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출정
이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사람은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도 성장하는 법이다.
아기는 엄마의 품을 벗어나 기어 다니고, 소년은 집을 벗어나 들판을 뛰어다닌다.
열네 살이 된 선우유성과 남궁현 역시 마찬가지다.
무인의 향기를 물씬 풍길 정도로 성장했다.
훤칠해진 키, 굵어진 목소리, 눈빛은 힘이 넘쳤고, 상대를 대하는 태도엔 절도가 있었다.
“형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남궁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한 청년이 깜짝 놀라 돌아봤다.
기다란 대도를 등에 지고 보통 길이의 검을 허리춤에 걸고 있는 청년.
바로 사도강이었다.
“나 바빠.”
남궁현을 확인한 사도강의 걸음이 빨라졌다.
“무공 수련하는 거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는 거 뻔히 아는데 뭐가 바쁩니까?”
남궁현이 따라붙었다.
“그러니까 그 무공 수련을 해야 해서 바쁘다고.”
“거 잘됐네요. 함께하지요.”
“아니, 오늘은 심법수련을 해야 해서 함께 못 하겠다.”
“거짓말.”
“진짜야.”
“그러지 말고 제 등에 진땀 좀 흐르게 해주십시오.”
“땀만 흐르냐? 피도 흐르잖아!”
“운이 형님이 계시는데 뭐가 문젭니까?”
“그 인간이 있으니까 문제지. 그 인간이 없다면 그냥 너 죽여도 누가 뭐라고 하겠냐!”
“으흐흐! 절 죽일 수나 있구요?”
“안 속는다. 꺼져라.”
“아, 진짜! 그러지 말구요. 형님한테도 도움이 되잖습니까!”
“도움 안 돼! 도움 되도 안 해! 절대! 그러니까 딴 사람 찾아봐. 무당명검도 있고, 화산기룡도 있잖아!”
“그 형님들이랑 하면 긴장이 안 되니까 그렇죠.”
“그럼 무결이나 찾아가든가.”
“그 형님 폐관수련 들어갔는데요.”
“또?”
“어제 시작했답니다.”
“멍청한 놈, 정사가 이렇게 잡탕이 되어버렸는데 더 강해져서 뭐하려고 그렇게 미친 듯이 하는 건지 원.”
“운이 형님이 목표라잖습니까.”
“불가능에 도전하겠다니, 정말 제대로 미쳤구나!”
“미치긴요, 멋지잖습니까! 무인이라면 감히 올려다보는 것조차 버거운 상대일지라도 과감히 검을 뽑을 수 있어야지요. 저도 언젠간 적성대도황께 도전해 볼 겁니다. 패도의 정점이신 분의 칼은 얼마나 강할까요? 부딪칠 때마다 온몸이 짜릿짜릿 하겠지요?”
“멍청아! 한 번 부딪치면 두 동강이 나서 뒈질 거다.”
“지금이야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러니까 지금은 형님이 대신 싸워주십시오.”
“싫다고. 싫으니까 딴 사람 찾아봐.”
“전 형님이 젤 좋단 말입니다.”
“어? 군영아!”
사도강이 남궁현의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남궁현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또 속을 것 같습니까?”
남궁현이 의기양양 팔짱을 낄 때였다.
뒤쪽에서 바람처럼 덮쳐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남궁현이 깜짝 놀라 몸을 날려 피하려는 순간 사도강이 팔을 붙잡았다.
“놓으십시오!”
불안감을 느낀 남궁현이 소리친 순간.
새하얀 손 하나가 불쑥 뻗어와 남궁현의 귀를 움켜쥐었다.
부드럽고 따스하지만 우악스런 손.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린 남궁현은 도망치고자 몸을 틀었다.
하지만 남궁현의 귀를 움켜쥔 소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코웃음 치며 더욱 세게 틀어쥐었다.
“아얏!”
“어딜 도망가려고!”
“도망가려는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파! 살살······ 제발 살살, 아프다고!”
“엄살 부리지 마!”
“엄살 아니야, 아프다고!”
“닥치고, 점심 같이 먹자고 했어, 안 했어?”
“했어.”
“근데 왜 안 왔어?”
