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지랄이 풍년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2008년 12월이다.
내 이름은 마동수.
나이 29. 직장생활 2년차.
남들은 연말이라고 연인들과 즐거운 데이트를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만, 나는 지랄 같은 직장선배들을 만나 개고생을 하고 있다. 주변 친구들은 다들 좋은 직장동료를 만나 재미있게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변태 같고 지랄 맞은 인간들만 득실득실 거리는 팀으로 배정받는 불운이 왔는지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망할 놈의 회사가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주말에는 부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남자 직장인들이 그렇듯 주말이라고 해서 딱히 어딘가로 여행을 가거나 미술관에 들러 작품을 감상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영화를 보러가는 일도 거의 없다.
여기서 또 누군가는 ‘난 아닌데’라며 초를 칠지도 모른다. 그래. 알았다. 커플이라 좋겠다. 좀 전에 내가 했던 말 취소한다. 대부분의 솔로 남자 직장인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 같은 경우는 고향이 지방이라서 서울에 고향친구들도 별로 없다. 게다가 이놈의 서울은 어디를 가도 차가 막힌다. 나가서 괜히 고생할 바에는 그냥 집에 처박혀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 주말에 할 일은 뻔하다. 잠을 자거나, 만화책을 빌려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대학 동기들을 만나 시간을 죽인다. 집에서 잠을 자고 있거나 열심히 게임을 하다보면 심심함에 지친 대학동기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할 일이 없다고 해서 딱히 반갑지는 않다. 커플인 동기들을 ‘우리의 배신자’라며 욕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솔로인 동기들이 애틋하지도 않다. 그냥 동병상련의 아픔을 공유하는 정도? 무엇보다도 매일 보는, 아 매일은 아니다. 거의 매주 보는 얼굴이 지겹고 서글프다. 모이는 인간들의 숫자나 얼굴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가 않는다. 빌어먹을 ‘부익부, 빈익빈’의 원칙은 연애사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야말로 불쌍한 우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견딘다.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 친다. 다른 약속이 생길 때까지 어떻게든 기다려본다. 혹시 어디선가 우리가 아닌 다른 이가 불러주는 일이 생길까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본다.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나를 사모했던 누군가가 갑자기 용기를 내서 전화를 했는데, 친구와 놀다가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어디까지나 그냥 희망사항이다. 그런 일? 안 생긴다. 그냥 그렇게 막연한 희망을 품고 시간을 죽이다 보면 동기 중 누군가는 반드시 전화를 한다.
Rrrrr
오늘도 어김없이 누군가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했다. 지금부터 나는 승자다.
“무슨 일이야?”
‘여보세요’도 필요 없다.
“심심해”
딱히 용건도 필요 없다.
“그래? 어쩌라고?”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시크한척 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도 꼴에 동기에게 부릴 자존심은 남아있었다. 심심해도 참으면서 녀석들에게 전화하지 않은, 승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놀자”
반갑지 않지만 반갑다. 그래서 더 서글프다. 승자의 특권은 여기까지다.
“그래? 어디서?”
“편의점 앞”
“알았다. 30분 뒤에 보자.”
“응. 현우하고 정수한테도 이야기 할게.”
많은 말이 필요 없다. 편의점 앞이라는 말은 서강대 정문에 있는 훼밀리마트를 말한다. 만나는 장소야 뻔하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구질구질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너무나도 익숙한 일상이었다.
방금 전화한 녀석은 황태균이라는 놈이다. 집은 서울이다. 마포구 상수동에 산다. 홍익대가 코앞이다. 나는 중구 만리동에 산다. 회사에 입사하면서 서강대와 거리를 좀 뒀다. 그래봤자 택시타면 10분 거리지만 술 마시고 우리 집에 자러오겠다는 후배 녀석들과의 결별을 위해 과감하게 이사했다.
