천권을 익힌 명왕.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화운은 자신의 절대검력을 제대로 시험도 할 겸 팔 성의 힘으로 펼쳤다.
번-쩍!
어둠을 가르는 푸르스름한 섬광.
화운의 존재감에 태만할 수 없었던 명왕은 화운이 검을 휘두른 것과 동시에 천마파천권을 펼쳤다.
가경할 마기가 두 주먹에 응집하였다가 시커먼 권의 형상이 되어 불쑥 튀어나갔다.
콰-앙!
명왕이 날린 권강이 터졌다.
놀랍게도 절대검력은 소멸되지 않고 뻗어나가 명왕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끄윽!”
신음을 터트리며 명왕이 날아갔다.
정신이 다 혼미해지려는 중에도 명왕은 천마파천권을 다시 펼쳐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금강부동을 펼친 화운이 더 빨랐다.
번-쩍!
어느새 날아가는 명왕의 바로 위쪽으로 나타나 다시 한 번 절대검력을 휘두르는 화운.
명왕의 육신은 두 쪽으로 분리되어 지상으로 떨어졌다.
“혼백이 육신과 분리된 순간 경천보패가 발동할 터!”
화운은 지상으로 떨어져 혈편이 되어버리는 명왕의 죽음을 지켜봤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경천보패가 발동하지 않은 것이다.
“명왕이 가지고 있던 게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가 가지고 있는 거지?”
화운은 명왕과의 격돌로 난리가 난 천종천마교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허공을 유영했다.
“마존일까? 아니면 멸제?”
멸제의 기운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존의 기운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발아래 어느 곳에 마존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멸제를 먼저 찾았다.
“저긴가?”
화운은 멸천부를 향해 날아갔다.
천종천마교에는 고수가 즐비했다.
하지만 어둠속을 날아가는 화운의 존재를 알아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구천각의 구호법들과 명부전의 십이무상들 그리고 멸제 정도였다.
화운이 멸천부의 밤하늘 위로 도착하자 황금빛 용포를 걸친 멸제가 지붕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대범하구나! 감히 본교에서 난동을 부리다니!”
멸제는 화운이 누굴 죽이고 오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거대한 기의 유동과 요란한 굉음으로 화운이 범상치 않은 상대라고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화운은 멸제 앞쪽의 지붕 위로 내려섰다.
그리고 여전히 부아가 치민 얼굴로 말했다.
“니들 마교가 인간들의 세상에 남아있어도 되는 이유를 말해봐.”
“뭣이?”
“아수라가 그렇게 좋으면 수라도로 가면 되잖아!”
화운은 더 대화를 나눌 것도 없다는 듯 가차 없이 절대검력을 펼쳤다.
이번엔 십성 완성경의 절대검력이었다.
번쩍!
화운의 검이 어둠을 완벽하게 갈랐다.
그러나 새파란 청광도 요란한 파공음도 없었다.
완벽한 무음의 검초.
그저 은은한 달빛이 검신에 반사되었을 뿐이다.
“······!”
화운의 공격에 대항하려던 멸제.
그는 자신이 익히고 있던 천마멸천장을 펼치지도 못하고 육신이 둘로 쪼개져버렸다.
그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다급히 달려오던 구호법들과 십이무상들이 경악하여 우뚝 멈춰버렸다.
지상에 가득한 멸천부의 마인들도 돌처럼 굳은 채 멍청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 정도면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화운은 멀리 천마탑을 돌아봤다.
천마는 손가락질 한 번으로 멸제를 둘로 갈라 버렸었다.
그날의 광경을 다시 떠올려보니 왠지 자신감이 떨어진다.
“아직 안 되려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천마만 죽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는 살생을 할 필요조차 없다. 천종천마교의 마인들은 모조리 하단전만 부숴놓아도 더 이상 아무 짓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한 번 싸워봐?”
화운은 다시 천마탑을 돌아봤다.
멀리 천마탑은 고요히 우뚝 솟아 있었다.
화운은 한참을 응시했다.
하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천마와 싸우기에는 아직 모자라다는 것이었다.
화운은 천마탑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여튼 멸제도 경천보패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고.”
화운이 중얼거리며 멸제의 주검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화운의 눈앞에 보이는 정경이 그리고 화운의 의식이 강력한 힘에 끌려가듯 갑자기 뒤로 확 꺼져버렸다.
경천보패가 발동된 것이다.
***
시간이 되돌아갔다.
화운은 무한을 향해 정신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공공무영비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사미희는 정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화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호북성 무한.
하오문 총단 칠 층.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천옥당이 사황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사황의 발치에는 월영이 피투성이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뉘신지 모르나 본문은······.”
“닥쳐라. 한 마디라도 더 하면 이 자리에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사황의 으름장에 천옥당은 겁에 질려 풍백을 슬쩍 돌아봤다.
풍백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자신들이 상대할 사람이 아니니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사황은 창가를 향해 섰다.
그리고 기다렸다.
