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진짜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오?
화운이 천마탑에 들어온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강시당 지하에서 수많은 흑귀들을 보고는 손자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검마가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택했을 때였다.
화운은 그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했다.
그 분노 그대로 허공에서 천마탑을 부수고 난입했었다.
바로 그때 안 사실인데, 천마탑 내부는 각 층의 구별이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계단만이 지상과 지하를 잇고 있을 뿐이었다.
화운은 혼마의 뒤를 따라 까마득한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은 유마정이 있는 지하공간까지 곧장 이어져 있었다.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선 혼마는 걸음을 멈추고 화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군의 존안을 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고······!”
혼마는 말을 맺지도 못했다.
십여 보 떨어진 곳에서 화운이 주먹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계한 순간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고는 그대로 혼절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집 지키는 개일지라도 적당히 짖을 줄 알아야지. 늙은이처럼 그렇게 막 짖으면 되나!”
바닥에 털썩 쓰러진 혼마에게 한마디한 화운은 지하공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참 앞에 천마가 있음을 안다.
유마정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다.
화운은 유마정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
검은 흑발의 청년.
유마정 위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천마의 모습은 신비하다 못해 무척 기괴해 보였다.
지하공간의 배경과 신경을 섬뜩하게 자극하는 마기 그리고 칠흑처럼 새까만 흑발이 어울려 거북스런 느낌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운은 이십 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서로가 마음이 움직인 순간 상대의 목숨을 끝내 버릴 간격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먼저 말한 건 천마다.
천하에서 가장 오만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화운은 그것만으로도 의아함이 느껴졌다.
“내가 이곳으로 반드시 쳐들어올 것처럼 말하는군.”
“알면서도 의심하는 건 그만큼 완성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너에게 주어진 운명에 맞설 자신이 있을 때 다시 와라.”
“운명?”
“달리 무엇일까?”
“마치 내 운명을 아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이 세상은 파국을 향하고 있지.”
“그거야 당신의 바람이고.”
“우리들의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겠소. 그게 뭐요?”
“시간이다.”
“시간이라고?”
“그렇다. 시간이야 말로 우리들의 싸움을 결정지을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렇다면 경천보패를 손에 쥔 내가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쥔 셈이로군.”
“그 법보로 인한 시간의 반복은 역천의 자리에 선 자들에겐 그 시간만큼 조력해 줄 뿐이다.”
“······!”
잊고 있었다.
무당검성이 알려주었거늘.
시간의 반복은 역천의 존재에게 힘을 줄 뿐이라는 걸.
“그럼 경천보패를 굳이 내게 준 이유가 무엇이오?”
“그 법보가 널 운명으로 이끌 테니까.”
“······?”
말하는 걸 보니 경천보패를 사연홍에게 준 건 결국 화운에게 주기 위해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경천보패를 손에 쥐게 되면 그 운명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흠, 난 결국 이리 올 수밖에 없고 결국 유마정이 부서질 수밖에 없다는 거요?”
“그것이 운명이다.”
“그럼 그 운명을 거부하겠소. 난 이리 오지 않을 거고, 당신 따위는 그냥 잊어버리고 오손도손 살겠소.”
“그렇게 하지 못해서 와 본 것이 아니더냐?”
“당신이 수상한 짓을 한 대서 와 본 것일 뿐이오. 난 이만 돌아갈 거고, 다신 오지 않을 테니까 유마정이 부서질 거라는 기대 따위는 그만 접고 지옥이나 가시오.”
화운이 돌아섰다.
천마는 잡지도 않았고, 입조차 열지 않았다.
몇 걸음 걷던 화운은 문득 생각이 나서 걸음을 멈췄다.
“대체 왜 그러고 사는 거요? 마신 아수라 따위가 대체 뭐라고 그렇게 굽실거리는 거요?”
“운명이다.”
“또 운명?”
“본좌에게 주어진 운명이니까. 그걸 따를 뿐이다.”
“마신 아수라의 개가 되는 게 운명이랍시고 따르겠다고? 장하오. 정말 대단하시오!”
화운이 비웃었다.