현우는 고향이 광주고, 마포구 염리동에 산다. 이대역이 바로 근처다. 길만 건너면 이화여대다. 불쌍한 녀석. 그런다고 ‘여자 친구가 생길 것 같으냐.’고 비웃어 주고 싶지만, 내가 사는 집 담벼락을 넘어가면 숙명여대다. 약간 과장된 이야기다. 그래도 옥상에 올라가면 숙대가 훤히 보인다. 그 녀석을 비웃으면 결국 나를 비웃는 셈이다.
정수는 고향이 대전이다. 서대문구 연희동에 산다. 연세대와 가깝다. 예전에 여자 친구가 연대에 다녀 거기로 이사 갔는데, 결국 헤어졌다. 그런데 아직도 그곳에 산다. 솔직히 좀 궁상맞아 보인다. 헤어졌으면 쿨하게 잊고 떠나야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저렇게 미련을 떠니 아직 솔로다.
이렇게 상세하게 내 친구들이 사는 곳을 설명한 이유는 우리가 별로 친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냥 우리들이 사는 곳이 절묘했을 뿐이다. 단지 사는 곳이 모교와 가깝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의 만남이 조금 잦을 뿐이다. 나는 절대 구질구질하게 여자 친구도 없이 주말을 불쌍하게 보내는 세 명의 친구와 친하지 않다!!! 정말이다.
세수만 하고 차를 몰고 학교로 향했다. 반갑지도 않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번거롭게 머리를 감거나 하는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그냥 모자만 쓰면 된다. 학교 정문 건너 원룸 촌에 차를 세우다보니 누군가 뒤에서 빵빵 거린다. 현우 녀석이다. 학교에서 제일 가까이 사는 녀석조차 차를 끌고 왔다. 망할 녀석.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면서도 귀찮다고 차를 몰고 오다니. 저런 녀석은 구박을 받아야 한다.
“야. 넌 집이 코앞이잖아. 걸어와도 될 일을 가지고, 무슨 차를 끌고 오냐? 우리나라가 기름 펑펑 나는 산유국인줄 알아? 좀 아껴라.”
현우는 그냥 피식 웃는다. 그래도 속이 시원하다. 회사에서 매일 벙어리 같이 살다보니 속에 응어리가 맺혔나보다. 가끔은 친구에게 괜한 짜증을 부리면서, 가끔은 친구들과 직장상사들의 뒷담화를 하면서 맺힌 응어리를 푼다.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다보니 다른 녀석들도 도착했다. 물론 두 녀석 다 차를 끌고 왔다. 처음 차를 산 것은 나였다. 내가 일하고 있는 팀의 특이성 때문에, 우리 팀에서 한 명은 지방 출장이 잦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영업부도 아닌 마케팅 부서에 영업용차를 지원하기도 이상하다.
출장은 보통 막내의 몫이다. 그러다보니 자가용을 출장용으로 등록하면 매달 50만원씩 지원금이 나오고, 기름 값도 따로 지급한다는 이 대리의 말에 넘어가 냉큼 차를 구입했다. 사실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단지 그때부터 모든 출장은 무조건 내 몫이 되었고, 다른 회사와의 미팅을 비롯한 모든 공무에 내 차가 활용되는 바람에 졸지에 운전기사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처음엔 몰랐을 따름이다.
그렇게 이 대리의 꾐에 넘어가 차를 구입했던 나는 그때부터 친구들에게 자랑 질을 했다. 제대하고 바로 어학연수를 다녀오느라 겨우 2년차인 나와는 달리 3년차, 4년차에 접어든 친구들이 봤을 때는 내가 은근히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친구들을 보면서 결정적인 한마디를 남겼다.
“야! 요즘 여자들은 차 없는 남자하고는 데이트도 잘 안하려고 한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친구들은 각자의 취향에 맞는 자동차를 차례로 구입했다. 하지만 나는 물론이고 내 친구들도 여자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차는 결국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차 하나만으로 충분조건이 되려면, 최소한 외제차는 끌고 다녀야 한다. 여기서도 빌어먹을 ‘부익부, 빈익빈’의 원칙이 적용된다. 더러운 세상이다.