“배가 고프지 않아서······.”
“유성이랑 밖에 나가서 먹은 걸 모를 줄 알아?”
“그, 그건 유성이가 나가자고 해서······· 난 조금밖에 안 먹었어.”
“핑계대지 마! 자꾸 그딴 식으로 도망 칠 거야?”
“말했잖아! 누나는 사파, 난 정파. 남궁검가의 가주님이신 아버지가 고지식해서 우린 절대 안 된다고!”
남궁현이 안타깝다는 듯 소리칠 때였다.
“오호홍! 이게 뭐게?”
서찰 하나가 남궁현의 얼굴 앞으로 내밀어졌다.
“뭔데?”
“내가 여쭌 물음에 아버님께서 해주신 답장.”
“뭔 물음?”
“파천도 섭붕의 여식인 나 섭군영이 대남궁검가의 소가주인 남궁현을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지 여쭤봤거든.”
파천도 섭붕은 적성대도황의 의제였다.
적성대도황이 적성대도문의 전력 중 사 할을 차지한다면 파천도 섭붕이 나머지 육 할 중에서 이 할 정도는 감당할 정도로 대단한 고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섭군영은 섭붕의 무남독녀로 어려서부터 사도강과 친남매처럼 자랐다.
“설, 설마······!”
남궁현이 크게 당황하자 섭군영이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남궁검가는 자유롭다. 세상의 이목을 감당할 자신만 있다면 안 될 이유가 없다. 정말 멋진 아버님이셔!”
“하, 하늘이시여! 자식을 버리다니······· 아얏!”
“어디서 패륜질이야! 그리고 먼저 꼬실 때는 언제고 좋아해 준다니까 도망치려고 그래! 죽을래?”
“아, 아뇨.”
자포자기한 듯 시무룩해지는 남궁현.
섭군영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남궁현의 귀를 단단히 움켜쥔 채 사도강을 쳐다봤다.
“오빠도 놀지 말고 수련 좀 해. 이 녀석이 바람이라도 피우면 오빠가 잡아서 혼내줘야 할 거 아냐.”
“으흐흥! 그건 염려마라. 다리를 분질러 놓으마.”
“누구 다릴 분질러!”
갑자기 섭군영이 빽 소리쳤다.
“······!”
“그냥 혼만 내. 혼만!”
“알았다.”
사도강이 움찔하며 대답하자 섭군영이 남궁현의 귀를 잡은 채 끌고 갔다.
“앞으로 밥을 먹든, 수련을 하든, 측간을 가든 항상 내 눈에서 벗어나지 마. 절대! 알았어?”
“그냥 죽여줘요.”
“죽더라도 내 눈을 벗어나지 마.”
“네에.”
사도강은 끌려가는 남궁현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멍청한 놈! 하필이면 저런 마녀한테 찝쩍거려서 저 꼴을 당하냐!”
비무하자고 귀찮게 굴던 남궁현이 끌려가자 비로소 느긋해진 사도강은 주위를 둘러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이 년 동안 너무 달라져 버렸어! 개판이야 개판! 정파도 사파도 없이 잡탕이 되어버렸다고! 천하를 맘껏 짓밟겠다는 내 꿈은 어쩌라고! 어쩌란 말이냐!”
절규조차 탄식하듯 내뱉은 사도강.
그는 힘없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
남궁현이 사도강과의 비무에 재미가 들렸다면 선우유성은 무당명검과의 비무에 맛을 들인 상태였다.
혈존에게서 혈천멸살강기 즉 자령신공을 익힌 후로 공격지향적인 성격이 강해진 선우유성은 무당명검과의 비무가 즐거웠다.
화운에게 건곤무상을 배운 후로 무당명검의 검이 갈수록 달라지고 있었다.
차갑고 도도하고 날카로웠던 검이 어딘가 공허하면서도 굳건했다.
그러다가도 냉혹하게 몰아칠 땐 정신이 없었다.
요 며칠 그 검세를 상대하는 재미에 빠져 틈만 나면 무당명검을 찾아가곤 했다.
어떨 땐 비무를 하지 못하고 검을 휘두르는 모습만 보고 와야만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고 무척 즐거웠다.
