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천룡무제 화운 그리고······
수라도.
사황은 수라도로 들어가자마자 거대한 구 층 석탑을 봤다.
그리고 그 석탑 꼭대기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인간들의 세상과 여기 수라도의 세상을 연결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여 구 층 석탑을 부숴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앞을 막고 있는 마귀들을 우선 상대하는 사이에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온 천마가 구 층 석탑을 부수려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 사황은 구 층 석탑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천마가 부수려고 하니 일단 지키고 보자는 것이었다.
“사황! 저걸 부숴야 아수라의 권속들이 인간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다!”
“알아!”
“그럼 막지 말고 비켜라!”
“못 비킨다!”
“왜?”
“너니까!”
“뭐?”
“네놈이 부수려고 하니까 본좌는 지켜야겠다!”
잠깐 황당한 표정을 지은 천마.
천마는 곧 살의를 일으키며 사황을 공격했다.
“모두 저 인간을 찢어 죽여라!”
천마의 명령에 더 많은 마귀들이 사황을 공격했다.
사황은 구 층 석탑 꼭대기에 선 채 사방에서 달려드는 마귀들과 천마를 상대했다.
사황이 펼치는 전륜멸천의 강기는 강했다.
이 년의 기간 동안 더욱 갈고닦아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파괴력을 과시했다.
사황의 무력이 만만치 않자 천마는 몸을 사렸다.
마귀들로 사황을 집중 공격하도록 한 후 습격하듯 갑자기 공격을 퍼붓곤 했다.
사황의 공력과 체력을 갉아 먹으려는 수법이었다.
사황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마귀들을 날려 버렸다.
하지만 끝도 없이 몰려오는 마귀들을 끊임없이 상대하다 보니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반 시진쯤 미친 듯이 싸우다 보니 공력 역시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쯤 천마가 공격에 적극 가담했다.
“이제 끝이 보이는구나!”
천마가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사황은 고군분투 했으나 결국 천마를 막지 못하고 큰 부상을 당하여 구 층 석탑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물러나라.”
마귀들이 사황을 찢어발기려고 하자 천마가 그들을 물리고 내려섰다.
“천 년을 살았어도 넌 천마일 뿐이다. 비겁의 화신인 천마! 대체 네놈이 노리는 게 무엇이냐?”
사황이 널브러진 채 물었다.
천마는 궁금해하는 사황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천 년을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적수라 할 만한 이는 딱 둘 뿐이었다.
무당검성과 사황.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진정한 적수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과 싸울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다.
“본좌가 마신 아수라의 권속으로 남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군.”
“그래.”
사황이 대답하자 천마는 피식 웃었다.
“맞다. 본좌는 그럴 생각이 없다.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럼 뭘 어쩌겠다는 거지? 저걸 부수면 뭐가 달라지는 것이냐?”
“신이라고 전지전능한 건 아니야. 특히 권능을 잃어버린 신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그저 인간보다 월등히 큰 힘을 가진 존재라고나 할까.”
“······?”
“마신 아수라의 권능은 두 가지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바로 저것, 시공의 권능이지.”
천마가 구 층 석탑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사황은 알아듣지 못했다.
“저걸 부숴 버리면 아수라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
“그러면 저 시공의 권능은 내 차지가 되는 것이지. 다시 말해·······.”
“이곳을 발아래에 둘 수 있겠군.”
“바로 그거다. 내가 원하는 건 수라도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것이다. 크핫하하하!”
천마가 크게 웃음을 터트린 순간이었다.
그를 권속으로 옭아매고 있던 마신 아수라의 결속이 끊어졌다.
“무, 무슨? 아수라가 당했다는 것이냐!”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천마가 당황했다.
“호오! 그놈이 아수라를 처치한 모양이군!”
사황이 웃었다.
“아니, 아니야! 아수라가 죽어버렸다면 더 잘 된 일이다!”
천마는 땅을 박차고 구 층 석탑 꼭대기로 솟구쳤다.
그리고 천마파천권을 펼쳤다.
콰-앙!
굉음이 터지며 천마가 지상의 사황을 쏘아봤다.
“죽고 싶은 것이냐?”
널브러져 있던 사황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구 층 석탑을 부수려던 천마파천권을 막았던 것이다.