천마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수라의 개가 되기로 작심한 거 이왕이면 개떼가 낫겠다 싶어서 명왕을 지키고 멸제를 살려준 거요?”
화운은 갑자기 찌르듯 물었다.
그러나 천마는 대꾸하지 않았다.
화운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경천보패를 꺼내 던져주었다.
“이거 그냥 가져가시오.”
허공을 날아간 경천보패는 천마의 바로 앞에서 우뚝 멈췄다.
천마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 본좌가 경천보패를 발동시키면 일각 전으로 돌아갈 거고 그땐 너의 품에 있는 시각이지.”
“이런 들통이 났군. 하여간 노인네들을 속이는 건 정말 어렵다니까.”
화운이 투덜거렸다.
경천보패는 허공을 날아와 화운의 손에 잡혔다.
그때까지 천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경천보패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화운은 그 모습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리다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유마정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더 강해져서 이리로 올 거요.”
“그게 너의 운명이다.”
“아니 운명이든 뭐든 반드시 오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하나만 말해주시오.”
“말하라.”
“당신이 바라는 거. 진짜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오?”
“······!”
“운명이니까 마신의 개가 되겠다고? 아니 당신이 바라는 건 그게 아닐 거요. 늘 궁금했었는데 오늘 당신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알겠어. 당신은 마신의 개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운명은 거부할 수 없다.”
“웃기는 소리!”
“······!”
“하늘조차 따르지 않는 당신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마신 아수라의 개가 되어 따르겠다고? 절대 아니야! 당신이 진짜 원하는 건 따로 있어!”
화운은 확신했다.
천마가 역천의 존재 운운할 때 퍼뜩 떠올랐었고, 천마가 경천보패를 회수하려고 해봤자 일각이 지나기 전에는 화운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들여다보고 있을 때 확신했다.
이토록 주도면밀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운명 따위에 순응할 리가 없다고.
화운은 확신에 찬 눈으로 천마를 응시했다.
그런 화운을 빤히 바라보던 천마.
그의 미간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그동안 잔머리만 수련한 것이냐!”
“시간만 따지면 나도 본좌라고 자칭해도 좋을 만큼 꽤 많은 시간을 살았소.”
시간을 되돌리고, 되돌리고 또 되돌리고.
그 시간들만 모아도 백 년에 가까웠었는지 이백 년에 가까웠었는지 잊어버렸지만, 여튼 무척이나 많은 시간이긴 했다.
화운이 잠깐 정신없었던 삶을 떠올리는 사이에 천마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던지듯 말했다.
“본좌는 마신 아수라의 개가 될 생각이 없다.”
“역시!”
화운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곧 냉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그러면서도 유마정을 부수려고 하는 이유가 뭐요?”
“운명이니까.”
“또 그 개 같은 운명!”
“너도 겪어보았을 것 아니냐. 원인이 되는 것들이 달라지지 않으면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는 사실을.”
“······!”
“본좌가 바라는 것과 사황과 네놈이 바라는 것 그리고 마신 아수라의 집착이 담긴 법보. 어느 것 하나라도 달라지지 않는 한 운명은 예정된 수순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화운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익히 겪어보았기에 누구보다 잘 아는 바였기 때문이다.
원인이 되는 걸 제거하지 않으면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수백 년을 살다보면 정해진 흐름을 보게 된다. 선견지명인지 예지안인지는 모르겠다만 자신의 주위에 벌어질 일들을 내다볼 수 있게 되지.”
“······!”
“유마정은 부서지고 아수라는 이 땅에 강림한다. 그것이 앞으로 반드시 벌어질 일이다.”
화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천마가 하는 말은 사실 같았다.
아니 천마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본좌는 오랫동안 사황을 기다렸고, 널 기다렸다. 어차피 부서질 유마정이고, 어차피 강림할 아수라라면, 본좌와 함께 아수라를 물리칠 고수가 필요했다.”
천마가 오랫동안 화운을 방치한 이유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이 화운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들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든 화운은 천마의 말에서 어폐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때는 왜 도와주지 않은 거요? 마신 아수라가 이 땅으로 강림했을 때 말이오.”
