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천마지존
비가 쏟아지고 바람마저 세차게 부니 제법 쌀쌀했다.
화운은 백리연을 안고 가며 공력을 일으켰다. 강기의 막을 만들어 차가운 기운을 막은 것이다.
화운에게 안겨 빤히 쳐다보던 백리연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화운은 안고 있던 백리연을 내려다봤다.
아직은 작고 여린 소녀였다. 넘치도록 아름답지만, 스무 살 즈음의 그녀가 그리울 때가 종종 있었다.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 그녀와 함께 했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이것도 집착일까?’
지금 자신이 안고 있는 귀여움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진 소녀 역시 그녀였다.
게다가 더 이상은 스무 살 즈음의 그녀를 만날 순 없다.
그러니 지금의 그녀만을 보아야 한다.
알면서도 스무 살 즈음의 그녀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마치 둘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자꾸만 그녀가 그리워지곤 했다.
백리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간 화운은 품에 안고 있던 그녀를 다시 내려다봤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곤하게 자고 있는 그녀를 잠시 들여다보던 화운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따스한 내력을 발휘하여 그녀의 젖은 옷을 천천히 말려주었다.
한참동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축축했던 것이 사라지자 몸을 뒤척이던 백리연은 더욱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었다.
화운은 이불을 덮어준 후 창문이 단단히 잠겼는지 확인한 다음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많이 좋아했어?”
밖에 북궁설이 따라와 있었다.
백리연의 옷을 갈아입혀 주어야겠다며 자리를 뜬 그녀였다.
“누님은 제가 겪은 이야기를 들은 적 없죠?”
“아까 연이가 말하던 거?”
“예.”
화운은 북궁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백리연과의 만남, 신풍대가 되어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이야기, 자신이 보살피지 못해 다리를 잃게 되었던 일 등을 중점적으로 말했다.
마치 꿈같았던 그녀와의 일들을 잊지 않으려고 하나하나 되새기듯이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북궁설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백리연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화운을 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보였던 것이다.
“운.”
“예?”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건 아무 의미 없다. 가까이서 웃어주고, 말 한 마디 건네주고······ 잘해줘라.”
남녀 간의 일에 무신경했던 북궁설이었기에 해줄 말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른 말을 더 해줄 필요도 없이 술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연이는?”
백리명이 다소 초조함이 느껴지는 얼굴로 물었다.
“잠들었습니다.”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지? 어딜 만진다거나 훔쳐본다거나······!”
“형님.”
“어?”
“설 누님, 많이 좋아하시죠?”
“어, 무지막지하게 좋아한다. 그건 왜?”
“설 누님을 보면 그런 짓 하고 싶습니까?”
“야, 날 뭘로 보고! 내가 누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딴 생각을 하겠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환장할 정도로 좋은데!”
“저 역시 그렇습니다.”
“······!”
백리명은 빙그레 웃는 화운을 보고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겸연쩍은 듯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하다.”
“아뇨, 이해합니다. 연이는 아직 어리잖아요.”
“내 말이 바로 그거다.”
다시 한번 어색하게 웃은 백리명은 자리로 돌아갔다.
화운이 술자리를 둘러보니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보이지가 않았다.
“두 녀석은?”
“자러 갔어.”
담명이 대답했다.
그 역시 제법 취기가 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럽다. 하아, 난 언제쯤 누님이랑 알콩달콩 사랑을 해보냐?”
담명이 한숨과 함께 말하며 북궁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북궁설은 홀로 자작하며 툭 내뱉었다.
“꿈도 꾸지 마.”
“예, 누님. 예?”
무심결에 대답했다가 화들짝 놀란 듯 쳐다보는 담명.
그는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해내고는 시무룩해졌다.
“으허헝! 열다섯 살이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한 시련이야!”
담명이 우는 척을 하며 북궁설을 훔쳐봤다.
북궁설은 야박하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때였다.
백리명이 갑자기 물었다.
“누님, 우리 솔직히 말해보죠. 누님도 언젠간 사랑을 할 거고, 가족을 이루고 아이도 낳고 싶을 거 아닙니까?”
북궁설은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짧게 말했다.
“언젠간 그럴 거야.”
“좋아! 결정했다!”
북궁설이 대답하자마자 백리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더니 북궁설을 바라보는 얼굴에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열다섯에서 스무 살 사이에 자신의 짝을 만나 불타는 사랑을 하고, 그렇게 삼십 년을 함께 보내고 나면 늙어서는 삶을 정리할 기력밖에 남지 않는다고 해.”