“흥! 네놈은 본좌의 노리개로 삼아주마!”
코웃음 친 천마는 사황을 내버려 두고 다시 천마파천권을 펼쳤다.
쾅!
구 층 석탑이 박살이 나며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오색영롱한 빛을 발하는 구슬이 허공으로 튕겨졌다.
등천보패였다.
“크핫하하! 이것이 바로 본좌의 권능이 될 것이다!”
천마가 앙천광소를 터트리며 손을 뻗었다.
등천보패가 천마의 손을 향해 날아왔다.
결속이 끊어진 탓에 아수라의 권능과 자신의 무공을 융합했던 힘은 펼칠 수가 없게 되었지만 수라도를 지배하는 데는 자신의 무공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기꺼이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공에서 커다란 뭔가가 천마를 향해 뚝 떨어졌다.
천마가 인상을 쓰며 허공을 쳐다봤다.
“헉! 아수라?”
천마가 다급성을 토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아수라가 허공에서 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아수라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시체로구나!”
천마가 외친 순간 화운이 등천보패를 낚아채 금강부동을 펼쳐 사라졌다가 사황의 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등천보패를 놓친 것에 화가 난 천마가 아수라의 주검에 천마파천권을 날렸다.
아수라의 주검은 처참하게 짓이겨져 날아갔다.
“쯧쯧! 성질머리하고는.”
혀까지 찬 화운은 사황을 내려다봤다.
“천마 하나 감당 못 해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저놈이 석탑을 부수려고 해서 그것까지 지키려다 이렇게 되었다.”
사황이 핑계를 댔다.
물론 사실이긴 했다.
다만 사황답지 않다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화운은 웃음을 감추며 손을 뻗었다.
오색찬란한 빛이 사황을 휘감으며 그의 육신을 일각 전으로 되돌렸다.
한참 공력이 바닥이 났을 때이지만 천마에게 치명타를 입기 전이었다.
사황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놈은 내 몫이다.”
사황이 천마를 보며 말했다.
이때 천마는 허공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시든지요.”
화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사황이 숨을 들이마시며 공력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느냐?”
“뭘 말이오?”
화운이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러느냐는 얼굴로 쳐다봤다.
“이런 일을 우려하여 혼마를 절강성으로 보내두었다.”
혼마는 천마의 그림자인 존재였다.
그리고 절강성엔 선우세가가 있고, 그곳엔 화운의 부모가 있었다.
화운은 천마의 말을 바로 알아차렸다.
“마도의 지존이라는 자가 추잡하다!”
“본좌는 너희들과 싸울 생각이 없다. 그 법보만 주고 수라도를 떠나라.”
화운은 이맛살을 구겼다.
마신 아수라를 강림시키고 그와 싸우기로 작정했던 이유는 운명이든 뭐든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이참에 수라도를 확실히 쓸어버려 다시는 인간도를 넘보는 자가 없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후욱! 내가 그랬지 않느냐. 천마는 천마라고.”
긴 숨을 토해낸 사황이 끼어들었다.
“그러게요. 나름대로 속지 말자고 각오하곤 했는데,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이다.”
“예?”
“네놈이 본좌의 약점이 무해곡이라는 말을 할 때 본좌는 네놈의 약점을 생각했었다.”
“······!”
화운은 사황을 돌아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눈엣가시 같은 네놈을 상대하자면 본좌도 네놈의 약점 정도는 꿰차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요?”
“무해곡을 나오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본좌가 아는 걸 저 얍삽한 놈이라고 모를까?”
사황의 말이 갈수록 의아하여 화운은 입을 다물고 지켜봤다.
그랬더니 사황이 피식 웃으며 천마를 향해 말했다.
“혼마를 보냈다고? 이를 어쩌지? 본좌는 혈존을 보내두었는데 말이야.”
천마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천하를 오랫동안 예의주시했던 천마는 사황의 심복인 혈존의 무위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혼마는 정신을 지배하는 섭혼술 위주의 무공을 익혔다.
반면 혈존은 사황의 수하답게 강한 힘을 추구했다.
무위가 압도적이지 않는 한 둘이 격돌하면 섭혼술을 익힌 쪽이 필패다.
“자, 더 이상 내놓을 패가 없다면 결착을 내보실까!”
사황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러면서 화운을 향해 한 마디 남겼다.
