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194화 (194/207)

#194. 그런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광동 구룡성.

구룡대전.

화운이 구룡대전의 출입문 앞에 소리 없이 내려서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기겁하여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곧 지난번에 찾아왔던 화운이라는 걸 기억하고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안에 보고를 하려고 했다.

“들여보내라.”

이번에도 구룡제가 화운이 왔음을 먼저 알아보고는 명령을 내렸다.

구룡대전의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화운은 대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안에는 구룡제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북궁무결이 함께 있었다.

땀으로 후줄근한 모습을 보니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북궁무결을 확인한 화운은 미간부터 찌푸렸다.

‘저 새끼한테도 많이 죽었었지. 뭐, 결국엔 내가 더 많이 죽이긴 했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때가 더 나았던 것 같다.

그땐 이 한 몸 강해지겠다는 일념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지금은 자신도 강해져야 하지만, 다른 이들도 강해져야 하고 천하 무림을 하나로 화합시켜야 한다.

‘젠장! 왜 내가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지?’

이따금씩 화가 나곤 한다.

자신이 뭐라고 이런 막중한 일을 떠안고 있는 것인지.

전생에 대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문제가 있는 것이냐?”

화운이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구룡제가 물었다.

화운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고민을 읽은 것이다.

“예.”

“다치기라도 한 것이냐?”

묻는 구룡제의 얼굴에 분노의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예? 누가 다쳐요?”

“설이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란 말이냐?”

“설 누님은 잘 있는데요? 제 길을 찾아가니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지고 있는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그럼, 그렇게 어두운 얼굴로 본좌를 찾아온 이유가 뭐란 말이냐?”

“아, 제 표정을 읽으신 모양이군요.”

“무슨 일이냐?”

화운은 대답하기 전에 구룡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천하일통조차 관심이 없을 정도로 오만한 사람이지만, 자식에 대한 걱정은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닌 척하지만, 걱정하고 잘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화운은 히죽 웃었다.

“설 누님이 보고 싶으시죠?”

“무슨 헛소리냐?”

“설 누님이랑 무해에 있다는 건 보고 받으셨겠지요?”

“정말 무해곡이 맞느냐?”

“천하 무공을 두루 꿰차고 있다는 무해곡주님께서 설 누님의 무공을 직접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흐음······.”

구룡제가 침음했다.

달가워해야할 일인지 아닌지 천하의 구룡제조차 당혹스러운 것이다.

“칠대문파가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돌려보내고 오는 길입니다.”

“순순히 돌아갔다고?”

“제가 어느 분의 제자인지 잊으셨습니까?”

“무당검성······ 그렇군!”

구룡제는 화운이 무당검성의 제자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그들을 돌려보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그거나 자랑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걱정이 남은 것이냐?”

“두 달 후에 칠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 무해로 오실 겁니다.”

“······?”

“구룡제와 적성대도황 그리고 태양존자께서도 두 달 후에 무해로 오실 거라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거짓말을 사실이 되도록 만들어 달라는 것이냐?”

“그거 아십니까?”

“무얼 말이냐?”

“저랑 잘 통한다는 거요.”

“본좌가 네놈이랑 통한다고?”

“예.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척척 알아들으시잖습니까.”

“멍청한 놈, 그거야 본좌가 상황을 꿰뚫어보는 것이잖느냐!”

“꿰뚫어보실 수 있도록 제가 말을 잘 꺼내놓은 것도 있겠지요.”

“그렇게 말을 잘한다면서 뭐가 걱정인 것이냐? 그 말솜씨로 본좌가 움직이도록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두 달 후에 무해로 오십시오. 설 누님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직접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수련을 마친 후에 볼 것이다.”

“정말 무해곡인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무해곡에는 관심이 없다.”

“무해곡주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광검의 문제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본시 무공은 스스로 단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좌의 걸음을 막고 있던 장애물이 무엇인지 이미 파악했다.”

지난번에 화운이 찾아와서 했던 말이 실마리가 되어 광검에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발생한 문제점을 파악한 것이다.

구룡제는 태사의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았고, 화운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고민을 길게 할 것도 없었다.

무언가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고민할 것이 아닌가.

지금 화운이 구룡제를 움직일 만 한 건 딱 하나뿐이었다.

“무해곡주님께서 천하를 한 자리로 모으라고 하십니다.”

“오만한 자로군.”

“오만할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감히 본좌를 오라 가라 할 정도란 말이냐!”

구룡제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분노한 것이리라.

하지만 화운은 그 분노의 불덩이에 더욱 기름을 쏟아 부었다.

“구룡제이신 어르신을 오라고 부를 자격이 있으신 분입니다.”

“······!”

구룡제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분노를 억누른 시선으로 화운을 응시했다.

감히 자신 앞에서 대놓고 말한다는 건 그만 한 이유가 있을 터.

