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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91화 (191/207)

#191. 제가 결정합니다

천년소림의 나한당주, 대무당의 우진궁주, 화산파의 매화검주, 아미파의 멸절신니 그리고 점창파의 일양신수.

정도를 떠받치는 열 개의 기둥이라 하여 정도십주라 불리는 고수들 중 다섯 명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이끌고 있는 각파의 제자들까지 합치면 일백이 넘어가는 숫자였다.

“무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는 건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점창파의 일양신수가 걱정이라는 얼굴로 물었다.

그의 시선은 딱히 누구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두루 둘러봤다.

누구든 아는 게 있으면 말해보라는 뜻이다.

“자신감인지 흉계인지는 가봐야 알겠지.”

멸절신니가 칼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을 미워하는 그녀답게 도착하려면 삼 일이나 남았음에도 벌써부터 노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쟁이 벌어지면 신니께선 필히 뒤로 물러나셔야겠습니다.”

“망할 놈! 어째서냐?”

멸절신니의 말이 걸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그녀였고, 가장 나이가 적은 일양신수였지만, 그래서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아니었다.

멸절신니는 일양신수의 됨됨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여 사제처럼 아끼고 있었다.

“서로의 속마음을 드러내려면 때로는 언쟁도 벌이곤 하는 법인데, 신니께선 싸대기부터 날릴 것 같아섭니다.”

“악도들이 흉심을 보이면 싸대기를 날려서라도 징치해야지 그럼 지켜보기만 하라는 것이냐!”

“섣부른 판단을 조심하자는 뜻입니다.”

“무해라는데 무엇이 섣부른 판단이라는 것이냐?”

“아미파에는 무해에 대해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무해노괴가 세상을 현혹하여 무공을 갈망하는 자들을 한 자리로 모은 후 살생대법을 펼쳤다고 했다. 당시에 오대문파가 합심하여 징치하였으나 원흉을 제거하지 못하였으니 후대는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하라고 기록을 남기셨다.”

“아미타불!”

멸절신니의 말에 나한당주가 불호를 외면서 소림 역시 비슷하다는 뜻을 드러냈고, 무당의 우진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화산의 매화검주는 워낙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이라 반응이 없었다.

“점창엔 다르게 기록되어 있더냐?”

멸절신니가 물었다.

일양신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비슷합니다. 정식기록엔 신니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대동소이합니다. 다만 당시의 일을 경험하셨던 선대 중 한 분께서 일기를 남기신 게 있는데, 그 내용이 마음에 걸립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나 일기란 본시 자신의 주관대로 기록하는 것이라 객관적일 수가 없지 않겠소?”

나한당주가 말했다.

일양신수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반대의 의견을 꺼내놓았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만, 때로는 말입니다. 자신의 심경이 담기기 마련이라 정확한 기록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려.”

나한당주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멸절신니가 버럭 소리쳤다.

“그래서 뭐라고 남기셨더냐?”

일양신수는 어렸을 때 조사각에서 우연히 읽게 되었던 일기를 떠올리며 천천히 말해주었다.

-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무해노괴의 흉심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들의 시기심이었을까? 심란한 마음을 가누질 못하겠구나.

일양신수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어느 한 분의 일기만 가지고 다섯 문파의 선대가 남긴 정식 기록을 무시하자는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기사멸조가 아니고 무엇일까!”

화산파의 매화검주가 차갑게 일갈했다.

가라앉았던 모두의 심중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나한당주와 우진궁주가 나직이 불호와 도호를 중얼거리는 중에 멸절신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다스렸다.

“캬악, 퉤!”

걸쭉한 가래침이 장강의 수면 위로 뱉어졌다.

일양신수는 매화검주를 향해 두 손을 잡고 읍했다.

“사형의 심기를 어지럽혔나 봅니다.”

칠대문파끼리는 자신들의 우호를 증대하기 위해 서로 사형제라 칭하기도 했다.

일양신수는 매화검주를 사형이라 칭함으로써 혹시 모를 앙금을 남기지 말자는 뜻을 전한 것이다.