“다른 형님들이랑도 해봐야 하는데 명검 형님한테서 빠져나올 수가 없네. 무당의 검이 원래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무당명검이 늘 수련하는 곳으로 향하는 선우유성.
그런데 그의 앞을 한 사람이 막아섰다.
“아, 큰누님?”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큰누님이라고 부르는 이는 한 사람 뿐이다.
북궁설 바로 그녀였다.
활짝 핀 꽃처럼 만개한 북궁설은 도도함과 농염함을 두루 갖춘 여인이 되어 있었다.
“명이는?”
“백리명 형님은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석 달이 다 되어가잖아?”
“그러게요. 들어가실 때 분명 두 달 후에는 나올 거라고 하셨는데.”
북궁설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백리명은 지금 폐관수련 중이었다.
두 달 후쯤이면 나올 거라고 하더니 석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폐관수련이 애초 계획보다 길어진다는 건 수련이 잘못되고 있을 공산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려한 것이다.
“알았다. 곧 나오겠지.”
북궁설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예. 분명 좋은 결과를 얻어서 나올 겁니다.”
“그래. 수련하러 가니?”
“오늘도 날씨가 좋잖습니까.”
“그렇구나. 오늘도······!”
하늘을 올려다보던 북궁설이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 하늘을 날아가는 작은 물잔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 어떻게 하면 저럴 수 있을까요?”
“그러게. 어떻게 해야 저 정도 경지에 올라설 수 있을까?
선우유성의 물음에 북궁설이 의문으로 답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우유성 역시 가던 방향을 틀어서 북궁설을 따라갔다.
두-웅-!
물잔이 날아간 곳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길게 울렸다.
모두를 부르는 신호였다.
***
백여 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 커다란 종을 묵직하게 울리고 되돌아온 물잔이 탁자 위로 저절로 내려앉았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무영투가 물잔을 집어 들었다.
사기로 만들어진 질그릇이었음에도 커다란 종을 때리고 돌아온 물잔엔 실금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봐도 모르겠고,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다.”
“언젠간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들 모이고 있을 테니 그만 가시죠.”
“명이랑 무결이는?”
“둘 다 나올 겁니다.”
“명이도 나올 거라고?”
“제법 성취를 얻으셨는데, 스스로도 긴가민가해서 고민하느라 못 나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화운의 말에 무영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대자연이 알려주더냐?”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만 않으면 보다 많은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천지감응의 이치까지 알게 되면 제가 하는 것 정도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게 그렇게 쉬우면 세상에 고수 아닌 자가 어디에 있겠느냐. 아마 기인들이 천지에 널렸을 게다.”
“그런가요?”
화운은 빙그레 웃으며 무영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무해 대연무장.
신풍영웅대의 깃발 아래 일백이 조금 넘는 숫자가 모였다.
이 년 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곤륜파의 제자들까지 합류한 숫자였다.
화운과 무영투가 모습을 드러내자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던 이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다들 이 년 전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무공까지 비약적으로 성장한 모습들이었다.
앞에서 둘러보는 화운과 무영투의 눈에 남녀의 구분이 보였고, 나이의 구분은 보였지만 정과 사의 구분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정파와 사파의 구분 없이 마구 뒤섞여 각자 성격이 맞는 이들끼리 어울린 모습이었다.
화운은 그것만으로 이 년이라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명이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북궁설이 바로 앞에서 말했다.
화운은 빙그레 웃었다.
“오고 있습니다.”
화운의 말에 북궁설이 눈을 크게 뜨며 연무장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았다.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느껴졌다.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인기척이.
‘정말 그가······!’
북궁설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이윽고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사내였다.
그리고 여인처럼 하얀 얼굴.
북궁무결이었다.
북궁설의 얼굴에 실망의 기운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또 한 사람이 북궁무결의 바로 뒤에서 성큼성큼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곧 북궁무결의 어깨에 팔을 올려 어깨동무를 했다.
“처남, 잘 지냈냐?”
“누가 처남이야!”
“니가.”
“닥쳐!”
“거부해도 소용없다. 넌 처남, 난 매형. 운명은 우릴 그렇게 짝지어놓았다.”
“웃기지 마!”
