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6 지랄이 풍년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대학선배를 만나 과음을 했다. 서기욱 선배는 나와 동기 그리고 후배 몇 명을 타락의 세계로 인도하신 분이다. 군대 가기 전까지 개골목(술 먹고 개가 돼서 나온다는 곳이다. 대학가라면 비슷한 곳이 웬만하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에서만 놀았던 우리다. 대로만 건너면 신촌이, 지하철 타고 두 정거장만 가면 홍대가, 반대 노선으로 한 정거장만 가면 이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진했던 우리는 모교 사람들에게도 외면 받는 서강대 개골목이 세상의 중심이라도 되는 양, 이곳을 벗어나면 무슨 엄청난 배신자라도 되는 것처럼 충성을 다했었다.
제대하고 돌아오니 처음 보는 괴상한 인간이 과방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인간이 바로 서기욱 선배였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통도 크고, 무엇보다 음담패설 내공이 엄청나서 순진한 복학생이었던 나와 동기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처음에는 우리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냥 별종인 선배가 하나 있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복학을 해도 우리의 생활은 입대하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새로 들어온 새내기 녀석들과 축구나 농구를 하며 남자끼리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함께 개골목으로 가서 맥주에 치킨을 뜯으면서 복학생 생활을 즐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기욱 선배에게 자꾸 이야기를 듣다보니 남자로서의 본능적 호기심이 꿈틀거리고 말았다.
기욱 선배가 알려준 세상은 별천지였다. 수많은 종류의 바(bar)와 홍대 클럽, 강남의 나이트 그리고 안마시술소와 방석집까지 한 번도 그런 곳에 가보지 못했던 우리에겐 가히 문화적 충격이었다. 학교에서는 무릎위로 올라가는 치마를 입은 여학생도 보기 힘들었는데, 새로운 세상의 여자들은 기본이 속옷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미니스커트였으니 눈이 뒤집힐 만도 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돈을 아꼈고 과외다 뭐다 해서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돈을 모아서는 한 방에 날려버리는,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 시절에는 정말 많은 여자를 만났고, 많이 상처받고 많이 상처를 줬다. 누구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끊어낼 수 있는 의지만 있다면 한번쯤은 겪어보고 교훈을 얻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여자에 대해 어느 정도의 내성이 생겨 여우같은 여자에게도 함부로 휘둘리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 덕분에 나는, 이 대리나 최 주임처럼 신입사원인 강소현의 예쁜 미모에도 혹해 이것저것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유산처럼 남긴 빚 때문에 허덕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봐서 그런지 나는 타락의 길(?)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절대 빚은 만들지 않았다. 삼시세끼를 라면으로 때우는 한이 있어도 절대 내 적금통장은 절대 깨지 않는 영악함을 보였지만, 기욱 선배는 그렇지 못했다. 한동안 카드 값에 허덕이더니 상당한 연봉과 독신자 숙소까지 제공해준다는 지방의 어느 중견업체에 입사해버렸다. 덕분에 카드 값은 부모님이 해준 피 같은 자취방 전세금을 빼서 갚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외롭다면서 거의 매주 서울로 올라오더니 언젠가부터 그곳도 살만해졌는지 연락이 뜸해졌다.
혹시나 그렇게 함께 어울렸던 친구나 마찬가지였던 선배가 카드 값 때문에 고생하는데 도와주지도 않았다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때 당시 함께 어울리던 재형이나 형진이는 집이 꽤 잘 살았었고 현우와 기욱 선배 그리고 나는 한 달에 30만 원 정도를 용돈으로 받는 평범한 집안의 대학생이었다. 현우는 나보다 더 독한 면이 있어서 그렇게 정신없이 놀던 시절에도 과외를 대여섯 개씩 하면서 오히려 돈을 모았고 앞서 말한 재형이나 형진이는 용돈이 넉넉해서 딱히 곤란한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기욱 선배였다. 아르바이트는 절대 하지 않고, 돈이 부족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연락을 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돈을 받아 그 돈으로 카드 값을 충당했었다. 그러고도 돈이 부족하면 라면도 못 사먹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보다 못해 잔소리를 해도 전혀 듣지를 않는다.
“아 형 좀. 알바라도 해서 카드 값 좀 갚아요. 이제 부모님께 댈 핑계도 없지 않아?”
“괜찮아. 나는 몇 달 뒤에 취직하잖아. 그 때 돼서 한 방에 다 갚으면 그만이야.”
그 놈의 한 방 소리. 후배였으면 줘 패서라도 억지로 뭔가를 시켰을 텐데, 나는 부모님께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은 동방예의지국의 자손이라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방관했다. 학교에서 만나면 라면이나 사주고 가끔 생각나면 통닭 사들고 선배의 자취방에 찾아가 함께 TV나 보면서 노닥거리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괜히 동정한다고 돈이라도 빌려줬다가는 더욱 정신을 못 차리고 빌려준 돈을 다 써버릴 것이 분명했다. 기욱이 형에게 돈을 빌려주느니 차라리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내 친우나 그의 가족이 갑자기 아파서 급하게 수술비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도와줄 수 있다. 그 외의 금전적 어려움은 '절대 도와주지 않는다.'가 내 평소 지론이다. 사업하는 친구가 급전이 필요하다고 해도 난 모른 척 할 거다. 하지만 망해서 갈 곳 없는 친구를 데려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줄 수는 있다. 같이 구렁텅이에 빠져줄 수는 없다. 그 정도가 내가 알량하게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친구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이다.