“약점 잡힌 네놈은 거기서 구경이나 해라.”
“예, 예. 시키는 대로 합죠.”
화운이 살짝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사황과 천마!
누가 더 강할까?
천 년을 살아온 천마였다.
사황, 무당검성과 함께 천하제일을 다투던 시절에도 세 사람 중에 가장 강한 이가 천마였다.
오늘까지 이어져 온 대계를 위해 그것을 감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수히 흘러온 세월이 천마를 무디게 만들었다.
자신의 무공과 마신 아수라의 권능을 융합하여 상상도 못할 힘을 얻었으나 그건 자신의 무공을 강하게 만든 게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힘마저 사라져 버렸다.
마신 아수라가 죽어버려 그의 권능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천마는 오랫동안 정체되어 버린 자신의 무공만으로 사황을 상대해야 했다.
요 근래 이 년 동안 절치부심하여 한 층 더 강해진 사황을.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천마는 천 년의 대계까지 실패하고 말았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점들이 두 사람의 격전에 큰 변수로 작용했다.
“쿨럭!”
한 식경 동안의 치열한 격전 끝에 땅바닥으로 처박힌 사황이 핏물을 게웠다.
천년대계의 실패를 분노로 폭발시킨 천마의 마지막 일격에 가슴을 격중당한 것이다.
“놈은?”
사황이 물었다.
“적당히 좀 하시지. 머리통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천마의 일격이 사황의 가슴을 강타한 순간 사황이 전력으로 펼친 전륜멸천의 강기가 천마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다.
둘의 싸움은 그렇게 종극을 맞았다.
화운이 대답하며 사황의 상처 위로 손을 뻗었다.
오색광휘가 쏟아져 나와 사황의 육신을 일각 전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사황은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으나 일어나지 않고 대자로 누운 채 하늘만 쳐다봤다.
우중충한 하늘이었다.
장마철에 태풍이 몰려오고 있는 하늘 같았다.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러긴 하셨죠.”
사황이 마음 상한 사람처럼 입술을 씰룩거렸다.
화운이 그렇다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싹퉁머리 없는 놈 같으니!”
“은거라도 하시게요?”
“천마도 없고 네놈 때문에 본곡의 원한도 잊게 생겼는데, 무얼 하겠느냐? 게다가 본좌가 물러나야 혈존과 구혼사존이 무해곡의 일에 나설 수 있겠지.”
“흠, 후배들을 위해 물러나겠다는 거군요. 훌륭합니다.”
“어째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빈정거리는 것이냐? 망할 놈 같으니······!”
사황은 지금의 대화가 즐거웠다.
모든 걸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런데 누워서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황이 돌연 눈을 치떴다.
“아무래도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사황이 몸을 일으키자 화운도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색의 빛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내려오고 있었다.
“어?”
안력을 높인 화운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금세 두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는 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오색의 털을 가진 기린이었다.
“여기요! 여기!”
화운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소리쳤다.
기린의 등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화운은 그들이 누구일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당검성과 제천마존 바로 그들이었다.
잠시 후 지상에 발을 디딘 기린은 말이 투레질을 하는 것처럼 낮게 콧김을 흘리며 화운의 몸에 머리를 비볐다.
“녀석, 반갑다. 반가워.”
화운은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며 반가워했다.
“허허허! 장하구나!”
기린의 등에서 내린 무당검성이 자애롭게 웃으며 칭찬했다.
“애썼다!”
은빛의 수염을 가슴께까지 늘어트린 제천마존도 우렁찬 목소리로 칭찬했다.
“다 두 분 덕분이지요. 그나저나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은 사황 시주께 볼 일이 있구나. 시주, 오랜만이외다.”
무당검성이 아는 체를 하자 사황이 놀란 눈을 끔벅거렸다.
“안 죽었소?”
“죽었으니 천계에서 내려오는 것이겠지요. 허허허!”
“죽었다고? 죽어서······ 설마 신이라도 되었다는 것이오?”
“말단이긴 하지만 그런 셈입니다.”
무당검성이 조금은 쑥스러운 빛을 드러냈다.
이때 제천마존이 나섰다.
“음, 이자가 사황이로군.”
사황이 시선을 돌렸다.
“날 모르겠군. 인간일 때 제천마존이라고 불렸다네.”