“그의 정체가 무엇이냐?”

“그날 직접 만나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제겐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껏 그자의 명을 듣고 있었더냐?”

구룡제는 분노 위로 의구심이 떠올랐다.

누가 감히 무당검성의 제자를 수족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명을 내리고 따르는 사이는 아닙니다. 무해곡을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만든 건 접니다. 누님을 비롯해서 기재들을 강하게 만들려면 무해곡주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거든요. 그 때문에 도움을 계속 받자니 그분이 원하는 걸 들어주는 수밖에요.”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되었다.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거짓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다.

구룡제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말간 눈으로 화운을 응시했다.

이제 구룡제에게 남은 건 하나다.

무해곡주의 또 다른 정체가 무엇이냐는 궁금증이다.

감히 자신을 오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만한 명성을 떨쳤거나 그만한 신위를 가진 자일 터.

‘아니면 둘 다 이거나!’

구룡제는 결정을 내렸다.

“좋다. 가겠다. 감히 본좌를 부를 정도로 자격이 있는 자인지 직접 확인하겠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면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도 모르고 감히 말을 꺼냈겠습니까.”

화운이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구룡제가 참석하겠다고 하였으니 기쁜 것이다.

구룡제는 더욱 궁금해져 미간만 더 깊게 찌푸렸다.

“도움을 받았으니 저도 도움을 드리는 게 도리겠지요.”

화운인 기분 좋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북궁무결이 서 있었다.

하늘같은 부친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는 화운의 모습에 당황과 시기질투를 일으키고 있는 얼굴이었는데, 화운이 자신을 돌아보자 오만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화운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눈을 마주치자마자 화운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는 그의 위치를 감지하기도 전에 강력한 충격이 후두부를 강타했다.

뻑!

“······!”

상체를 휘청거리는 북궁무결.

그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자신이 한 대 맞았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검을 뽑았다.

뻑!

다시 휘청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마는 북궁무결.

두 번째 주먹질에 머릿속이 흔들려 서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훌륭하신 부친을 만난 덕분에 그만큼 강해졌으면 감사할 일이지. 네 강함을 과시할 일이 없다고 어디서 불만질이냐!”

“······?”

“미치도록 싸우고 싶으면 차라리 천종천마교로 쳐들어가라. 네 영혼이 탈탈 털릴 때까지 아주 원 없이 싸울 수 있을 거다.”

북궁무결이 정사대전을 일으키고자 오대세가를 무참히 죽였던 음모를 떠올리며 분기를 터트린 화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북궁무결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직 그의 강함이 충분치 않아 평화로운 세상에 불만을 가지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알아들었으면 함부로 나댈 생각하지 말고 무공 수련에나 집중해.”

충고를 한 화운은 구룡제를 향해 섰다.

“지금 막 든 생각입니다만, 적성대도황과 태양존자 그 두 분을 움직이는 건 구룡제께서 해주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분들이랑은 설 누님 같은 접합점이 없어서 대면하는 것부터가 거북합니다.”

얼굴 보는 게 뭐 거북하겠는가.

말로서 설명하고 설득하여 그들이 움직이게 만드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그렇게 해주겠다.”

다행히 구룡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룡제 입장에서는 자식을 팬 화운의 행동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러나 일순간 공간속으로 사라진 화운이 보여준 신법은 구룡제가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한 차원 높은 경지를 본 것 같았다.

게다가 오만하기만 하던 자식의 콧대를 꺾어주었으니 무공에 집념할 계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정확한 날짜는 하오문을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두 달 후에 뵙겠습니다.”

화운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구룡제를 움직이는 일이 잘 해결되었다.

궁금하면 만나보면 되지 거기에 얄팍한 계산을 하고 자존심을 세우고 그러지 않는 구룡제의 성격 덕분이었다.

구룡대전에서 물러나온 화운은 곧장 호남성으로 향했다.

***

호남성 악양.

무해.

무해의 일상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오문 총단에서 화운에게 난제를 떠넘긴 사황은 그 길로 무해로 와서 이전처럼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황은 화운이 얼굴을 보였음에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천하를 모으라고 했으니 모이는지만 두고 보겠다는 것 같았다.

‘대체 뭘 바라시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화운은 사황만 생각하면 혼란스러웠다.

무해곡주로서 원한을 푸는 건 이해가 간다.

물론 경천보패를 다시 손에 넣어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되었기에 사황을 막지 않은 것이지 무해곡의 원한을 이해하기에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다.

한차례 피바람을 일으킨 사황은 천하를 하나로 모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무해곡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겠다고 했다.

그 의도가 뭘까?

사황이 또다시 혈풍을 일으키면 화운 자신이 시간을 되돌릴 거라는 걸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그렇게 하라는 이유가 뭘까?