“웃겨도 소용없다. 어? 누님!”
백리명이 북궁설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반가운 표정을 짓던 북궁설의 얼굴이 금세 도도해지며 고개마저 돌아갔다.
“와, 우리 누님, 더 예뻐지셨네.”
“누가 누님이야!”
“누님이 누님, 난 낭군. 운명은 우릴 그렇게 짝지어······. 억!”
북궁설이 팔꿈치로 백리명의 가슴을 찍었다.
“이 고통! 얼마만이냐! 누님, 그거 아오?”
“뭘 말이냐?”
“누님이 주는 것이라면 이 고통까지도 사랑하오.”
“징그럽다!”
냉랭하게 소리치는 북궁설.
하지만 이 순간 아는 이들은 알았다.
그녀가 백리명의 얼굴조차 마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석 달 동안 혓바닥에 기름칠만 했나 봅니다.”
담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패자는 승자를 비웃지 말라.”
“패자니까 비웃는 거요.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결정이 난 것 같으니 들어봅시다.”
담명의 말에 백리명은 화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뿐만 아니라 다들 흥분을 억누른 얼굴로 화운에게 시선을 못 박았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화운이 말한 순간 주위의 공기가 열기로 이글거렸다.
얼굴엔 저마다 흥분을 억누르는 기색이 더욱 뚜렷해졌다.
“이틀 후에 출발할 거니까 다들 준비들 하십시오.”
“진짜 출정입니까?”
한쪽에서 선우유성이 소리쳐 물었다.
“그래, 출정이다!”
화운의 말에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다들 한 마디씩 소리쳤다.
“얏호!”
“드디어 출정이다!”
“그래, 출정이다! 이 지겨운 수련에서 드디어 탈출하는구나!”
“대주한테는 미안하지만 여기 무해에는 두 번 다시 안 올 거다!”
“가자, 가! 가서 죽도록 싸워보자!”
화운은 그동안의 힘겨움을 쏟아내는 이들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소란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화산기룡 적엽명을 향해 말했다.
“칠대문파와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천사련과 당문까지 화산에서 모일 거다. 우리도 화산으로 가야 하고.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적엽명이 공손히 대답했다.
화운이 무당파의 태사백조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사문의 존장을 대하듯 깍듯했다.
“고맙다.”
고개를 끄덕인 화운은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듯 여인의 아름다움이 활짝 피기 시작한 묘령의 소녀가 깨끗한 눈망울로 쳐다보고 있었다.
열여섯 살의 백리연이었다.
‘그거 아세요? 해바라기가 쳐다보는 건 태양이 아니라는 거요.’
‘그럼 무얼 쳐다보는 거지?’
‘태양의 열기요.’
‘열기?’
‘네. 세상을 두루 비추는 태양의 열기에 매료되어 땅에 떨어질 때까지 태양만 쳐다보는 거래요. 그러니까······.’
‘태양이 되어줄게. 태양이 되어 너에게 내 모든 열기를 보내줄게. 그러니까 넌 나만 보도록 해.’
‘그럴게요.’
화운이 빙그레 웃자 백리연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
운남성 애뇌산 무해곡.
피처럼 붉은 적룡포에 활활 타오르듯 새빨간 머리카락.
사황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혈존이 소리 없이 나타나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사황의 뒤로 부복했다.
“녀석에게서 연락이 왔다.”
“드디어 출정입니까?”
“그래.”
“천마 위에 우뚝 설 것이니 미리 감축드립니다.”
혈존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사황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녀석의 약점이 무엇일 것 같으냐?”
“백리가의 계집과 놈의 부모입니다.”
사황의 물음에 단정하듯 대답하는 혈존.
그에 사황이 다시 말했다.
“녀석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다면 약점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선우세가에 있는 부모가 약점입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사황.
“가라. 때가 될 때까지 선우세가로 가 있거라.”
“존명.”
명을 받은 혈존이 촛불 꺼지듯 사라졌다.
“천 년을 넘게 살았다 하여도 결국엔 인간일 뿐이다.”
의미심장하게 말한 사황이 돌아섰다.
운명과 숙명 혹은 그 무엇이든 마지막 결판을 내고자 천종천마교로 향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