화운은 천마의 말을 부정할 만한 확실한 근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천마는 그에 대한 대답인지 핑계인지 모를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싸움은 종결을 향한 과정일 뿐이다. 그때 도와주었다면 아수라를 쓰러트리지는 못하고 아수라가 본좌의 본심을 눈치 채게 될 뿐이었다.”
화운은 말문이 막혔다.
마치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대화를 나눌 거라는 걸 알고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잖아! 응? 혹시 경천보패로 시간을 되돌린 거 아냐? 아, 아니지 그랬다면 내가 눈치챘을 텐데. 아니 내가 경천보패의 신력에서 벗어날 능력을 갖추기 전이었을까? 아, 아니 그 때는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전이라면? 내가 경천보패를 얻기 이전이라면?’
화운의 머릿속이 끝 모를 정도로 헝클어졌다.
화운은 다시 한번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천마와 나누었던 대화를 처음부터 떠올려봤다.
어폐가 되는 부분이 또 있는지 살핀 것이다.
‘응? 수백 년? 수백 년을 살았다고?’
천마와 사황은 동시대의 인물이다.
둘 다 이백 년 가까이 산 존재다.
하지만 이백 년을 수백 년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리고 사황과 화운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사황보다 오래 살았어. 어쩌면······!’
화운은 눈을 치떴다.
“경천보패! 제천마존의 비동이 있음을, 그 장보도를 세상에 내보낸 게 당신이었군.”
“맞다.”
“제천마존! 제천마존에게 경천보패를 준 것도······?”
“그가 있어야 지금의 네가 있을 수 있었으니까.”
“말도 안 돼! 말도······ 그럼 천마대겁을 일으키고도 검성께 막힌 건 어떻게 설명할 거요?”
“사황에게 본좌가 있음을 알려주어 그가 더 강해질 이유를 만들어준 것이다. 아울러 검성이 널 만날 때까지 새로운 검학에 매진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말도 안 돼. 제천마존은 천 년 전의 존재였어.”
“몸뚱이 따위는 바꾸면 그만이다.”
빈틈없이 설명이 되는 천마의 말.
화운은 말도 안 된다는 말만 입안에서 뇌까렸다.
“운명은 흘러가고 결국 종극에 이른다. 본좌는 마신 아수라가 이 땅에 강림하는 것까지는 보았다. 그게 본좌가 본 종극이다. 그 후는 보지 못했다. 마신도 신이어서 그와 관계된 일이라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천 년 동안 이어져온 천마의 고민과 대계.
화운은 믿어야 할지,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일지 혼란스런 얼굴로 두 눈만 치떴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결국 종극에 닿는다. 너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가거라. 그날, 종극에 이른 그날, 아수라가 강림하고 나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난 믿지 않아.”
화운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천마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두 눈마저 감아버렸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오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 새로운 세상은 파멸 끝에 오는 법이다.
***
화운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천마의 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실 같았고, 진실일 거라고 여기는 순간엔 또 거짓 같았다.
“응?”
천마의 말을 조목조목 따지다 보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천마는 어떻게 알고 있지?”
시공을 건너 어린 시절로 되돌아온 일은 몰라야한다.
사황도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지 않은가.
한데 천마는 알고 있다.
마신 아수라가 강림했었던 일을 이야기했을 때 마치 겪은 것처럼 응답했다.
기억한다는 뜻이다.
“또 뭐가 있는 건가?”
허공에서 우뚝 멈춘 화운은 뒤를 돌아 보이지도 않는 천종천마교 쪽을 응시했다.
“젠장, 장기판의 장기알이 된 기분이군.”
한참 동안 성난 눈초리로 쏘아보던 화운.
갈수록 분노보다 혼란스러움이 더 커졌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절대로!”
화운은 한차례 소리친 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지만, 반드시 방법을 찾을 거다.
천마와 마신 아수라, 둘 다 날려버릴 방법을.
그렇게 각오를 다진 화운은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꽤 큼직한 도시가 보였다.
“그래, 배부터 채우고 힘내자!”