어느 서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들고 난 백리명은 담명과 화운을 둘러보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 백리명은 앞으로 삼십 년 동안 설 누님만 쳐다볼 거고, 어느 놈이건 누님 곁에서 집적거리는 놈이 있으면 모조리 날려 버릴 거다.”
“예에?”
담명이 놀란 표정을 짓자 백리명이 히죽 웃었다.
“곁에 사내라고는 나밖에 없으면 누님도 어쩔 수 없을 거 아냐! 크핫하하하!”
백리명이 평생의 숙원을 푼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 모습에 담명은 어깨를 늘어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이건 그릇이 달라! 패기가 다른 건가! 여튼 뭐······ 졌다!’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 넣은 담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러 갈랍니다.”
“뭐, 벌써? 더 마실 수 있잖아!”
“형님이나 많이 마시십시오. 누님이랑.”
백리명은 다시 붙잡으려다 담명의 마지막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잘 자라.”
“그럴 수 있다면요.”
담명이 자리를 뜨자 화운도 일어났다.
“너도 가려고?”
“생각할 게 있어서요.”
백리명은 두 사람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는 걸 알았기에 더는 붙잡지 않았다.
화운이 밖으로 나가보니 저만치에서 담명이 우두커니 쪼그리고 앉아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냐?”
“응?”
“괜찮냐고?”
“아, 처량해 보여?”
“어.”
“그런 거 아닌데.”
“뭐가 아닌데?”
“누님 때문이 아니라고.”
“······?”
“내가 누님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목숨 걸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내 여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야. 나 이제 열다섯 살이다.”
“그래, 우리도 아직 어리지.”
화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명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정말 좋아하지만 백리명처럼 인생을 걸고 좋아할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아직 어린 것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나보다 생각이 깊은 것 같다.”
화운의 말에 담명이 돌아봤다.
“내가?”
“어. 난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데, 너는 두루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럼 깊다가 아니라 넓다고 해야지.”
“알아들었으면 됐지 뭘 따져?”
“따지는 게 아니라······ 뭐, 여튼 고맙다.”
갑자기 고맙다고 하는 담명.
화운은 의아하여 돌아봤다.
“너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잖아.”
“난 또 뭐라고. 스승님 덕분이야. 스승님 덕분에 그만큼 강해져서 그 지옥 같은 시간의 반복 속에서도 내가 원하는 길을 갈 수가 있었다.”
“운아.”
“어?”
“난 지금이 정말 좋다. 수련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정말 즐거워. 설 누님을 포기하게 되었지만, 그 아쉬움마저도 즐겁게 느껴질 정도야. 그 모든 게 다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고, 모두와 함께 하는 순간들, 너랑 있는 이 순간까지도 정말 좋아. 근데 이 행복이 어느 순간 갑자기 끝나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어. 저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에 있는 어둠 속으로 혼자 내동댕이쳐지는 건 아닌지 하는 두려움, 어쩌면 지금의 이 즐거운 삶이 원래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 때가 있어.”
뻑!
담명이 처연하게 중얼거리자 화운이 갑자기 주먹을 뻗었다.
옆머리를 맞은 담명은 머리가 먼저 기울었고, 이어서 상체가 기우뚱거렸다.
골이 뒤흔들린 탓에 잠깐 멍해졌다.
“아프냐?”
“······!”
“네가 아픈 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고, 저 어둠에 처박히는 게 두렵다고?”
화운이 손을 뻗자 새파란 강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커다란 용의 형상을 만들더니 빗줄기를 뚫고 어둠속으로 천천히 날아갔다.
새파란 청룡의 빛에 어둠이 밀려났다.
“보이냐? 어둠이고 지랄이고 날려버릴 게.”
담명은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새파란 강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운은 그런 담명을 보며 말했다.
“네 뒤엔 언제나 스승님이 계시고, 네 옆엔 내가 있다. 그것만 잊지 마. 그럼 세상에 두려워 할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의형강기! 멋지다!”
담명이 벌떡 일어나 탄성을 터트렸다.
“어이! 감탄하라고 보여준 게 아니잖아!”
“난 용보다 범이 좋더라. 범으로도 만들 수 있냐?”
“그게 아니라고!”
“일단 해봐, 좀 보자! 나도 의형강기 수준이 되면 꼭 범을 만들 거다.”
모처럼 아이처럼 신나하는 담명의 모습에 화운은 강기를 거둬들였다가 다시 발휘했다.
이번엔 새파란 호랑이의 모습이었다.
강기로 만들어진 범이 숲속을 어슬렁거리듯 빗속을 거닐었다.
“역시 범이 더 멋지다!”
담명이 더욱 신이 나서 소리쳤다.
***
천종천마교.
멸천부.