제천마존의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으나 사황이 눈을 치뜨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까마득한 시절이지만 한때 천하에 군림하며 절대의 무신이라 불렸던 이가 제천마존이거늘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사황이 자신의 명성을 알아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제천마존.
이윽고 제천마존은 사황을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흉명이 하늘에 닿아 높은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천계에 발을 딛지 못할 운명이 바로 자네라네.”
“신이 될 생각은 없소.”
“그럼 지옥에 처박혀 염왕의 수하가 될 텐가?”
“······!”
“자네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네. 하나는 말했듯이 염졸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을 멈춘 제천마존이 주위를 둘러봤다.
인간계와는 사뭇 다른 환경을 가진 수라도.
멀리, 아주 멀리서 감히 다가오지는 못하고 이쪽의 눈치만 보고 있는 숫자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바글거리는 마귀들.
제천마존은 다시 사황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암만 생각해 봐도 자넨 여기에 남는 것이 낫겠어. 염졸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뜻이오? 여기에 남으라니?”
“천도를 비롯한 육도에는 각도의 율법을 관장하는 주인이 있어야 하네. 알다시피 지금 이곳 수라도는 아수라가 죽은 탓에 율법을 관장할 이가 없다네.”
“설마 나더러?”
“싫으면 염졸이나 되든가.”
“······!”
사황이 얼굴을 굳혔다.
반발의 기색이 얼굴에 뚜렷하게 떠올랐다.
“시주.”
“거부한다.”
무당검성이 입을 열자 단호하게 말하는 사황.
무당검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주의 성격에 운명이라 하더라도 누가 강요한다면 싫을 게요. 허나 상황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오. 사황 시주께 남은 수명은 삼십 년이오. 그 후엔 아무리 거부하고 싶어도 염왕의 명을 따라야 하는 염졸이 될 수밖에 없소. 허나 지금 수라도에 남는다면 시주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오. 우린 그저 그런 상황을 알려주려고 왔을 뿐이지 강요하려고 온 게 아니라오.”
“······!”
사황은 미간만 찌푸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놓인 운명을 거부할 수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화운은 축하를 해주어야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몰라 기린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말년에 이런 곳에서 은거하게 될 줄이야.”
사황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 듯 보이자 무당검성은 화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경천보패와 등천보패는 천계의 신들이 수라도를 다스리기 위해 남겨놓은 권능이니라. 각 도에는 두 보패와 같은 권능들이 적어도 하나씩은 남겨져 있단다. 등천보패를 이리 다오.”
“경천보패는요?”
화운이 등천보패를 건네주며 물었다.
“경천보패는 아직 네게 쓰임이 남았구나.”
“······!”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는 화운.
무당검성은 그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고 등천보패를 사황에게 건넸다.
“수라도엔 수라도만의 율법이 있소. 수라도의 율법이 깨지면 천상의 법도 또한 영향을 받소.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천상의 법도가 흔들리면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오. 허니 수라도의 율법을 잘 지켜주시리라 믿겠소.”
사황은 무당검성이 내미는 등천보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결국엔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그렇게 수라도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
별이 총총한 밤이다.
적막한 어둠을 꿰뚫고 오색의 광채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번-쩍!
목조 전각을 강타하듯 내리 꽂히는 오색의 섬광.
분명 전각의 지붕을 뚫었음에도 소리도 충격파도 없었다.
그리고 곧 오색의 광채가 지붕을 뚫고 솟아오르더니 전각 위를 몇 바퀴 돌다가 다시 야천으로 솟구쳐 사라졌다.
백리연은 기적을 보았다.
천종천마교와의 일대격전을 치르고 돌아온 지 한 달.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온밤을 뜬 눈으로 보냈다.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빌며.
그런데 오늘.
그녀의 눈앞으로 오색의 광채가 지붕을 뚫고 떨어지더니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가 나타났다.
활짝 웃는 얼굴로.
백리연은 한달음에 달려가 안겼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그건 반가움의 눈물이었다.
“이제 연 매를 위해 최선을 다 할게. 연 매가 이 땅에 남아 있는 동안 언제나 행복할 수 있도록 말이야.”
화운은 백리연을 꼭 안아주었다.
백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평안을 찾은 연인을 축하하는 듯 별이 더욱 총총하게 빛나고 있었다.