대략 반각이 지난 후.
화운이 도착했다.
“문주님!”
사미희가 소리친 순간 천옥당이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사미희가 놀란 눈으로 사황을 힐끔 경계할 때였다.
사황이 화운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뭔 짓을 한 것이냐?”
“명왕이랑 멸제를 죽였습니다. 그 둘은 아니라는 걸 확인했는데 갑자기 법보가 발동되었습니다. 분명 그 자리의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화운은 멸제를 죽인 직후에 보았던 멸천부 근처의 마인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가 발동시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갈 참이냐?”
“가야죠. 물론 이곳의 일을 다시 처리한 다음에요.”
“무슨 일?”
“낭왕이랑 장강수로왕 그리고 태양존자요. 제가 없으면 전부 죽여 버릴 거 아닙니까?”
“그놈들 좀 죽는다고 니놈이랑 뭔 상관이라고?”
“그만큼 죽여 댔으면 이제 사람 죽이는 것도 이골이 날 만도 하잖습니까.”
“내가 누굴 죽였다고 지랄인 것이냐?”
“천하의 절반을 죽였다니까요.”
“그건 지금의 내가 아니잖느냐!”
“어쨌든요. 그리고 그렇게 사시는 거면 마교 놈들이랑 뭐가 다릅니까. 그냥 적당히 화내시고, 적당히 엄포 놓고 그러셔도 되잖습니까. 대신 무해곡의 아이들만큼은 천하의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제가 뭐든 다 해드릴 테니까요.”
“흥!”
사황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게 다다.
더는 역정을 내지도 않았다.
화운은 잠시 더 사황의 눈치를 본 후에 말했다.
“남궁검가주님의 팔은 자르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잘랐느냐!”
“그분이 어떤 마음인지 겪어봐서 아시니 스스로 자르지 않도록 해주실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하시면 그게 또 남궁검가주님께는 마음의 빚이 되어 영감님이랑 무해곡의 애들한테 잘 할 거 아닙니까.”
“흥!”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으셨으니 아시겠지만, 저도 진짜 미친 듯이 난리법석을 떨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게 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제 친인들과 맛 좋은 음식 먹으며 웃으면서 살고 싶어섭니다. 훗날에는 제 자식들이 맘껏 뛰어놀고, 또 그 아래 자식들도 그렇게 늘 웃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싸우고 죽이는 것보다 신나게 뛰어놀고, 욕하고 소리 지르는 것보다 맘껏 웃고 떠드는 게 훨씬 더 좋잖습니까.”
“흥!”
사황이 세 번째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화운은 이제 이 정도면 되었다고 느꼈다.
“천 문주님.”
“예?”
화운이 갑자기 부르자 천옥당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무해곡 인근을 계속 살피십시오. 이제는 혹시라도 모르는 불청객들이 무해곡 쪽으로 접근하는 건 아닌지를 살펴주셔야 합니다. 무해곡의 단 한 사람이라도 다치거나 죽으면 하오문은 물론이고 온 천하가 피바다가 될 겁니다. 바짝 긴장해서 지키라고 해주십시오.”
“그, 그러겠어요.”
천옥당이 사황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화운은 천옥당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낸 후 다시 사황을 돌아봤다.
“이제 그만 가시지요.”
“어딜 말이냐?”
“어디긴 어딥니까, 직접 무해라는 편액을 달았던 곳이지요.”
***
화운은 사황과 함께 악양 남부에 지어놓은 대규모 전각으로 갔다.
사황은 이전처럼 그곳에 머물렀고, 북궁설과 백리명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차갑고 싸늘하기만 했었는데, 약간의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덜 차갑고 조금은 덜 싸늘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린 남궁현을 쥐 잡듯 구석으로 몰았던 일도 하지 않았다.
화운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사황은 이전처럼 무해가 천하로 출도 했음을 공표했다.
역시나 가장 먼저 달려온 건 낭왕이었다.
화운은 낭왕을 날려버리고, 장강으로 가서 장강수로왕과 녹림왕을 되돌려 보낸 다음 태양존자까지 압도적인 무위로 눌러서 돌려보낸 후에야 돌아왔다.
그리고 무해로 돌아와 보니 남궁검가주가 와 있었다.
그의 팔은 잘리지 않은 상태였다.
남궁검가주가 스스로 팔을 자르려는 순간 사황이 검을 부러트려 버렸던 것이다.
화운은 사황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하오문 총단으로 갔다.
그리고 이전의 전철을 따라서 하오문주 천옥당과 함께 사천으로 향했다.
하오문 사천지부와 당문의 일도 이전처럼 정리한 화운은 그제야 천종천마교로 날아갔다.
천종천마교 성곽 위.
화운은 어둠 속에서 천종천마교를 응시했다.
‘경천보패를 가진 자가 어떤 대비를 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법보의 신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모르고 있을 거야. 그러니 일단은 이전처럼 똑같이 일을 벌여보자.’
화운은 성곽을 박차고 명왕부를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