처음 지방에 내려가 외롭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해서 꼬장부릴 때는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카드 값 깔끔하게 갚고 새 출발하는 선배의 모습을 보면 내가 한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돈을 빌려줬으면 그 돈도 어느새 다 써버리고 더 큰 빚을 지고 있었을 것이다. 자취방 전세금으로도 다 갚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빚은 무조건 빨리 갚는 것이 남는 거다. 빚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자가 나간다는 소리다. 은행이나 카드회사가 땅 파먹고 장사하지 않는 이상 빌린 돈은 항상 그 이상의 손해를 가져온다. 쉽게 생각하고 뽑아 쓰는 현금서비스의 이자율은 20%에 가깝다. 거의 사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외롭더라도 가지고 있는 빚을 모두 없애고, 꼬박꼬박 받는 월급으로 저축까지 하면서 살 수 있게 된 기욱이 형의 선택은 현명했다.
Rrrr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070으로 시작하는 이상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마케팅부 마동수 주임입니다.”
“오. 마광수!(즐거운 사라라는 책을 써서 구속까지 됐던 연세대 교수의 이름인데 내 이름과 비슷해서 기욱 선배는 나를 저렇게 부른다.) 이제 주임이야? 축하해. 마광수 주임.”
“아. 기욱이 형! 오랜만이네. 주임은 얼마 전에 달았어요. 입사 연차가 돼서 남들 다 다는 주임을 단건데 축하는 무슨.”
기욱 선배와 대화할 때 나는 이상하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쓴다. 이정도면 엄청 친한 사이라는 증거다. 촌놈이라서 그런지 위계질서가 매우 엄격하다.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무조건 존댓말을 쓰고, 한 살이라도 어리면 아무리 친해도 절대 반말을 받아주지 않는다. 기욱 선배의 경우는 하도 말 놓으라고 사정사정해서 이런 식으로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래도 축하. 축하. 참. 에로 팀장(우리 팀장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대리는 개 대리, 김 대리는 김 썅, 최 주임은 모스키토라고 부른다)은 잘 있고?”
이 양반도 은근히 팀장에게 관심이 있다. 야한 여자가 좋단다. 솔직하다나 뭐래나? 내 회사 생활이 꼬이게 된 가장 큰 원흉인데 저러고 싶을까 모르겠다. 나중에 잡아먹혀봐야 ‘아. 동수가 말릴 때 그만 둘걸.’이라며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 솔직히 양 팀장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은 그녀와 잘해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한 번 자보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야한 여자는 아무 남자에게나 가랑이를 벌릴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사는 것이다. 그런 여자가 어떤 면에서는 남자 보는 눈이 더 까다롭다는 사실을 기욱 선배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양 팀장이 그렇게 쉬운 여자였으면, 이 대리가 그렇게 목을 매달고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 그렇죠. 그나저나 이건 무슨 번호에요? 전화처음 보는 번혼데. 070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는 스팸 전화 아니었나?”
“아 이거? 회사 번호야. 전화비 아껴야지. 흐흐흐.”
와우! 정말 지방 내려가더니 사람 됐다. 이젠 전화비도 아끼다니. 자식을 잘 키운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갑자기 가슴이 뿌듯하다. 기욱 형님. 그래 그렇게 아끼고 잘 살아야 나중에 고생 안합니다.
“오. 형이? 전화비를? 안습인데요?”
“흐흐흐. 나도 장가는 가야지. 광수야!”
“동순데요.”
마광수 교수라고도 부르기도 귀찮아서 이젠 광수라고 부른다. 가만 보면 이 대리와 은근히 닮았다. 그래서 팀장에게도 관심을 가지는 건가?
“알아. 알아. 그래도 넌 내게 영원한 마광수야. 그건 그렇고 언제 얼굴한번 봐야지?”
“뭐 그럴까요? 언제 올라 올 거예요?”
“젠장. 너희들이 좀 내려오면 안 되냐? 여기도 물 좋다니깐? 지방이라고 해도 공단이 많아서 끝내주는 아가씨들 많아. 그냥 한 번 내려와라.”
그 놈의 물 타령은. 선배의 씀씀이는 작아졌지만 여전히 환락가를 가까이 하고 있다. 선배가 있는 부서가 워낙 접대가 많은 곳이라 자기 돈은 한 푼도 들이지 않으면서도 노는 스케일은 엄청 달라졌다. 지방에 내려가서 매일같이 외롭다고 칭얼거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잘 적응하며 살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에이. 그래도 올 거면서.”
“그래 뭐 내가 무슨 힘이 있냐. 아무튼 이번 주말에 시간 비워둬라. 애들한테도 연락하고.”
“네. 주말에 봐요.”
전화를 끊고 바로 친구들에게 문자를 날렸다.
- 기욱 성님(우리끼리 이렇게 부른다)에게 호출. 이번 주 토요일 저녁 콜?
“띠링.”
“띠링.”
“띠링.”
잠시 후 하나 둘씩 문자가 도착했다.
현우 : o
재형 : o
형진: o
역시나 깔끔한 녀석들. 알았다는 말은커녕 콜이라는 문자도 입력하기 귀찮아서 하나같이 저런 식으로 답문을 보내왔다. 우린 정말 쿨한 친구사이다.
============================ 작품 후기 ============================
분량 맞추는게 어렵네요. 웬만하면 한 회에 에피소드 하나를 그대로 담고 싶은데 너무 짧거나 너무 길거나 그런식이네요.
동수라는 캐릭터에 어울릴 것같은 우정 방식인데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직장다니시면서 성실 연재하시는 분들 존경합니다.