***
삼 년 후.
무해가 완벽히 자리를 잡았다.
초대 해주는 연리향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화운이 무해의 태상호법이 되어 오 년 동안 섭정을 펼쳤다.
칠대문파는 무해노인과 관련한 비사를 철저히 조사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선대가 큰 잘못을 했음을 밝혀냈고, 무해 앞에 엎드려 빌었다.
열혈의 성질을 가진 혈존이 길길이 날뛰었으나 화운의 앞에서는 결국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무해는 천하의 한복판에 우뚝 섰다.
천하 각지에서 인재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을 발판 삼아 이백 년 동안이나 천하무림의 태산북두로 추앙 받았다.
오 년 후 섭정을 끝내고 무해를 연리향에게 넘겨준 화운은 백리연과 함께 선우세가에 머물렀다.
두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낳았고, 그들 모두 무해로 가서 차세대 영웅으로 성장했다.
화운은 삼십여 년이 지난 후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백리연과 함께 선우세가를 나왔다.
백리세가에 머물게 된 두 사람은 다 늙어서도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백리명과 그런 백리명을 혼내는 북궁설의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곤 했다.
그러다 일 년 만에 백리세가를 떠났고, 그 후로는 온 천하를 유람했다.
백리연은 백오십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화운은 백리연이 숨을 거두자 그녀와 자신의 인연이 끝임을 알았다.
백리연은 윤회에 따라 이 땅에 다시 내려오겠지만, 자신은 천계에 남아 금강신들을 이끌어야 했으니까.
화운은 서글픈 마음을 안고 홀로 은거했다.
그리고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
곤륜산.
음과 양은 떨어질 수가 없듯이 선기가 가장 강한 곤륜산이지만 가장 깊은 골짜기에는 짙은 어둠처럼 악기가 가득했다.
곤륜파를 세운 조사는 그 악기를 막고자 제자들을 가르치며 대를 잇도록 발판을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곤륜파의 제자들은 일신의 무위에만 몰입했고, 골짜기의 음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졌다.
마신 아수라가 인간들의 세상에 강림했다가 천룡무제 화운에게 강제 소멸당한 지 오백 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곤륜산 깊은 골짜기.
어둠처럼 짙은 악기가 안개처럼 자욱한 가운데 돌연 한 점 붉은 점이 나타나 점점 커지더니 종래에는 한 덩이의 구름처럼 커졌다.
그리고 곧 붉은 구름이 퍽! 하고 터지더니 인간 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의 존재가 튀어나왔다.
“오호호호호홍!”
뭔가를 해냈다는 듯 기쁨을 터트리는 존재.
황금빛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 그리고 녹빛의 눈동자를 가진 이국적인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인이었다.
크게 웃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가슴과 그 아래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둔부까지 무척이나 농익은 자태였다.
하지만 등 뒤로 보이는 박쥐의 날개와 비슷하게 보이는 흉물스런 날개와 맹수의 발톱처럼 사납게 보이는 손톱, 거기에 새하얀 이마를 뚫고 돋아 있는 두 개의 뿔까지.
암만 봐도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흐으으으읍!”
길게 숨을 들이 마시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금발의 존재.
그런데 그 존재가 단 한 걸음을 움직이기도 전이었다.
“또냐?”
늙수그레한 음성과 함께 허공에서 한 사람이 뚝 떨어지듯 나타났다.
새하얀 수염을 기른 청수한 얼굴의 노인이었다.
노인의 갑작스런 등장에 몸을 움츠릴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던 금발의 존재는 이내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노인에게서 인간 특유의 생기와 천지자연의 기운이 충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디서 입맛을 다시고 지랄이야!”
노인이 소리친 순간 금발의 존재가 벼락처럼 달려들어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퀴었다.
하지만 노인이 파리 쫓듯이 휘저은 손길에 간단히 튕겨 버리더니 급기야 노인의 손에 목까지 붙잡히고 말았다.
금발의 존재는 목이 잡힌 채 힘없이 바동거렸다.
얼굴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목이 잡힌 순간부터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힘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알아봐야겠어.”
중얼거린 노인이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노인은 금발의 존재를 움켜쥔 채 곤륜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이익!
하늘 끝까지 닿을 듯 길게 울리는 휘파람 소리.