이미 한 번 겪어보았으니 칠대문파와 대면하게 되면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무해곡주가 사황 자신이라는 것과 천마가 획책하고 있는 아수라 마신의 강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최 알 수가 없다.

하기야 이백 년 가까이 산 노괴의 시커먼 속마음을 어찌 읽을 수 있겠는가?

화운은 생각하던 것을 멈췄다.

‘두 달 후면 알 게 되겠지 뭐.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때 가서 고민하자.’

화운은 거기서 생각을 털어 버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쏟아지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들어가도 되냐?”

“예.”

문이 열리고 백리명과 담명이 들어왔다.

“뭐하냐?”

“그냥 비 구경합니다. 오늘은 수련이 없습니까?”

화운이 돌아보며 물었다.

“어. 비 온다고 쉬라고 하시더라.”

“그래요. 비 오면 쉬기도 하고 그래야죠. 한 번뿐인 인생인데 즐겁게 살아야죠.”

“어째 가시가 돋아 있는 느낌이다?”

“아, 그런 거 아닙니다. 진심이에요. 쉴 땐 쉬고, 놀 땐 놀고, 수련할 땐 또 미친 듯이 수련하고. 그렇게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행이고.”

고개를 끄덕인 백리명이 담명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담명이 말했다.

“술이나 한잔하자.”

“술?”

“다 같이 모여서 술 한잔한 적도 없었잖아.”

어른들도 없고 해서 담명은 말을 편하게 했고, 화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랬나?”

“함께 싸워야 할 전우이고, 일생을 함께 보내야 할 지기들인데, 모처럼 한가할 때를 놓치지 말자는 거야.”

“그래, 좋은 생각이다. 술은 내가 살게.”

화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백리명이 말했다.

“다들 모여 있고 준비도 다 해놨으니까 넌 몸만 가면 돼.”

“오! 아주 기특한데요?”

“야, 그래도 형님인데 기특이 뭐냐?”

“오홍, 대접받고 싶으시구나? 원하신다면야······.”

“아니, 아니다. 대접한답시고 노인네 취급할 것 같다. 그냥 맘대로 대해라. 이놈 저놈만 하지 마라.”

“좋은 분이라 편해서 실수했습니다.”

화운이 웃으며 말하자 백리명도 씩 웃어주었다.

“얼른 가자. 설 누님이 눈 빠지게 기다리겠다.”

“설 누님이요?”

“그래. 술 한잔하자니까 싫다더니 너도 올 거라니까 얼굴 표정 한 번 안 바꾸고 얼른 가자는 거 있지? 그 모습에 여기 내 심장에 상처 받았잖아!”

백리명이 가슴을 가리키며 울상을 지었다.

“그럼 형님은 포기하시는 겁니까?”

담명이 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섰다.

“절대! 절대 안 될 말이다! 얼른 가자!”

백리명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성큼성큼 앞장을 섰다.

술자리는 주방이 있는 건물 이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북궁설과 백리연 그리고 선우유성과 남궁현까지 전부 모여 있었다.

“형! 얼른 와!”

화운이 두 사람과 함께 입구에 나타나자 선우유성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어색함이 제법 없어진 모습이었다.

“이야, 거하게 차려놨네.”

화운이 선우유성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옆자리에 앉았다.

두 개의 식탁을 붙여놓은 자리에 열 명이 먹어도 충분할 것 같은 요리가 잔뜩 차려져 있었다.

“나랑 명이가 주방숙수께 부탁드려서 준비한 거다.”

백리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준비했어야 할 자린데.”

“왜 너야? 이 형님이 준비하는 게 맞지.”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러네요.”

“내가 형이야, 형. 잊지 마.”

“옙!”

“좋아! 자, 다들 앉자. 누님, 술 한 잔 받으십시오.”

백리명이 분위기를 이끌어가며 화운과 북궁설 그리고 담명에게는 술을 따라주었다.

“우린?”

백리연이 뾰로통한 얼굴로 쳐다봤다.

“너랑 얘네 둘은 아직 어리잖아.”

백리명이 선우유성과 남궁현까지 쓱 쓸어보며 말했다.

“어려도 입은 있어.”

“입은 있어도 어려.”

“어른들이 보시면 오라버니도 어려.”

“그래도 너보단 많아.”

백리명이 완강하게 나오자 백리연은 화운을 바라봤다.

자신에게도 한 잔 달라는 얼굴로.

“형님.”

“안 돼. 네가 아무리 좋아해도 아직은 내 동생이야. 절대 안 돼.”

백리명이 더욱 완강하게 굴었다.

화운이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백리연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백리명.”

“예, 누님!”

“어렸을 땐 여자가 남자보다 성장이 더 빠르다는 걸 알아?”

“예. 알고 있습니다.”

“연이랑 운이랑 한 살 차이지 아마?”