매화검주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장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일양신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때 허공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뭔가가 보였다.

새라고 하기엔 너무 빨랐다.

‘······뭐지?’

***

화운은 산동성을 향해 날아갔다.

칠대문파 중 다섯 개의 문파가 함께 장강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냥 내버려두고 황보세가로 향한 것이다.

황보세가는 산동성의 패자로 제남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황보세가는 세가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여기저기 무인들이 보였지만, 다들 의욕을 잃은 모습들이었다.

화운은 황보세가의 내원을 향해 곧장 내려갔다.

“누, 누구냐!”

“침입자다!”

세가의 정예답게 풀죽어 있던 중에도 화운이 나타나자 빠르게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화운은 경신술을 펼쳐 그들을 지나쳐 내원의 건물 안으로 순식간에 들어가 버렸다.

“헉?”

“자, 잡아라!”

경악하고, 황망하여 말로만 소리칠 뿐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나마 용기 있는 몇몇이 뒤늦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물러가라!”

건물 안에서 황보세가주의 엄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화운을 쫓아 안으로 들어갔던 이들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때 화운은 창가에 실의에 젖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던 황보세가주와 마주하게 되었다.

“내 목숨을 가져가려고 온 거라면 가져가도 좋다만, 나 하나로 끝내주었으면 하는데······ 안 되겠느냐?”

황보세가주는 화운을 처음 봤다.

그가 보기에 화운은 정체불명의 괴한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사내치고는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대단한 무위에 깜짝 놀랐겠지만, 지금의 그는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심정이었던지라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좌절과 절망만을 허탈감과 함께 잔뜩 떠안고 있었다.

“아빠!”

화운의 뒤쪽에서 놀란 음성과 함께 한 소녀가 뛰어 들어왔다.

화운은 돌아보지도 않고 누구일지 알아차렸다.

황보혜!

열한 살의 어린 소녀, 바로 그녀였다.

화운이 황보세가에 기회를 줄 생각을 하게 된 이유였다.

“아!”

화운이 돌아서자 얼굴을 알아본 황보혜가 가슴이 철렁하여 주저앉을 뻔했다.

“놀라지 마라. 해를 끼치려고 온 게 아니니까.”

“······?”

“유성이 녀석이 하도 졸라대서 황보 숙부님과 이야기라도 해보려고 온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화운이 선유유성을 들먹이고, 황보세가주를 숙부님이라 칭하자 그제야 안도하는 황보혜.

그녀는 그래도 불안한 얼굴로 부친의 얼굴을 쳐다봤다.

“걱정 말고 돌아가 있거라. 이야기 하려고 왔다니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아야겠다.”

황보세가주의 말에 황보혜는 다시 한 번 화운을 쳐다본 후 공손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제발 해를 끼치지 말아달라는 간절함이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화운은 일부러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제야 황보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밖으로 나갔다.

화운은 다시 황보세가주와 마주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내 목숨을 거둬가려고 온 게 아니란 말이냐?”

“제 어머님이 선우세가주님의 동생이십니다. 비록 한 다리 건너긴 하지만, 황보세가주님께서는 제게 숙부님 되시잖습니까.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제가 비록 무영천의 천주이긴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화운은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황보세가주는 선우세가 이야기가 나오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무영천의 천주라는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

황보세가주는 화운이 묻는 바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무얼 묻는 것인지 알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전을 폐하고 가둬놓았다. 죽여야 하나 자식이라 그러지 못했다. 온 김에 무영천주인 네가 거둬가거라.”

누군가는 잘못을 하고, 누군가는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잘못을 저지른 자가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끝난다면 좋으련만, 사람의 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황보세가주는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보다 더한 마음의 고통을 감내하며 자식의 하단전을 부쉈을 것이다.

“아드님이 익힌 무공은 마공 중의 마공입니다. 오 성 정도만 익혀도 마기가 골수까지 침범하여 인성을 상실하고 친 혈육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게 만드는 악마의 무공입니다.”

“······.”