이윽고 하늘 끝에서 오색의 털을 가진 신수가 날아왔다.
기린이었다.
기린은 노인의 앞에 내려서서는 머리를 비볐다. 그러면서 울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래, 그래. 이 모습이 싫단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
이윽고 노인의 수염이 떨어져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뿐만 아니라 호호백발이던 머리칼이 빠지고 새까만 머리칼이 자라났다.
주름 가득했던 얼굴은 젊음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다.
천룡무제 화운.
노인의 정체는 바로 화운이었다.
화운이 젊은 모습을 되찾자 기린이 반갑다는 듯 더욱 세차게 머리를 비벼댔다.
“녀석! 수라도로 가자구나!”
화운이 기린의 등에 올라타자 시공을 넘나드는 신수인 기린이 하늘로 솟구쳐 날아갔다.
수라도.
우중충한 하늘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하늘 아래에 돌로 지어진 전각들이 거대한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당금의 수라왕인 사황이 마귀들을 부려 지어놓은 것이었다.
“백 년 만에 어쩐 일인 것이냐? 뭔 일이라도 터진 게냐?”
사황이 태사의에 기대앉은 채 물었다.
화운은 금발의 존재를 사황의 앞으로 던지며 말했다.
“이런 놈들이 십 년에 한 번씩은 나타나지 뭡니까? 뭐 아는 거라도 있습니까?”
사황이 그제야 관심을 가지고 금발의 존재에게 눈길을 던졌다.
금발의 존재는 두려움에 찬 얼굴로 뭐라고 떠들어댔다.
분위기로 보아 살려달라는 것 같은데 사황과 화운이 살던 인간들의 세상에서 쓰는 말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넘어온 놈이로구나.”
“저쪽이라니요?”
“구천이라는 말을 들어봤느냐?”
“처음 듣습니다.”
“네놈은 우리가 있는 천도를 포함한 육도가 만물이 존재하는 전부라고 알고 있지?”
“아닙니까?”
“방금 구천이라고 말해주었지 않느냐.”
“아홉 개나 있단 말입니까?”
“그래. 아홉 개의 세계가 있고, 각 세계에는 삼라만상의 이치를 관장하는 천계와 그 천계의 지배를 받는 인간계 그리고 천계에 대항하는 역천의 존재들이 모인 지옥 같은 곳들이 있지. 그쪽에선 지옥을 마계라고 부른다나. 여튼 저 녀석은 이쪽 세계와 가장 가까운 세계에 존재하는 마계에서 건너왔을 게다.”
“놀랍군요.”
“놀랍긴, 네놈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게지.”
“그걸 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검성이 한 번씩 내려올 때마다 들려주더구나. 네놈도 등선하면 다 알 게 될 일인데······ 등선을 미루는 이유가 무엇이냐?”
“제 운명을 아십니까?”
“아니, 모른다.”
“등선하면 천계의 명을 받아 금강신들을 이끌어야 한답니다.”
“귀찮겠구나.”
“예.”
“그래도 오백 년이나 버텼으니 지루할 법도 하잖느냐?”
“그렇잖아도 그냥 등선할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이제 상황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화운이 히죽 웃으며 금발의 악마를 돌아봤다.
“너 설마?”
“아주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화운이 기분 좋게 웃었다.
사황은 어이가 없어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화운의 힘이면 어딘들 못 갈 것이며, 위험할 일이 얼마나 있겠느냐 싶었다.
“그거 기억하십니까?”
“뭘?”
“검성께서 그러셨잖습니까. 경천보패가 아직 제게 쓰임이 남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계로 가는 게 운명이다?”
“아마도요.”
“흥! 이계지존이라도 해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으마.”
“이계지존이라······ 그것도 좋지요.”
화운이 흡족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가려거든 그 계집 악마는 두고 가거라.”
화운이 의아하여 돌아보자 사황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 이계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서지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니니라.”
멍청히 쳐다보던 화운은 히죽 웃으며 기린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에 뵐 때는 시끌벅적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느냐!”
사황이 버럭 소리쳤다.
화운은 그러거나 말거나 손 한 번 흔들어주고는 기린을 타고 하늘로 솟구쳤다.
“가자! 이계인지 뭔지 가서 신나게 놀아보자!”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