백리명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눈만 끔벅거리다 백리연을 향해 술병을 내밀었다.

“받아라. 대신 딱 한 잔 만이다.”

“마셔보고.”

백리명은 인상을 쓰다가 마지못해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선우유성과 남궁현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너흰 절대 안 돼!”

“안 마실 건데요?”

“맛없어서 싫어요.”

남궁현의 말에 모두들 그를 바라봤다.

“마셔봤냐?”

왜 자신을 바라보는지 모르고 있던 남궁현은 백리명의 물음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실실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혀만 담가본 적이 있어요.”

“장하다! 잘하면 남궁검가에 술꾼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

“헤헤헤!”

“녀석!”

남궁현에게 웃어 보인 백리명은 모두를 둘러보며 술잔을 쳐들었다.

“자, 옛 성현들께서는 술 한 잔만 있으면 밤과 낮이 바뀌어도 즐겁다고 하셨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만, 여튼 좋다는 걸 거다. 많이 먹고, 즐겁게 마셔보자. 캬!”

한 마디 하고는 앞장서듯 술잔을 입에 털어 넣는 백리명.

그 모습에 다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화운은 술을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즐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주는 술만 받아마셨다.

반 시진쯤 잡담을 하며 먹고 마시다 보니 식탁 위가 휑뎅그렁해졌다.

걸귀들이 모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많던 요리들이 전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들 술도 제법 마셔서 얼굴들이 불그스레했다.

백리연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다섯 잔 만에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리 독한 술이 아니었음에도 처음 마셔서 그러는 모양인지 눈도 살짝 풀린 것 같았다.

“궁금한 게 있어요.”

백리연이 화운을 향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행동은 살짝 취한 모습인데 말은 용케도 또박또박 했다.

“뭔데?”

“시간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그렇게 힘겹게 지냈잖아요.”

“그래.”

“가장 힘들 땐 언제였어요?”

백리연의 물음에 화운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유성이가 죽었을 때, 네가 걷지 못할 정도로 다리를 다쳤을 때 그리고 현이 녀석이 모두가 죽었다면서 나한테 대들었을 때.”

선우유성과 남궁현은 기억에도 없는 일이지만, 왠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백리명과 담명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다리 때문에 힘들었다고요?”

백리연이 살짝 풀어진 눈에 힘을 주며 물었다.

“나 때문이었으니까.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다쳤으니까.”

“그만큼 좋아했어요?”

술기운 때문인지 다들 있는 자리임에도 송곳으로 찌르듯 대차게 물어오는 백리연.

화운은 살짝 흐트러진 모습이 귀엽게 보이는 백리연을 빤히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어. 너무 좋아해서 다리를 다친 게 정말 가슴 아팠다.”

“좋아요.”

백리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탁자를 짚은 채 화운을 향해 얼굴을 잔뜩 들이밀며 말했다.

“아주 잘했어요. 난 솔직한 게 좋거든요. 음······ 좋아요. 사실대로 대답해주었으니까 나도 사실을 한 가지 말해줄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창가로 걸어가는 백리연.

멀쩡하게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걷는 모습이 살짝 휘청거렸다.

“보슬비처럼 매일매일 다가오겠다고 했잖아요. 근데 지금은요.”

말을 멈춘 백리연이 창문을 와락 열어젖혔다.

비바람이 안으로 들이치며 백리연을 흠뻑 적셨다.

“무슨 짓이야!”

백리명이 소리치며 다가가려다 우뚝 멈췄다.

어느새 화운이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다.

창문을 닫은 화운이 백리연을 돌아보니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봐요. 보세요.”

“······!”

“전요. 이미 이만큼 젖어버렸어요.”

중얼거리듯 말하며 배시시 웃는 백리연.

그녀의 옷은 장대비에 흠뻑 젖어버린 상태였다.

화운은 말없이 내려다봤고, 백리연은 술기운이 더욱 차오른 눈으로 빤히 쳐다봤다.

잠깐 동안 두 사람 만의 감정이 두 눈을 통해 전해졌다.

모두들 숨조차 죽인 채 두 사람을 지켜봤다.

“가장 좋았을 때는요, 그땐 언제였어요?”

묻는 백리연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너의 검무를 보고 또 볼 때다.

너랑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다.

네가 신풍대로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 운연검을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너의 손을 잡았을 때다.

너랑 함께 있을 땐 늘 즐거웠다. 그리고 가장 좋았다.

화운은 그 말들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말들은 백리연만 듣게 하고 싶었다.

단 둘만 있을 때 속삭여주고 싶었다.

“아직······ 아직이다. 그런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백리연은 더는 묻지 않았다.

화운의 두 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가 술기운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한 번 젓더니 말했다.

“잘래요. 데려다줘요.”

“그래.”

화운은 백리연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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