어쨌든 그렇게 자동차를 구입한 우리들은 학교에 올 때마다 차를 끌고 왔다. 버스타기 귀찮은 점도 물론 있지만, 후배들이(물론 남자후배들이다) 가끔씩 내뱉어 주는 감탄사를 괜히 듣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오! 형 이번에 새로 샀다는 차가 이거에요.”
“오! 내비가 내장되어 있네요. 멋지다.”
“오! 선루프도 있네요. 한 번만 열어봐 주시면 안 돼요?”
“오! SUV네요. 바퀴는 몇 인치예요?”
“오! 이 차 아이팟 터치도 연결돼요?”
남자는 어쩔 수 없는 애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후배들의 무한한 관심에 기분이 우쭐해지다 보니 거리가 코앞이라도 차를 기어코 끌고 나온다.
학교 앞에서 만난 우리는 가장 먼저 편의점에 들러 커피우유를 샀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커피우유에 빨대를 꽂고 사람구경을 한다. 저녁시간에 모이면 학교 도서관이 문을 닫는 시간과 비슷하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 가끔 아는 선배, 동기, 후배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친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우리의 대열에 끼어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쓸데없는 수다와 사람구경에 허비하다 보면 처음처럼 네 명이 남기도 하고, 가끔은 뉴페이스가 함께 하기도 한다. 뉴페이스가 등장하면? 당연히 술집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지인이다 보니 그 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우리 사인방 서로의 이야기야 너무 자주 들었지만, 그래도 신선하게 들어주는 뉴페이스가 있어서 그런지 딱히 지겹지도 않다. 대학시절 하도 부어라 마셔라 했던 사이라 그런지 직장생활하면서 술에 물려서 그런지 우리끼리 만나면 절대 폭음을 하지 않는다. 그날은 뉴페이스와 함께 기분 좋게 취해서 기분 좋게 헤어지면 그만이다.
만약 뉴페이스가 없으면? 그때는 술도 안 마신다. 당구장에서 몇 게임 하고 헤어지거나 아쉬우면 가끔 겜방에 가서 스타 몇 판하고 헤어진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을 죽이고 나서, 헤어질 시간이 되면 반드시 나누는 이야기가 있다.
“다음 주에는 보지 말자.”
보통은 여지없이 다음 주에 만나지만 가끔은 한동안 만남이 없을 때도 있다. 누군가의 결혼식이 있거나, 고향에 내려가거나 또는 소개팅이 잡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누군가에게 소개팅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면 우리는 마치 우리 일처럼 긴장한다. 그날은 신간으로 나온 만화책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저녁부터 네이트온에 로그인을 해놓고 소개팅 나간 녀석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9시 쯤 되면 우리끼리 모여 그룹 채팅에 들어간다. 소개팅 정보도 묻고, 오늘 소개팅은 과연 어떨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마동수 : 소개팅 누가 해주는 거래?
송정수 : 후배 XXX가 해주는 거라고 하던데?
장현우 : 뭐야 그 자식! 나랑 더 친한데 왜 태균이를 해준대?
송정수 : 몰라. 지방 사람은 싫다고 했나봐. ㅠㅜ
마동수, 장현우 : 개년!!!
대충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소개팅 간 친구가 로그인 하면 우리는 동시에 채팅을 날린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우리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다.
마동수, 송정수, 장현우 : 예쁘냐?
아니라고 하면 친구의 불운을 위로해주며 속으로 환호한다. 만약 ‘응’이라고 대답하면 어김없이 배가 아파온다. 그리고는 마구마구 심술을 부려준다. 이번에도 차이겠다는 둥, 차여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는 둥, 그래도 한 두 번은 만나주지 않겠냐며 잘해보라는 맘에도 없는 위로의 말도 건넨다. 딱히 미안하거나 그렇지는 않다. 내가 소개팅을 나가도 녀석들은 똑같은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이제 시작이라 주로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한 간단한 소개였습니다. 뒤에 나오는 3~4회는 주인공의 직장동료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할 예정입니다. 프롤로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코믹한 느낌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중입니다. 아직 초짜라 그런 코믹한 뉘앙스를 글에 어떻게 담을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