황보세가주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운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러한 바를 잘 알기에 아들의 하단전을 손수 부숴 버렸다.

무인으로써의 생명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피와 살을 준 자식이었던 지라 살아 있는 목숨까지는 차마 끊어버리지 못했다.

“다행히 하단전을 폐하셨다고 하니 무공을 잃었어도 인간으로 남을 수는 있을 겁니다.”

화운은 담담히 말했다.

지금 화운의 능력이라면 망가진 하단전을 복구시켜 줄 수도 있었다.

꽤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천지대자연의 기운과 소통할 수 있기에 망가진 몸을 치유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황보장은 마공을 익히고 친부까지 죽인 패륜아였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까지 베풀 자비 따위는 눈곱만큼도 가지지 않았다.

“죽일 것도 아니면 어찌 찾아온 것이냐?”

“황보세가의 오명을 씻어야할 것이 아닙니까?”

“······?”

“이삼 년 내로 큰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천하의 운명이 걸린 대전쟁이 될 것입니다.”

“······!”

“그 전쟁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황보세가의 오명을 씻을 수 있습니다. 숙부님께서는 자식을 잘못 가르쳤을 뿐 천하에 해악을 끼친 게 아니니까요.”

“그런 걸 누가 결정한단 말이냐?”

“제가 결정합니다.”

화운의 오만한 말에 황보세가주는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천하를 움직이고 있는 건 저와 천마입니다. 둘 중 하나는 그 전쟁에서 죽을 겁니다. 제가 살아남는다면 누구도 황보세가의 일을 문제 삼지 않을 것입니다.”

천마가 등장하자 황보세가주는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숙부님, 아들만 자식인 건 아니잖습니까. 하나를 잃으셨지만, 아직 하나가 남았고, 황보세가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모두가 숙부님만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황보세가주의 얼굴이 무겁게 굳어갔다.

화운은 그 얼굴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 숙부님을 만나보십시오. 만나보시면 숙부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 또 하나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화운은 그 말을 끝으로 황보세가주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보니 황보혜가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내원을 지키는 무인들과 황보세가의 고수들도 잔뜩 몰려와 있었다.

화운은 그들을 둘러본 후 황보혜를 향해 웃어주었다.

“혜 매.”

“예?”

“넌 아직 어리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사람과 웃고 떠들기에도 모자랄 때이지. 사람을 좋아하거라. 좋아하고, 아끼고, 베풀고. 그런 마음을 늘 간직하여라. 그러면 오빠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에.”

황보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화운의 말을 따라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엔 숙부님과 함께 웃는 얼굴로 보자.”

화운은 황보혜에게 웃는 얼굴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황보세가주가 창가에서 우두커니 내다보고 있었다.

화운을 따라 부친의 모습을 확인한 황보혜는 잔뜩 졸였던 마음을 놓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잔뜩 몰려와 있던 황보세가의 무인들도 가주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화운은 그 모습을 둘러본 후 천천히 허공으로 부상했다.

그리고는 곧 한 점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보세가에 남은 건 안도와 무거운 고민이었다.

***

호남성 악양.

무해.

화운이 도착했을 땐 서녘 하늘이 황혼으로 붉게 물든 시각이었다.

“······!”

황보세가가 있는 동북방향에서 날아온 화운은 남쪽 정문에서 풍겨오는 지독한 혈향에 잔뜩 인상을 쓰며 그리로 날아갔다.

드넓은 전각군 위를 가로지른 화운은 남문 바깥 거리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보고는 얼굴에서 감정을 지웠다.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이 거리를 따라 자신들이 흘린 핏물 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얼핏 봐도 일백을 훌쩍 뛰어넘는 숫자였다.

그리고 한 사람.

눈 뜨고는 차마 볼 수가 없는 목불인견의 참상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사람.

그는 다름 아닌 사황이었다.

화운은 정문에 몰려나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담대후와 무영투 그리고 북궁설 등에게 눈길 한 번 주고는 사황 앞으로 내려섰다.

사황은 화운이 나타나자 뒷짐을 졌다.

그리고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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