화운은 도심에서 비교적 떨어진 곳에 자리한 객잔을 향해 날아갔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내려선 화운은 품을 뒤져 은전 몇 개가 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객잔으로 향했다.
송학객잔.
소나무와 학.
도가의 냄새가 짙었다.
객잔 주인이 도가 쪽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서······!”
화운이 객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소이가 달려오다 놀란 눈을 있는 대로 치떴다.
화운의 외모에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이층에도 빈자리 있지?”
“어? 아, 어서 오십시오! 이층으로 모시겠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점소이는 화운을 이층으로 안내했다.
그러면서 슬쩍 뒤돌아 화운을 훔쳐보곤 했다.
남자가 남자를 훔쳐보는 게 머쓱했던 점소이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이층에 빈자리도 있고, 아리따운 소저들께서도 자리하고 계시답니다. 공자님이시라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화운은 고개만 끄덕이며 점소이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저 창가가 어떻습니까?”
아직 점심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객잔은 한산한 편이었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점소이를 따라 창가로 향했다.
그 와중에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점소이 말대로 아리따운 소저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명은 이제 갓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십 대 후반의 처자였고, 또 한 명은 한참 농익어 보이는 이십 대 후반의 여인이었다.
화운은 십 대 후반의 처자를 본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아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제가 가서 합석해도 좋을지 여쭈어볼까요?”
점소이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럴 필요 없다. 너는 가서 가장 잘하는 요리를 가져오너라.”
주문을 한 화운은 두 여인이 있는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십 대 후반의 여인이 계속 말하고 있었고, 십 대 후반의 여인은 듣고만 있는 모습이었는데 둘 다 화운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
“······!”
두 여인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이십 대 후반의 여인은 알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핥았다.
화운은 그들에게 곧장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십 대 여인을 향해 서서는 걸음을 멈췄다.
“저에게 볼 일이 있으신가요?”
이십 대 여인이 요염하게 웃으며 물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서 사특한 기운이 흘러나와 화운의 심령을 붙잡으려고 했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군.”
“뭐가 맞다는 건가요?”
“백나찰!”
이십 대 여인의 얼굴에 놀람과 경계의 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화운은 그 얼굴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사내들을 유혹하여 정기를 빨아먹고 무참하게 죽인 희대의 요녀, 백나찰! 널 정의의 이름으로 징치하겠다!”
화운이 거창하게 외친 순간 백나찰이 창문으로 몸을 날리며 장력을 뿌렸다.
화운은 강기의 막을 펼쳐 간단히 막음과 동시에 젓가락을 집어 들고는 날렸다.
퍽!
일직선으로 날아간 젓가락이 창문을 부수고 달아나는 백나찰의 척추에 박혔다.
피하고 막고 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악!”
비명을 지른 백나찰은 객잔 밖 거리로 떨어졌다.
그래도 제법 고수였던지라 두 손으로 바닥을 쳐 그 반동으로 잽싸게 달아났다.
“요녀, 용케 달아났다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화운이 창밖으로 외쳤다.
쫓아갈 생각은 없었다.
척추에 맞았으니 젓가락을 뽑는다하여도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런 몸으로는 오래 가지 못해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었다.
화운은 당황한 채 서 있는 십 대 후반의 소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저 요녀와 어떤 사이요?”
“오늘 만난 언니인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아하니 강호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인데, 달콤한 말로 다가오는 사람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그렇다고 호의를 베푸는 사람까지 무작정 경계하지는 말고.”
“······!”
당황한 얼굴로 눈만 끔벅거리는 소녀를 두고 화운은 창가 쪽의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것도 인연이라고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백아연.’
화운은 미소를 지으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강호초출 백아연은 백나찰의 감언이설에 속아 백나찰이라는 악명을 스스로 쓸 뻔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닫고는 화운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응시하다 객잔을 떠났다.
화운은 그 기척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원흉이 제거되었으니 그녀의 앞날이 달라지겠지······. 정해진 운명이라 하더라도 원인이 되는 것을 바꿀 수만 있다면······ 사황, 나, 천마 그리고 경천보패. 바꿀 수 있는 게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