멸제는 태사의에 앉아 자신의 앞에 늘어서 있는 이들을 오만하게 응시했다.
구호법 중 다섯 명과 교의 율법을 관장하는 북명우사.
혈패와 천악을 비롯한 일곱 명의 무상들.
그 아래로 십여 명의 삼십육대마들.
이 자리에 오지는 않았으나 칠십이살마 중 사십 명이 충성을 맹세했다.
이 정도 진용이면 교가 가진 무력의 절반을 넘어선다.
명왕이 얼마나 포섭했는지는 모르지만, 남은 자들을 모조리 긁어모아도 상대가 안 된다.
멸제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가 애썼네.”
멸제의 말에 가장 앞에 서 있던 마존이 두 손을 잡아 읍했다.
“사형께서 만인지상의 좌에 오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앞을 보게.”
마존이 돌아서서는 좌중을 바라봤다.
멸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 천군만마와 같은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저들이 믿고 따르는 한 본좌는 이미 만인지상의 좌에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라네.”
마존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빙글 돌아선 마존은 멸제를 향해 다시 한 번 읍했다.
“감축드립니다.”
마존의 뒤를 따라 좌중들이 일제히 읍했다.
“감축드립니다!”
쩌렁 울리는 전장의 함성과 같은 외침에 멸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가슴을 활짝 펴고 말했다.
“나 멸제의 이름으로 오늘은 마도일통을 이룰 것이고, 내일은 천하군림을 할 것이다!”
멸제의 광오한 외침에 마존이 가장 먼저 허리를 조아렸다.
“멸제지존! 천하군림!”
“멸제지존! 천하군림!”
마존의 선창을 따라 좌중들이 격앙된 모습으로 후창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끄그그그그긍!
육중한 대전의 출입문이 열렸다.
한참 불타오르던 열기를 방해하는 소리였다.
모두들 인상을 쓰며 돌아본 순간.
묵빛 장포의 노인이 대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좌중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명, 명왕께서······.”
누군가의 억눌린 침음성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안으로 들어선 명왕이 한쪽으로 물러나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대전의 출입문을 넘어서는 짙은 흑발의 사내.
새하얀 피부에 반듯한 이목구비가 오만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사내는 놀랍게도 명왕의 공손한 대우를 받으며 대전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들 명왕과 흑발의 사내를 번갈아봤다.
아홉 마리의 용이 수놓인 짙은 묵빛의 구룡포.
흑발의 사내가 걸친 장포였다.
그 장포를 목도한 사람들은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천마의 상징과도 같은 천마지존포였기 때문이었다.
“천, 천마지존······!”
누군가 억눌린 침음을 흘렸다.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두의 심중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물살 갈라지듯 좌우로 벌려서는 좌중들.
짙은 흑발의 사내는 그들 사이를 지나 대전을 가로질렀다.
대전 안쪽의 멸제를 향해서.
“감히 교주님의 흉내를 내는 것이냐!”
누군가는 확인을 해야 했고, 멸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무상 천악이 폭풍 같은 살기를 일으키며 나섰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확인해 주지 못한 채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 되었다.
붉은 피가 허공으로 뿌려졌다.
그리고 몸에서 분리된 천악의 머리통이 땅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흥!”
차가운 코웃음과 함께 멸제의 신형이 불쑥 쏘아져왔다.
왼손은 뒷짐을 져 강자의 여유를.
오른손은 천마멸천장을 펼쳐 지배자의 위엄을 발휘했다.
흑발의 사내는 멸제의 천마멸천장이 코앞으로 불쑥 닥쳐오자 가볍게 왼손을 들어 마주쳤다.
쾅!
강렬한 충격파가 대전을 폭풍처럼 휩쓰는 가운데 한 사람이 뒤로 날아갔다.
태사의를 부수고 안쪽 벽에 꼴사납게 처박혀 버린 이는 다름 아닌 멸제였다.
천종천마교의 지존임을 자처하려던 자가 일격조차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모두들 경악하여 감히 상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가운데 흑발의 사내는 처음의 걸음 그대로 안쪽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태사의가 있던 자리에 서서는 천천히 돌아섰다.
바로 이때 바람처럼 달려온 명왕이 흑발의 사내 앞에 부복하며 쩌렁 외쳤다.
“지존이시다, 꿇어라!”
천마지존의 강림!
누가 감히 의심하랴!
“지, 지존이시여!”
“마도일세! 천마앙복!”
반란을 획책하던 천종천마교의 최고수들이 일제히 엎드렸다.
그리고 그 앞에.
흑발의 사내, 천마는 무심한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화운이 알지 못하는 이전에 없었던 천마의 새로운 행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